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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고재비 Jul 01. 2018

여행의 흔적들

여행이 나에게 알려준 것

참 오랜 시간동안 또 많은 돈을 여행에 썼다. 처음에 여권을 만들어 그 곳에 도장을 찍어 나갔을 땐, 나도 외국에 나가본다는 것... 그리고 혼자서 영어로 친구도 사귀고, 부모님은 보지 못했던 넓은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아무일 없을 때에도 여권을 살포시 열어서 몇 개의 도장이 찍혔는지 세어보곤 했다. 유럽을 많이 돌아다녔던지라 EU로 연합하지 않았더라면 이것보다 5배는 많은 도장을 가졌을거라며(EU 안에서 이동할 때는 도장을 찍어주지 않는다), 불만을 가지기도 했었다.

10년 만기 여권은 수십개의 도장을 훈장처럼 남기고 수명을 다 했다.

외국 이곳 저곳에서 찍은 사진을 포스팅하고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는 것도 좋았다. 2009년 아주 쨍한 겨울 미지의 땅 핀란드에 내려서 두툼한 패딩을 입고서 친구들에게 '나 지금 유럽이야. 인증샷 보냄' 이라고 포스팅을 올렸던 뿌듯한 기억이 있다. 4명이 가족 중에 가장 처음으로 유럽땅을 밟은 사람도 바로 나였다. 이민 가방에 최소한의 계절별 옷 만을 챙겨 공항으로 바래다주면서 엄마아빠는 계속 네가 어떻게 혼자서 외국을 가냐고 그랬다. 그 때는 다 컸다고 생각했지만 인터내셔널 21살 이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기도 어렸다.  


생전 처음만난 이국의 거리. 야무지게 디지털 카메라를 챙겨 다니던 시절이다
30대가 되어서는 남프랑스 절벽의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이런 최고급 식사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까지의 여행리스트]

이렇게 적어보니 저축을 많이 하지 못한 것이 당연해 보인다.


1. 일본 - 후쿠오카

2. 중국(3) - 홍콩, 상해, 청도

3. 필리핀 - 세부

4. 영국 - 런던

5. 프랑스(2) - 파리, 니스, 마르세이유, 생트로페, 무스티에 생트마히

6. 이탈리아 - 베니스, 로마, 나폴리, 아말피

7. 독일(2) - 뮌헨, 프랑크푸르트, 뉘른베르크 등

8. 폴란드 - 바르샤바, 그단스크, 크라쿠프, 브로츠와프

9. 헝가리 - 부다페스트

10. 스페인 - 바르셀로나

11. 우크라이나 - 르보프

12. 체코 - 프라하

13. 오스트리아 - 빈, 잘츠부르크, 인스부르크

14. 크로아티아 - 드브로브니크, 스플리트

15. 핀란드 - 헬싱키

16. 미국 - 뉴욕

17. 한국은 제주도(10번은 간 듯), 속초(근래에 주구장창 가는 중),부산, 순천 등...




이제는 제법 여행에 이골이 났다. 더 이상 여권의 도장을 세어보지 않는다. 더군다나 요즘은 스마트폰에 구글 맵스, 와이파이만 있으면 겁날 게 없는 세상 아니던가. 더군다나 어릴 때와 달리 지금의 나는 전 세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한도 높은 신용카드도 여러 장 가지고 있고, 마일리지도 듬뿍 쌓아두었으니 여행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마무리 하는 과정 자체도 예전처럼 철저하지 않고 또 약간 귀찮기도 하여(가면 어찌 되겠지... 란 마음으로) 마냥 설레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을 갈까 말까 망설이게 되는 순간에는 여전히 내 지난 여행의 흔적을 조금 설레이는 마음으로 둘러보게 된다.


여행의 흔적 하나, 스크랩북


10년이 넘도록 이 곳 저 곳 여행을 하면서 나에게 남은 기억의 집약체는 바로 이 스크랩북이다. 가끔씩 집에 초대되는 게스트들을 놀라게 하는 이 책.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의 주소와 약도를 빼곡히 적어놓은 쪽지나 비용 계획을 적어놓은 수첩을 보면 절로 어린 시절의 내가 대견해 진다. 각 도시에서 가져온 엽서나 입장권, 버스 티켓 같은 것들도 깨끗하게 보관되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도 하나씩 봉투에 넣어 잘 챙겨오다가 제작년에서야 이 스크랩북에 정리를 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은 예약한 비행기 번호나 민박집 주소를 수첩에 적어 다녀야 했다. 예쁜 엽서들, 버스 티켓, 입장권, 호텔에서 제공하는 카드 등은 모두 보관한다.


