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 위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30대 초보 운전자
오랫동안 운전은 어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답답하니 오늘은 바다로 드라이브를 가볼까? 라고 쉬이 결정을 한다던가. 내가 데릴러 갈게. 라는 멋진 말을 툭툭 던질 수 있는. 그런 어른 말이다.
충동적인 드라이브나 어른스러운 픽업 따위 할 수 없었던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운전'은 그저 내가 할 수 없어 더욱 어른스러운 일이었다. 자립에 관한 에세이집, <서울에 내 방 하나>에서 말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운전하는 옆 모습' 같은 거라고. 같이 취업 준비하고 떡볶이 나눠 먹던 남자친구가 조그만 낡은 중고차를 하나 타고와서 나를 태우고 이탈리아 식당으로 가던 그 모습에 갑자기 그 사람이 진짜 '오빠' 로 느껴지는... 그런 것이다. 막상 운전석에 앉아있는 그 사람은 운전하지 않을 때와 똑같은 '그저 그 사람'일 뿐인데 말이다.
어린 시절, 명절에 슬그머니 술 한잔 맛보라는 어른은 있어도 운전대를 맡기는 어른은 없었다. 적어도 우리 집은 그랬다. 장난삼아 미리 경험해 보기엔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것. 사전 검증이 상당히 필요하고, 그래서 조금은 성스럽기도 한 것이었다. 어른의 것이었다.
당신은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우리 아버지는 이상하게 자식들에게 기본 소양으로서의 운전 능력을 아주 강조하셨다. 한 마디로 인간 노릇 하려면 운전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학원 입학했을 때도, 얼른 면허를 따서 집에 있는 차를 가져가라고 했고, 먼저 운전을 시작한 오빠가 차를 바꾸고 싶어할때도, 얼른 차 바꾸고 타던 차는 나를 주어야 한다고 여러 번 강조할 정도였다. 이런 사회적 압박(?)과 운전을 할 수 있는 여러 번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나는 그 모든 기회를 깔고 앉고 있다가 30살이 되어서야 겨우 면허를 땄다. 흔히 말하는 '물면허 시험'의 끝물에 뛰어들어 운 좋게 면허를 딴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도 운전을 두고 나의 '간 보기'는 계속 되었다. 대학원에 다니던 25살 부터 34살이 된 지금까지, '저 곧 운전할거에요.' '차 사려구요.' 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세어본다면, 100번도 보수적인 수치일거다.
훌쩍 드라이브를 떠나는 모습. 보호해주고 싶은 누군가 늦은 밤에 혼자 위험하게 걷지 않게 데리러 가는 일. 지금와 생각해보니 그것은 차를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여정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고, 때로는 주변 사람들도 보살필 수 있는 어른의 여유와 같은 것이었다. 나아가 그것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 있어 그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야 하고, 그 사람들을 챙겨야만 하는 어른의 책임감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한 밤중에 학교를 나와도 항상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의 든든한 모습 같은. 나는 그런 보호 속에서 자랄 수 있어, 늦은 밤에 혼자 걸어 귀가를 하지 않아도 되었고, 최고의 여행지는 아니어도, 근교의 바닷가로 가끔 나다니면서 멋진 풍경들을 눈에 담으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는 내 몸뚱이 하나만 건사하면 되었다.
작년, 나는 일을 하느라 무척이나 바빴다. 똘똘하게 일한다는 평은 종종 받아왔지만, 5년차가 되어 무언가를 책임지고 일할 수 있는 역할을 받았을 때, 2인자로 불만을 궁시렁 거리면서 일하는 것과 책임지는 것 간의 엄청난 간극이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같은 시기, 엄마는 생애 2번째 암을 진단 받았다. 나는 일꾼으로도, 가족으로도, 누구에게도 상처 주고 싶지 않고, 멋지게 책임지고 싶었다. 아, 어른이 되어야 할 때구나. 지금은 덤덤히 얘기하지만, 꼼짝달싹 없이 이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 나의 가슴을 묵직하게 괴롭힌 주제이기도 했다. 작년에 가장 많이 중얼거리던 말이 '어른이 되고 싶다'는 말이었던 것 같다. 아마, 올해에 들어오는 시점에서도 '어른이 되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암을 진단 받은 엄마는 대학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고향집을 떠나 우리집에 자주 머물렀다. 집에서 병원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갈아 타고, 2시간이 조금 안 될 거리였다. 집에서 서울대 병원이 도보 10분 거리였는데, 하필 먼 곳에 가서는 저러는지. 검사 같은 것들의 이유로 아주 이른 아침에 병원에 도착해야 할 경우도 있었는데, 병 때문에 계속 살이 빠지는 와중에, 작아진 몸을 일으켜 세워 새벽길을 혼자 나서는 엄마를 보고 느꼈다. 아 차를 사야 겠다.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이 혼자 걷지 않도록 내가 그들을 태워야 할 때가 되었구나.
지금까지 여러분은 가장 거창한 '내가 차를 산 이유'를 듣고 있다. 운전을 하기로 했다고 누군가에 말했을때, 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왜요? 차를 사려는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에요?" 나는 왜 저 이유가 궁금하지...라는 생각을 먼저 하면서도, 사실 서울이 차가 없어도 꽤 편한 도시라는 것을 먼저 인정하면서 말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맞다. 어떨때는 차가 없는게 되려 편하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출퇴근 길에 운전을 하면 버스 타는 것보다는 시간을 줄일 수 있지만, 그나마도 지하철을 타는 것보다는 더 오래 걸리더라.
그래서 준비했다. 운전을 하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여기 이유가 있다.
여러 이유로 글을 쓰지만, 오랫동안 함께 나눌 글을 쓰지 않았다. 본업이 바빴고, 그간 많은 신변의 변화가 있었고, 사건/사고가 있었고... 누구에게나 그렇듯 핑계거리는 너무 많다. 하지만 내 안의 여러 가지들을 잠잠하게 재워나가는 과정 속에서 다시금 글이 쓰고 싶어졌고, '운전'이야 말로 나에게 완벽한 소재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차를 사기로 결심한 것은 시간상으로 꽤 오래 전의 이야기이고, 이후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미친 듯 일했던 나날들의 기억은 많이 훼손되었는데, 운전은 꽤 신선했는지, 도로 위의 순간 순간이 기억에 또렷이 남았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단순한 운전의 이야기만로 끝나지 만은 않을 것 같다. 아마 2020년을 살아가는, 내 자신의 기나긴 이야기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