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류바의 추억
2년 만에 복직을 앞두고 있다. 그간 교사로서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알게 해 준 사람과 사건을 끄적거리며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싶어졌다. 떡볶이를 사달라며 매년 한번씩 전화하는 제자가 떠올랐다. 네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겨울방학을 마치고 방학숙제를 검사했다. 딴 건 몰라도 일주일에 책 한 권은 꼭 읽자고 그리도 외쳤는데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권도 읽지 않고 학교에 온 아이가 무려 5명이었다.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이제 곧 6학년으로 올려 보낼 아이들인데, 방학숙제 그까짓 거 좀 안 했다고 물고 늘어질 일도 아닌데, 나는 굳이 안 한 숙제는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고 힘차게 외치며, 책 한 권당 40분으로 퉁쳐줄 테니 5일 동안 남아서 읽고 가라고 했다.
책 읽기 첫날이었다. 5명의 (남자) 아이들은 날도 추운데 집에도 못 가고 교실에 남아 책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꼈는지 강강술래라도 할 분위기로 모여 앉아 있었다. 심지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 신경 쓰지 않던 우정을 다지고 있었다. 40분 동안 “책 읽어라. 장난 그만해라. 조용해라.”를 외치다가 뒷목 잡게 될 내 모습이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나는 서둘러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를 틀어 분위기를 만든 뒤 멀찌감치 떨어져 앉도록 자리를 지정해 주었다.
아이들은 책 읽기가 나름 재밌는 일이라는 것을 12살 평생 경험해보지 못했는지 책에 빠져들기는커녕 시계 쳐다보고 한숨 쉬고, 엎드려서 책장을 넘기다가 한숨 쉬고, 갑자기 책을 휘리릭 넘겨 맨 뒷장을 들여다본 뒤 벌떡 일어나 다른 책으로 바꿔왔다. 나는 이 순간 묘하게 어린 시절 tv에서 수없이 들었던 노래가 생각났다. “이상하게 생겼네. 롯데 스크류우바~ 삘~삘~ 꼬였네, 들쑥날쑥해~” 어린이들은 몸을 베베 꼬며 스크류바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40분간 책을 읽어야만 집을 보내주겠다는 강한 의지로 스크류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할 일을 했다.
그렇게 책 읽기를 이어가던 어느 날. 한 녀석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화장실 다녀와도 돼요?” “응. 그래!” 한참을 화장실에 다녀온 아이는 다시 책을 보다 하품을 연신 하더니 또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선생님. 물먹으러 갔다 와도 돼요?” “응. 그래!” 아이는 교실밖 정수기 앞에서 홀짝홀짝 한참을 마시고 돌아와서 다시 책을 보았다. ‘화장실도 다녀왔고 물도 마셨으니 이제는 더 이상 나갈 구실을 못 찾겠지?’하며 아이를 슬쩍 쳐다보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아이는 다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어... 이번에는 뭐지? 더 말할 게 없을 텐데...’하며 바라보는데 아이는 당당히 말했다. “선생님. 방귀 뀌러 밖에 나갔다 와도 돼요?” 와~~~~ 강적이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키득거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 아이를 쳐다보고 있는데 아이는 곧 한마디를 보탰다. “에이.. 방귀 나왔다.”
이렇게 연준이의 힘겨운 노력 끝에 겨우겨우 40분이 흘렀고 “시간 다 됐다. 집에 가라.”란 말이 떨어지고 1초 만에 교실에는 어린이가 사라졌다.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만 빈 공간을 채웠다. 나는 모차르트를 끄고 스크류바 cm송을 틀었다. 그리고 "선생님 저 정말 책 너무 읽기 싫어요. 너무 재미없어요. 죽겠어요. 집에 가고 싶어요" 등 징징쏭을 대신해 방귀 뀌러 나가도 되냐고 물어 모두를 웃게 한 연준(가명)이가 귀여워 한참을 키득거렸다.
그렇게 엉뚱하면서 재치 있던 연준이를 이번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 일 년에 한 번씩 전화해서 잘 지내시냐며 안부를 묻고 떡볶이를 사달라고 하던 연준이. 이제 떡볶이 좋아할 나이는 지났을 텐데 그래도 나는 떡볶이를 먹자며 연준이에게 연락했다. 연준이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해 보고 같이 나오겠다고 했는데 그 다른 친구들이 내 기억으로는 남아서 몸을 베베 꼬던 5명의 아이인 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이 아이들과 떡볶이 먹은 다음에 스크류바를 사주고 와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