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알고 있거든
점심을 먹고 나른한 시간에 알림 톡이 하나 온다. 어머나, 벌써 보험 갱신의 계절이다.
아직도 전원을 켜고 액셀에 발을 살포시 올릴 때는, 드라이빙의 즐거움과 설렘 같은 것보다는 오늘도 아무 사고 없이 출발하자는 굳은 결심과 도로에서 객사나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차를 쌩쌩 몰고, 멋지게 달려 나가는 즐거움보다는 당장 이 좁은 주차장에서 내 차를 어떻게 빼낼까 하는 걱정에 온 신경이 바짝 곤두서게 된다.
그런 내가, 운전자가 된 지 1년이 되었다니. (그리고 보험료는 올랐다)
지난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리 던 날, 이중, 삼중 주차된 지하주차장에서 끙끙 거리며 차를 빼느라 기둥에 매달린 소화기에 끄트머리를 톡 하고 쳤더니 후두둑 하면서 백미러를 날려 먹었다. 그로부터 4개월 전에는 한 여름에 얇은 잠옷 티셔츠 하나 걸치고 충전하러 나갔다가(내 차는 전기차다), 주차장 기둥에 앞 범퍼를 후두둑 다 뜯어먹고, 긴급 출동을 부르고서는 펑펑 울었다. 여름의 에피소드에 비하면, 백미러 하나 정도는 애교였지만. 차가 무언가에 부딪히며 핸들이 덜덜덜 떨리고 이윽고 푸드득 하면서 부품들이 떨어져 나가는 그 모습은 언제나 충격적일 것 같다.
그러고 나서, 6개월. 폭설이 멎고, 꽃비가 내렸고, 이제는 여름이 임박했다. 그동안 내 차에는 어떤 일도 없었다. 여전히 허접한 운전 실력이나마 개인적으로는 운전 실력에 가장 큰 발전이 있었고, 자신감도 생긴 시간이었다. 주차하거나 차선을 바꿀 때는 백미러와 측, 후방 카메라 등 요것 저것 야무지게 확인하고, 도로 위에서의 시야도 넓어져서, 어떤 차가 깜빡이를 안 켜고 내 차선에 마구 밀고 들어올 건지도 제법 잘 보이게 되었다.
운전을 아예 할 줄 몰랐던 시절에는, 고속도로 위에서 100km, 150km의 속도로 빠르게 달리는 것이 가장 고난도의 스킬이고 겁 없는 행동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것은 겁 없는 행동일 수는 있지만, 단순한 스킬에 불과하였으며,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다. 진짜 긴장해야 하는 순간은, 빠르게 직진을 하는 순간이 아니라 속도를 줄여 제대로 된 출구를 찾아 적당한 타이밍과 속도로 빠져나와야 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이 순간을 한 두 번 놓친 게 아니다.
사실 나만 이런 것은 아니지만, 이게 정말로 집단적인 '바보스러움'인 것이... 요즘 내비게이션이 얼마나 우렁차고 끈질기게 길을 알려주냐. 교차로에 가기 전에 표지판도 한 두 개가 달린 게 아니고, 도로 위에 너무 친절하게 볼드 타입 글자가 문신처럼 박혀 있다 못해 형형색색 페인트 칠로 길을 따라 '이쪽으로 오세요' 라며 친절하게 표기해주었건만. 순간 방심하면 다른 길로 들어가기 직전이거나, 이미 다른 길에 들어온 직후다.
얼마 전 대체 휴무를 받아 평일 오전에 남부럽게 등산을 다녀오겠노라 결심을 하고 길을 나섰다. 남들이 출근할 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 아니겠냐며 대차게 길을 나섰지만, 정말 거짓말처럼 교차로 5미터 앞에서 "어후 잘못 들어갈 뻔했네"라고 하며 핸들을 꺾어 "실제로" 잘못된 길을 택하는 실수를 범했다. 순간 내비게이션이 반짝하면서, 16km 앞에서 오른쪽 출구로 빠져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렇다. 나는 양재로 향하고 있었다.
