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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Sep 01. 2018

지금, 가장 주관적인 제주

혼자서도 꽉찼던 주관적 여행기

한 번은 정말로 그냥 혼자 떠나보고 싶었다.

운전도 할 줄 모르고, 혼자서 흑돼지 구워먹을 배짱도 없지만,

달고 쓰고 시고, 먹먹한 그 풍경을 턱 괴고 앉아 오래도록 혼자 지켜보고 싶었다.




17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왔던 수학여행

길에 지나가던 젊은 오빠를 꼬셔서 소주를 사달라고 한 다음에 방에서 친구들과 나눠마셨고, 새벽까지 노느라 피곤해서 여행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21살, 첫사랑을 군대에 보내고 적적한 마음에 한 달 과외비를 모두 탕진했던 우정여행

한라산에 올라가서 첫사랑 이름을 부르면서 엄청 울었다.


워크샵 참석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왔던 고급 리조트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새벽 3시까지 피피티 만들면서 룸메이트와 소주를 마셨다. 일을 하면서 술잔을 꺾으면서 타자를 바쁘게 치는 나의 걸크러쉬한 모습에 언니들이 반했고, 3시에는 일을 끝낸 후 본격적으로 부어라마셔라 했던 것 같다. 언니들과는 이후에도 전주, 제주도 등을 같이 여행 다녔다.


새벽 5시에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놓치고, 충동적으로 왔던 당일치기 제주도 여행

무려 아침 8시에 비행기를 타고, 저녁 8시에 돌아가는 혁신적인 일정으로 당시 핫했던 월정리를 포함한 제주도의 동북쪽 해벽을 따라 달리는 여행이었다. 이 때, 함덕 해변과 델문도 카페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낭만적인 만남이 있었던 해변

해변에서 특별한 사람을 찾았던 일도 있었다. 곧 이어 큰 상처를 줬지만, 어쨋건.


태풍에 갇힌 출장길 

출장과 태풍이 겹쳐 섬에 갇힌 뻔한 적도 있었다. 엄청난 비를 뚫고 힘들게 택시를 타고 공항까지 가서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겨우 잡아서 섬을 탈출했다.


남자친구가 서프라이즈로 준비해 준 여행

 "그냥 월요일 하루 휴가 내" 라며 토요일 저녁에 나를 픽업해서 공항으로 달리며 표를 내밀었다. 회사에서도 일하다가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올만큼 좋은 때였다.


아버지의 퇴직 여행

30년을 공직에서 일했던 아버지가 퇴직하시고, 결혼한 오빠와 새언니까지 함께 단란한 가족여행을 했었다. 워커홀릭이었던 아버지와의 여행은 거의 20년 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여행들 사이에

나는 그냥 제주도로 오곤 했다.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다른 때에는 무엇이든 해 볼 수 있는 그런 곳

그런 곳 하나쯤은 가지고 싶었고, 제주도는 나에게 그런 곳이다.


그래서 그냥 또 떠났다. 위의 주관적인 여행에 +1 정도로 하나 더 이야기를 쌓고 싶었다.




나의 주관적 입장 1 : 푸른 바다에 대한 동경


제주도를 '또 다시' 선택한 가장 큰 이유. 바다에 대한 동경 때문이다.

나는 바다를 몹시도 좋아한다. 얼만큼 좋아하냐면, 바다를 바라보면서 쉬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될 정도로 좋아한다.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아이쇼핑으로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병이 나는 것처럼. 


금능 해수욕장으로 걸어가던 길, 조용한 어촌에서 잠시 쉬어가라는 듯 고즈넉하다
모두의 수영장, 판포포구


이번 여행은 '혼자서 바다를 오롯이 즐겨보겠다'는 목적이 컸다.


아득히 멀리 보이는 해안선 위로 낮게 구름이 깔리고, 시야에 아무것도 가려지지 않은 채

물에 내 몸을 던져 살포시 띄우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그 상태가 좋다.

온전히 넓은 세상에 홀로 띄워진 내 자신. 끝도 없는 해안선을 보며 잠시 공포를 느껴보기도 하고

그저 작은 자연물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난 수영을 하지 못했다. 바다에 풍덩 들어가는 건, 그냥 들어갔다는 거다.

늘 내 맘대로 몸을 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음이 너무 아쉬웠고

그래서 올해는 꼭 바다를 더 즐겨보겠다는 마음으로 수영을 배웠다.


