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PTSD 트라우마편 11편 <부모 용서법 2편 >
‘연민적 용서’는 제가 직접 만든 개념입니다. 이는 단순히 이성적으로 납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감정적으로 상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연민이란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입니다. 저는 부모를 그런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저에게는 용서로 가는 가장 현실적인 디딤돌이었습니다. 완전히 용서하지는 못했지만, 저주와 미움이라는 감정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해는 감정이 아니라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저는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부모의 행동도 예외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악의에서 비롯됐다고 느꼈지만, 만약 원인이 있다면 이해는 가능하다는 전제를 세웠습니다.
이 방식이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로부터 상처받은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에게는, 그 마음의 매듭을 푸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민적 이해는 단순히 부모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위한 회복의 첫걸음일 수 있습니다.
연민적 용서는 모든 부모에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연민의 감정을 품기 위해서는 일정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그 부모가 본래부터 그렇게 해로운 존재였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아이를 상처 입히려는 의도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살아오며 겪은 환경적 요인이나 사건들에 의해 그렇게 '변해갔던' 존재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전제가 연민적 이해의 첫걸음이며, 그 출발선에서 우리는 부모를 인간으로서, 상처받고 흔들렸던 또 하나의 존재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삶의 고비에서, 어떤 전환점 이후에 변해버린 부모에게는 연민적 이해를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첫 번째 출발점은, 부모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그렇게 ‘변한’ 것인가입니다. 저는 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변한 것이라면, 그 전환점을 중심으로 원인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때는 자상하고 따뜻했던 부모가 갑작스러운 실직이나 질병, 또는 이혼이나 관계 갈등 등의 사건을 겪고 난 후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면, 우리는 그 변화를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변화의 맥락을 상상해 보는 것이 바로 연민적 이해의 시작입니다.
반대로, 태생적으로 자녀에게 학대와 조롱을 일삼고 자신의 감정에만 몰두하여 가족을 무너뜨리는 이들은 연민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부모일지는 몰라도, 관계적 의미에서 부모 역할을 수행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부모는 단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로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돌봄과 책임,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부모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라고 느껴지시는 분들이라도, 부모의 변화가 일어난 지점을 떠올려 보시길 권합니다. 그 변화의 계기가 어쩌면 존재했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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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받았던 상처는 때로 너무도 날카롭고 깊기에, 그것이 부모의 진심이었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행동은 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정적으로 폭발한 그 순간이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감정 조절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순간적 진심’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상처받은 기억은 오래 남습니다. 그러나 그 상처를 되짚으며, 그 행동의 원인을 따져보는 일은 우리 내면의 무게를 조금 덜어낼 수 있게 해 줍니다. 이해는 단순한 납득이 아닙니다. 감정적으로 상상하며, 부모도 그 순간에는 버거웠을 거라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우리를 고의로 괴롭히기 위해 태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의 친부가 태어나자마자
2008년에 나는 나의 아내를 괴롭힐 거고 그래서 아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기도록 할 거야
이러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이 그렇게 변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원인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정확한 이유는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겠지만, 그 가능성들을 추측해 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난, 지속된 스트레스, 반복되는 실패, 건강 문제, 외로움, 불완전한 애착 경험, 혹은 감정 조절 능력의 결핍처럼 삶의 다양한 굴곡이 그들을 무너뜨렸을 수 있습니다. 혹은 주변에 부모님을 공격하는 “질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즐비해있었을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은, 이 상상과 추측의 과정이 단순한 납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조금이라도 그 감정의 연원을 짐작하려는 것이 ‘연민적 용서’의 시작이라는 점입니다.
연민적 용서는 부모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감정적으로 추측함으로써, 그들에게 연민을 품고 나아가 결국 나 자신에게도 따뜻해지려는 시도입니다. 저는 이 과정이 제 마음의 굳은살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즉, 연민적 용서의 핵심은 이겁니다.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수많은 원인들로 인해 그렇게 변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연민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죠.
부모님은 자신에게조차 친절하지 못한 분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돌볼 줄 모르니, 타인을 향해 돌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이해하게 되면, 비로소 그분들이 무섭고 괴물 같았던 이유도 조금은 설명됩니다.
저는 트라우마를 줬던 부모님의 행동을 아직도 다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처음부터 그랬던 사람은 없다는 것.
즉,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수많은 원인들이 있고 그것들 때문에 상처와 외로움, 고립이 생겼죠. 그래서 사람이 그렇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정신적 질병이나 뇌의 구조적 문제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편도체 과활성이나 전두엽 기능 저하처럼, 과학적으로 설명 가능한 요인들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설명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다만, 그 행동이 단지 악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외부적·내부적 요인의 복합적 결과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뇌과학에서는 타인을 향한 연민과 자기 연민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타인을 불쌍히 여기면, 나 자신도 조금은 따뜻하게 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친부에게조차, 한때는 “그도 스스로를 미워하며 살았을 것이다”는 연민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연민이 제 감정을 다 녹이진 못했지만, 최소한 저주를 멈추게 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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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적 이해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를 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해와 용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과정입니다. 이해는 머리로, 용서는 가슴으로 이뤄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머리로 부모의 상황을 이해하지만, 여전히 감정적으로는 용납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 분들께 전하고 싶습니다. 연민적 이해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내 감정을 객관화하고, 스스로를 조금 더 가볍게 해주는 정리의 과정이니까요.
저 역시도, 부모의 행동을 이해한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 상상하고, 조금은 거리 두어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부모를 향한 분노가 더 이상 제 삶을 지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더 이상 그 분노에 내 삶을 소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가 불가능하다면, 이렇게 선언해 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나는 이제 내 삶을 더 소중히 여기기로 했다.” 그 결심만으로도, 우리는 훨씬 멀리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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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연민적 이해를 반복하며, 어느 날 마음속으로 혼자 용서를 했습니다. 누구에게 말하지도 않았고, 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철저히 나 자신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용서란 반드시 상대방에게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부모님께 용서를 전하지 않았지만, 제 마음속 괴로움은 그 자체로 조금 가벼워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용서가 오직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모님이 그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든 아니든, 그것은 이제 제 몫이 아닙니다. 그들은 몰라도 됩니다. 내가 괴롭지 않기 위해 내 마음속에서 조용히 내려놓는 그 결심, 그 자체로 용서는 충분히 완결될 수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저는 어떤 결론을 강요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용서와 이해 사이에 다양한 길이 있으며,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여정은 오래 걸릴 수도 있고, 때로는 되돌아가기도 합니다. 저도 아직 다 벗어나지 못했고, 어느 날엔 다시 화가 치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향성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상처를 안고 있지만, 동시에 그 상처를 껴안고 살아갈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연민은 그 힘을 조금 더 쉽게 꺼낼 수 있는 열쇠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그 열쇠를 들고, 오늘 하루만큼은 나 자신을 덜 미워하고, 조금 더 따뜻하게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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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5살부터 PTSD,ADHD,조울증』 시리즈 <1부, 트라우마 편>의 11편입니다.
부모용서 2편은 뭔가 두서없이 쓴 거 같은 느낌이 듭니다. 글의 진심이 독자 분들께 잘 전달이 됐는지 모르겠네요. 모두에게 적용되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아직 회복 중인 마음으로, 17년간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꺼내고 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