출퇴근하며 매일 지나가는 지옥 같은 양재인데, 쉬는 날 하루만 안 지나갈 수는 없었던 걸까?
그날 나는 분당에서, 양재를 거쳐, 안양에 도착했다. 사실 이 정도면 뭐 거의 출근한 거나 다름없다.
이게 바보스러움의 절정이었던 것은, 이 길이 초행도 아니었거니와 나는 너무 안전하게 원래 가야 할 길을 잘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무슨 귀신에게 홀린 것 마냥 분리대 직전에서 황급히 핸들을 꺾고, 5초 안심한 뒤, 다시 그 5초 뒤에 더 크게 당황하게 된 것이다.
"아, X. 아까 그 길이 맞았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순간, 도착 예상 시간이 40분을 점프해 버린다. 말도 안 되는 경로를 가게 되어 당황스러운 내 마음과 별개로 내비게이션은 참 침착하고 냉정하다. 나의 당황스러움을 알리 없는 이 차가운 기계는 여전히 짜증 나게 상냥한 목소리로 새로운 길을 안내해준다. "어머, 이 길로 들어왔니? 그럼 이제 이 길로 가야 돼!" 라며 다음의 길을 그저 평온하게 안내해줄 때, 그저 다혈질인 인간은 씩 씩 숨을 고르고 있을 뿐이다.
지금보다 더 초보인 시절에는 더 최악이었다. 출구 바로 앞에서 혹은 바로 직후에서 내가 다른 길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면서 원래 가야 할 방향으로 나도 모르게 핸들을 휙 돌려 버리거나, 브레이크를 밟게 된다. 내 앞에 차가 나처럼 했다면 쌍욕을 퍼부을 건데, 길을 잘못 든 순간은 나도 모르게 몸이 먼저 그렇게 반응했다. 나는 아무런 잘못 없는 내 뒤차에게 위험이 되었고, 내 주변 차량의 경로에 방해되었으니, 엄청난 경적 소리를 당해도 마땅하지만, 그 경적 소리는 나를 더 패닉으로 만들 뿐이었다.
만 1년을 바짝 채운, 여전히 초보운전자인 나는, 이럴 때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하다. 무리해서 다시 원래의 길로 방향을 틀고 싶거나, 뒤늦게 내 길을 깨달아 급하게 끼어들고 싶을 때 나는 되뇐다.
"내비게이션은 절대로 날 포기하지 않아. 조금 늦게 도착할 뿐, 대세에는 지장 없다."
지난 1년간 운전하면서 계속 길을 잃었다. 처음 가는 길 위에서는 물론이고 집 근처에서 조금씩 길을 잃고 헤매었다. 하지만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저 조금 늦을 뿐이다. 돌아가는 것은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 자신을 위험하게 만들거나, 주변의 경로를 방해해서 사고가 나면, 그것은 대세에 지장을 준다.
내가 늘 원하는 곳에 도착 할 수 있는 이유는 내비게이션이 절대로 날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대적 감성으로 말하자면, 이 기계는 특정 장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무조건 최단 경로 혹은 최적의 경로를 반복적으로 검색해서 사용자에게 보여주기로, 그렇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전기만 공급되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지치지 않고 같은 태스크를 반복하겠지.
문과적 감성으로 말하자면, 어디에 도착할지만 정해져 있다면, 어떻게든 우리는 그곳에 가게 된다. 중간에 대세에 지장을 주는 사고만 나지 않으면 된다.
인생의 길도 내가 가야 할 길도 이렇게 목적지를 콕 찍어둘 수 있다면 어떨까? 그래도 교차로에서 불안해하며 무리하게 끼어들거나 쌍욕을 하며 동동 거리게 될까?
목적지는 알 수 없다 하더라도, 또는 잘못된 출구로 실수로 나갔다 하더라도, 패닉에 빠져 갑자기 차를 세우거나, 옆 차를 거의 박으려고 하면서 무리하게 재진입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 늦을 뿐. 안전하게 어떤 곳에 도착할 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도로 위에서 해 보았다.
헤매는 것이 대세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접근은, 이렇게 여러모로 나의 정신 승리를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