준비물은 구명조끼, 스노쿨링 마스크

그리고 약간의 수영 실력이다.


그리고 스노쿨링하기 좋다는 판포포구에 혼자 당당히 자리를 잡았다.

혼자서 평상 하나를 4만원이나 주고 빌려서 하루종일 바다를 들락날락 거렸다.

3~4M는 될 것 같은 깊이었지만, 약간의 수영 실력보다 더 튼튼한 구명조끼를 갖추었으니 두렵지 않았다.

물을 무서워하지 않고, 팔을 휘저으며 수평선을 하루종일 구경했으니

이미 이 곳에 와야 할 이유 중 80%를 달성했다.




나의 주관적 입장 2 : 머무르고 싶었던 작은 동네


서울에서도 그렇지만, 여행을 가서도 나는 '동네'를 살핀다.

'그래, 이 동네면 이렇게 살만하겠어.' 라고 판단을 하고, 그 동네를 메모하기도 한다.

금능은 여러 번 스쳐지나갔지만, 한 번도 머물지는 않았던 동네였다.

옆 동네 협재는 그야말로 청춘들의 놀이터.

나 역시 협재에 머물었을 때는, 잠도 자지 않고 나와서 밤새 술도 먹고, 새 친구를 사귀느라 바빴던 것 같다.


그 때 사귀었던 친구 한 명이 스쳐 지나가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금능이 제일 예쁘다고, 제주도 분이 그러더라고."


그 친구가 나에겐 특별한 사람이 되었기에, 그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생각했다. 언젠간 고즈넉한 금능에서 하룻밤을 보내야지.


금능은 월령리 선인장 마을과도 이어지고, 판포 포구에서도 차로 10분 정도 거리 밖에 되지 않는다.

협재처럼 비양도가 정면으로 보이는 작은 동네.

크고 유명한 식당들은 몇 군데 없지만, 그래도 해변가에는 제법 식당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고,

골목 골목 조용한 카페도 있다.


숙소들은 작은 담장을 그대로 보존한 채 약간 현대적으로 개조한 주택들이 많다.

숙소들 중간은 모두 가정집이라, 저녁이 되면 강아지들이 낯선 손님을 경계하느라 열심히 짖어댄다.

나는 그 중에서도 작은 골목길을 한참 걸어서야 들어갈 수 있는 '단추스테이'를 숙소로 잡았다.



금능에 도착하자마자 마을 어귀에서 왠 강아지 한마리가 나타나 친한 척을 한다


마을 어귀에 도착하자마자, 온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나오더니, 갑자기 친한 척을 했다.

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 혼자 신나서 앞장서 걸어가길래,

나도 생각없이 따라가 보았더니 별안간 숙소에 도착했다.


1층짜리 작은 집, 마당에는 빨래가 널려있고, 파란 현관문에는 작게 'button' 이라고 적혀 있다.

내가 숙소에 도착한 후에도 강아지는 마당을 킁킁 거리며 한참이나 냄새를 맡는 것 같았다.

환히 반겨주는 주인 언니 때문에 강아지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지만

좁은 골목길에서 또 한번 길을 길어 강아지를 마주쳤으면 좋겠다고 여러 번 생각 했다.  




나의 주관적 입장 3 : 붐비지 않는 카페, 재즈바


금능에는 아주 유명한 재즈 카페가 있다. "Take5 Jazzclub".

이 재즈 카페때문에 금능을 찾는 사람도 있을 정도. 예전에 협재에 여행을 왔을 때, 

걷다가 이미 한번 와본적이 있었던 곳이었지만

이 카페가 밤이 되면, 개츠비의 저택처럼 화려하게 변하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근래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회사의 미혼 여성들이 줄줄이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떠나면서

먼저 다녀온 사람이 알려준 곳인데, 외관에 대한 설명만 듣고서도 

나는 단박에 그 곳이 예전에 내가 잠시 목을 축였던 카페 였음을 알아차렸다.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숙소와 위치를 검색해보니, 걸어서 5분 거리.

알고보니  이 재즈바 때문에  금능을 숙소로 선택한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이렇게 온전히 재즈 공연을 즐길 수 있다니


하루의 일정을 마친 뒤에, 숙소에 잠시 들려 단추언니가 깍둑설기 해 놓은 수박을 나눠먹고서는 

간단히 채비를 챙겨 Take5 Jazzclub으로 향했다. 