여행의 흔적 둘, 자석과 엽서  


나는 머물렀던 도시에서 항상 엽서와 자석을 구매한다. 자석을 구매했다는 건 '여기 정말 마음에 들구나? 짜식. 나의 도시로 인정 해줄게' 정도의 의미가 있다. 사실 자석은 일가 친척들에게 많이 뺏겼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나는 여행을 하느라 돈을 다 써 버렸고, 친척들의 선물을 구매하지 못했는데 (사실 용돈을 약간 주셨기 때문에 작은 것이라도 사왔어야 했던 것), 한 명씩 친척들이 놀러올 때 마다 어머니는 황급히 냉장고 앞에 달려가 자석을 몇 개씩 떼어 주었다. 추억이 없는 자석이 이억만리 건너온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황망하게 나랑 헤어진 내 초기 자석들에게는 애설픈 이별이었지만, 진짜로 독립을 한 후에는 나의 생활 공간에 잘 보이는 곳에 항상 이 자석들을 훈장처럼 전시해 두고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다가, 맥주를 꺼내다가, 문득 쳐다보게 된다. "크, 뉴욕에서 좋았지. 인생에 그런 야경이 또 있을까." "아, 남프랑스 정말 최고였지, 인생에 다시 한 번 가 봐야지." 소복히 쌓여 있는 모습만 봐도 귀엽다. 내가 이룬 것이 지금까지 없을지라도 이렇게 많은 곳을 둘러보았다면 실패한 인생을 아닐 것 같다는 생각도 잠시 해 본다.



여행의 흔적 셋, 아주 가끔 영감이 받으면 이런 아트워크도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는, 여행에 대한 삘이 일상을 지배하여, 퇴근한 후에도 정신을 못하기도 한다. 여행의 향기를 계속 곱씹는 것이다. 사진을 쳐다보고,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여행을 다녀온 사람과 여행에 대해 이야기 계속 이야기를 한다. '프랑스 공기 맑았지, 한국오니까 적응이 안돼.' 30년을 한국에 살았기 때문에, 저것은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내 몸과 정신은 이미 한국에 최적화되어 있다.


이렇게 기분이 계속 말랑말랑할 때 기운을 몰아,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내 방 한 켠에서는 무시무시한 화구들이 쌓여있는데, 작년에 몇 번 빛을 본 날 중 하나가 11일간의 남프랑스 여행을 마친 후 '일주일' 정도의 기간이었다. 남프랑스 경치 위에 글씨를 새겨보고 싶다는 나의 소망은 아래와 같은 아크워크를 하나 남겼다.

블로깅하려고 캘리그라피를 접목해본 사진. 블로깅을 열심히 하진 않았다



여행의 흔적 넷, 나에게 보내는 편지  


아마 어린시절부터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나 보다. 15살때부터 일기를 썼고, 고등학교때 부터는 너무 심적으로 힘든 일이 있으면 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너무 사적인 내용들이 많아 하나씩 공개하긴 어렵지만, 내가 내 자신에게 쓴 글을 보면 난 참 눈물이 나고 그렇다...나에게만 감동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고  별스런 내용도 없지만, 그때 느껴지는 마음을 곰곰히 읊는 것일 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상황에 위로가 된다. 상처가 아물면, 나에게 보내는 편지들 중 일부를 태우기도 했다. 그냥 그렇게 다 하늘로 날아가 버리길 바라면서.


여행지에서도 가끔 그런 편지를 스스로에게 쓰게 된다. 일상과 떨어져있을때 떠오르는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하다보면 중요한 가치를 문득 깨닫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요한 시간을 생각으로 채우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중에서도 22살인 내가 여행지에서 2층 침대에 엎드려서 미래의 나에게 썼던 편지가 하나 있다. 그때는 아마 최초로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에 상처를 입었던 날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내 자존감이 상처받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날인 것 같다.


"이것이 참고 행복을 좀 더 기다리라는 신호라면, 결국은 기다려야만 하겠지만 그래도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질문은 '도대체 왜?' 밖에는 없어. 하지만, 더 이상의 자해 행위는 하지 말아줘. 조금만 널 더 사랑하고 너부터 생각하면 안 되겠니?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서 사람은 마음을 단련시킬 수 있다고 해. 네가 얼마나 울 건 그건 결국에는 네 마음을 단련시킬테니. 부디 앞으로 다가올 상처는 조금만 겁내주길 바래. 결국은 난 날 사랑해야 할 수 밖에 없는 거야. 날 나만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조금의 상처는 감수할 수 밖에. 다만 조금 더 단련 되길 바랄 뿐이야."


세상에 22살에 저렇게 용감 했다니. 32살의 나는 숙연 해진다. 겁내지 말자고 10년 째 얘기하고 있지만, 계속 겁내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며, 나는 다시 마음을 다진다. 담담히 적어내린 글 위로 낯선 나라의 공기, 햇볕, 그날의 내 모습이 사뿐히 내려 앉는다. 앞으로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지 말자고 다부지게 마음을 다지는 씩씩한 소녀의 모습이




몇 주 동안 여행을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다. 올해는 휴가 없이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다고 여러 번 결심했다. 그러다가 오늘 그냥 표를 끊어버렸다. 여행을 습관적으로 가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는 글을 얼마전에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여행의 흔적들을 살펴보니, 마음의 상처가 깊을때 했던 여행이 정말로 많았다. 낯선 곳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보며, 세상이 이렇게 아름답고 나는 그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는 럭키한 사람이니 좀 더 힘을 내보자, 그렇게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키는 과정이 여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잠시 힐링되었다고 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여행의 흔적을 보며 씁쓸했던 것은 밝게 웃는 내 표정 속에서 이 여행을 통해 잊고 싶었던 '고통'들이 여행의 기쁨과 함께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난 훈장처럼 내 안의 상처와 그 극복과정을 기록하고자 여행을 가고 글을 쓰고 흔적을 남기는지도 모르겠다.


낯선 곳에서의 아름다운 풍경과 자발적인 외로움은 이번에도 날 더 강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아름다운 바다가 또 보고 싶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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