초임 발령을 받고 첫 수업, 첫 교실에 들어서자 나는 쫄.았.다!
시커면 얼굴의 머리 큰 머슴아들이 '저건 또 머야'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큰.일.이.다.'
교실에 나보다 작은 학생은 없었다. 시골에서 하나같이 발육이 좋은 아이들은 내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나는 복도를 다니면서도 아이들이 내 정수리를 볼 수 없도록 해야 했다. 도무지 이건 선생님의 영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학생들이 모두 고개 숙여 인사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생존의 문제였다. 교권이란 개념도 없던 시절(그 단어는 너무 당연한 거라 생각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던). 여튼 나는 내 정수리를 지켜야 했다.
어느 날 사회 수업 시간, 올 것은 오고야 마는 것이었다. 뒷줄 맨 끝에 앉은 한 학생이 스멀스멀 기어오를 기미가 보였다. 마침내 그 녀석은 "왜 그래야 하는데요? 싫은데요!"라는 말을 나에게 내밷고 말았다. 나는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물러설 순 없어. 그래, 오늘 너 죽고(?) 나는 살아야(?) 하는 날이야.' 어려 보이는 몽땅한 신규 선생님이 그들의 일진을 어떻게 기선 제압하는 지를 아이들은 숨죽여 지켜보고자 했다. 관전 중이었다. 다들 쟤를 다룰 줄 알면 널 인정할게 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뭐야! 너, 일어서!(왜 괜히 일으켜가지고,, 줸장,, 대사가 틀려 먹었군.).
너 지금 선생님에게 뭐라고 했어!"(다 들었는데,,쩝,, 숨고르기 들어간 순간임).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수업이 가진 공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걸로 냅다 찌르기에 들어갔다.(사회 선생님인게 천만다행이다. 나는 내 전공에 아주 만족한다. 나름 멋있게 얘기했다.)
그런데 그 놈은 고개를 45도 각도로 내려 한번 돌리는 걸로 응수했다. 그래서 뭐 어쩔?하는 눈빛으로 나를 강하게 쏘아대고 있었다.(아, 무서워. 어쩌냐..ㅜㅜ)
나는 다시, 너의 이런 행동은 아주 무례하고 막돼어먹은 것이며 앞으로 또 이렇게 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온몸으로 쏘아붙였다. 작은 눈은 3배 이상 키웠(을거)고, 가슴엔 공기를 넣어(화난 복어?)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목소리로 단호하고도 큰소리로 일갈하였다(포효하는 사자로 봐주시면?).
놈은 쬐깐한 여자 선생님이 씨알도 안먹히게 단단한 모습에 잠시 물러나는 듯 주먹쥔 손도, 대들던 가슴도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의자를 한번 발로 차더니(딴에는 마지막 반항인) 제 자리에 예의 삐딱한 그 모습 그대로 앉았다. 나는 기회는 이때다 생각하며 마무리 한 판승을 위해 다시 소리쳤다.
"똑바로 앉아!".. 아이들은 뒤의 그 녀석을 한번 보고 교탁의 나를 한번 보고 그렇게 번갈아 보며 관전을 끝내고는 선생님의 승이라는 표정을 보냈다. 내심 저희들 반의 일진이 그렇게 찌그러진 게 다행이라며 숨죽였다.
그 녀석이 요구했던 사항은 사실 고작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거였다. 그 당시 교육사회적 분위기상 수업 시간 화장실을 가는 것은 금기였다. 나를 어설프게 보고 쉬운(?)선생님을 골라 화장실 가는 타임을 노린 것 같았다. 그래서 질 수 없었다. 그 수업 시간 이후로 일진과 한판 뜬 선생님이라는 무용담이 전 반에 퍼졌다. 어떤 녀석은 선생님이 그랬다면서요? 라며 친한 척 엉겨붙었다.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그 해 8반에 2시간씩 총 16시간의 사회 수업 시간 동안 내게 불손한 아이는 없었다. 물론 그 나이 또래 남자 아이들의 근거없는 자신감은 종종 초임교사인 나를 울리기도 했지만 이래저래 1년을 아니 임지 4년 내내 아름다웠던 추억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녀석이 나를 봐준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그 학생을 만난다면 또 술 한 잔 건넬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그 아이에게 지금은 고맙고도 그렇게 다그쳐 몰았던 게 미안하기도 하다. 고 1이면 그냥 17살 아이인데 말이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들의 수업을 지켜내기 위한, 공적 권위를 어떻게든 가져보고, 어떻게든 가르치고 배우는 교실을 지켜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나의 선택과 몸부림이었음을 그 아이도 이해해 줄 나이가 이제 되었겠지?
-00아 널 미워한 게 아니란다. 혹시 이 글을 보게 되면 꼭 선생님을 용서해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