샹그리아 한 잔을 시키고서, 편하게 의자에 앉아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연주를 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자니, 이 곳이 어디인가 싶다.


여기가 유럽이었던가?

공연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도 깜깜한 골목길로 마을 안쪽까지 재즈 노래가 들려왔다.

깊은 어둠 사이로 퍼져오는 음악에 현실 감각을 모두 잃을 정도였다. 

그 날은 시원한 밤공기가 가장 훌륭한 악기였다. 




그리고 사람 


제주도라고 모든 사람이 좋은 사람인 건 아니다. 

한 때는 게스트하우스며, 바닷가에서 친구 사귀는 걸 좋아했지만, 혹시나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봐 

이제는 되려 몸을 사리게 된다. 

그래서 숙소도 혼자 머물 수 있는 조용하고 아늑한 곳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숙소로 잡았던 '단추스테이'는 딱 방이 2개만 있는 작은 집이었다. 

2개의 방 사이에는 나즈막한 나무 책장들과 주인 언니가 직접 놓았다는 프랑스 자수,

방석 같은 것들이 다복하게 모여있다. 

앞 방을 예약했다던 커플 손님은 밤이 다 되도록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다음날은 나 혼자 예약을 했기에, 나는 정말로 내 집처럼 편하게 지내다 서울로 돌아왔다.


방 안에 있는 테이블에서 밤 늦게까지 책을 읽기도 했고 

간만에 나만 읽을 수 있는 편지글도 한 장을 채웠다.  


가장 느긋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근 5년 안에 가장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가끔 잠을 줄일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바쁜 때가 있는데, 최근의 나날들은 그런 나날들이었다. 

서랍에 박아두고 꺼내지 않았던 영양제를 찾아 먹었고, 1분이라도 더 잘 쓰고 싶어서 홍삼을 주문했다. 

그날도 나는 주어진 에너지를 다 쓰고, 

1.5일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입에 집어 넣으며 한참 넋두리를 하고 있었다.


아 이토록 바빠야 겨우 제자리를 유지하는 도시 생활이란...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고 했는데, 메시지함에 왠 사진이 도착해 있었다.

 '단추스테이'를 지키고 있었던 단추언니가 보내준 '나의 마지막 모습' 이었다.


나의 떠나는 모습을 누군가는 기록해주고 또 기억을 해 주었다


나보다 고작 10일 먼저 제주도에 내려왔다는 단추언니는 서울에서 제주도에 갓 내려온 따끈한 정착민이었다. 나는 이 곳의 6번째 손님, 혼자서 여행 온 첫 번째 손님이었다고 했다. 

단추 언니가 차려주는 아침상을 받아먹고, 단추 언니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포구에 도착해 물놀이를 하고, 

물놀이하고 지친채 집에 돌아오자, 단추언니는 맥주에 얼음 동동 띄워 깍둑썰은 수박을 나눠주었다. 


밤 수영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지나가는 말을 허투로 듣지 않고서, 

이틀째 되는 밤에는 살포시 나에게 '밤수영'을 제안했다. 

혼자 온 여행자에게 자정의 수영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터. 

더군다나 나는 뚜벅이였다. 하지만 동료가 생긴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밤이 되면, 바다와 하늘이 까맣게 만나

내가 별이 되고, 바다와 하늘이 우주가 될 것 같다고 

그냥 그렇게 막연히 상상하고 있었는데.

정말로 그랬다. 

감격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나쁜 마음도, 나쁜 기억도, 욕심도 없는 '하나의 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처음 만난 사람과

신기한 경험을 했다는 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여행 내내 나는 특별한 노력 없이 한 명의 좋은 친구를 새로 사귄 셈이었다.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 좋은 여행이 될 줄은 몰랐다.

여행이란게, 다녀오기 전에는 설레고 현실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도

다녀와보면 사실 변한 게 없다.

치열하고 정신 없는 삶을 평소에 살았더라면, 돌아와도 그 삶은 치열하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그래도

당신이 지금 여행을 떠나야 한다면

나처럼 '주관적인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소소한 것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한 번즘 해보고 싶었던 것들을 그냥 한 번 해보는 방식으로

혹시 모른다. 

당신의 주관적 여행의 끝자락에도 나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 있을지도.


다음에도 또 한번 떠나고 싶은 

내 마음대로라서 

가장 나를 채워졌던 

주관적 제주 여행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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