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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Sep 17. 2018

Sprezzatura

어렵게 한 일도 쉽게 한 것처럼 

나의 허영심 


매일이 40도를 육박하던 8월의 뜨거운 날들 동안 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2번 마이크를 잡았다.

1500명 이상이 참여하는 대형 컨퍼런스, 그것도 생중계를 하는 행사였다. 

7,8월은 유난히 이슈가 많았고, 그 나날들 동안 나는 잠을 줄여가며 일을 하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미리 걱정할 여유는 없었고, 그저 그 날이 오나보다... 했을 뿐이었다. 

새로운 경험, 잘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고, 

충격적인 일들도 있었고, 박카스 2개 정도를 먹은 듯한 느낌으로 일상을 보낼 뿐이었다. 


2개의 행사를 무사히 마친 후, 

사람들은 어쩜 나에게 그렇게 말을 잘 하느냐고 칭찬삼아 물어주었고 

나는 그냥 "저는 무대 공포가 정말 없어요" 라고 답을 했다. 


맞다. 

나는 무대 공포가 없다.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말을 하면 좋을지 걱정하느라 전날 밤 잠을 설치는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은 동영상을 열어보면 나는 때때로 버벅거리고 

간혹 목소리가 조금 떨리기도 하고,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피기도 한다. 

내면의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나에겐 쉬운 일이라고 했다. 

아마도 나의 지적 허영심 때문에.


단 1분 동안 마이크를 잡고 연사를 소개하기 위해, 나는 연사들이 발표하는 1시간 동안 멘트를 가다듬는다.




내가 무언가를 새로이 배우고 익힌다면, 
적어도 그것을 '아주 쉽게'
익히고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수준이고 싶다 




지적허영심, Sprezzatura


학창 시절, 항상 시니컬한 영문학 교수님이 있었다.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 자체도 시니컬했지만, 

학생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불만이 가득한 교수님이었다. 

내가 신입생 때 활동했던 영어 연극 동아리의 지도 교수님이기도 했는데, 

r,l 발음도 제대로 안되고 연기도 안 되는 시골 촌뜨기를 데리고 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니 

교수님도 매우 힘들었을 터...


여하튼 그 때는 츤데레 교수님이 매일 동아리 모임을 6-7시간씩 봐 주시면서 

우리 곁을 떠나질 않고 영어로 잔소리를 해 주시던 시절이었다.

사실 앞 뒤 맥락은 전혀 기억나지 않고, 정신을 차려보니 교수님이 핏대를 높이면서 흥분해서 무언가를 막 설명하고 계셨는데, 

너희는 Sprezatura 라는 걸 알고 있냐고, 그게 진짜 쿨하고 멋있는 거라면서 

좀 그렇게 해보라며 핏대를 높이시길래 

노트에 받아 적어두었던 기억이 있다. 


sprezzatura is an ability to display easy facility in accomplishing difficult actions which hides the conscious effort that went into them



어려운 일을 노력해서 해내는데, 

그 노력을 숨기고, 

어렵지 않은 척 하는 능력



sprezzatura는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자질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더불어 지금은 멋부리지 않은 듯 쉬크한 젠틀맨 패션 스타일을 

칭하는 용어로 알려져 인스타그램 해쉬태그로도 등장한다고. 




가끔 힘을 뺀다면 더 멋질 것 같다


목표가 높은 사람이라면, 그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은 쉽지 않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늘 (조금씩) 괴롭다. (사실 괴로움을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A라는 목표를 성취했다고, 기뻐하면서 여생을 즐길 수 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과정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크게 고통스러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아주 쉽게 된 일인 것 마냥 "그냥 했어요" 라고 이야기를 한다. 


sprezzatura는 츤데레식 '지적 허영심' 이기에 좋은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를 잘 보여주지 못하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실제와 보여지는 것과의 거리가 많이 생길수록 

자기 자신도 '자신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어려워 지는 법이다. 


하지만, 그럴 때가 있고, 또 그런 사람들이 있다. 

조금만 힘을 빼 보면 더 멋있을 것 같은.


열심히 하는 것을 넘어 

열심히 하지 않은 척까지 해보자 


아둥바둥한 것을 숨겨보자 

조금의 허영심

sprezzatura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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