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청사진, 현장의 우려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에디입니다.
올해의 마무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초에 제시되었던 2025년 주요업무 추진계획에 대하여 앞으로의 몇 개의 글에서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다뤄볼 주제는 유보통합입니다.
30년을 끌어온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통합, 즉 '유보통합'이 마침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습니다. 2024년 (가칭)영유아학교 시범사업(152개) 추진을 시작으로, 2025년에는 30년 만에 관리체계가 교육부로 완전히 일원화됩니다. 정부는 '영유아 최우선' 원칙 아래 생애 초기 교육 격차를 해소하고 '출발선 평등'을 실현하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합니다. 교사 자격, 시설 기준, 그리고 무엇보다 막대한 재원 마련이라는 해묵은 난제들이 여전히 산적해 있기 때문입니다. 2025년 추진계획에 담긴 청사진이 과연 '기회의 사다리'라는 목표를 달성할 만큼 실효성이 있을지, 그 핵심 쟁점들을 짚어봤습니다.
유보통합의 가장 큰 난제는 이질적인 두 교원 집단의 통합입니다. 현재 유치원 교사와 보육 교사는 양성 체계, 자격 기준, 보수 및 행정적 지위가 완전히 다릅니다. 정부는 2025년 '통합 기준(교사 자격·양성체제 등) 마련 및 통합법 제정 추진'을 계획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로드맵은 아직 안갯속입니다.
단순히 두 집단을 한 공간에 몰아넣는 물리적 통합은 현장 갈등만 폭발시킬 뿐입니다. 처우를 상향 평준화할지, 혹은 새로운 자격 체계를 만들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화학적 결합'이 불가능하며, 이는 고스란히 영유아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조직사회학자 디마지오와 파월(DiMaggio & Powell)이 제시한 '제도적 동형화' 이론에 따르면, 조직들이 유사한 제도적 환경에 놓일 때 비슷한 구조와 관행을 채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보통합의 경우, 단순한 구조적 통합만으로는 '강압적 동형화'에 그칠 위험이 큽니다.
진정한 통합을 위해서는 교사 집단 간 전문성 인정과 상호 존중을 기반으로 한 '규범적 동형화'가 필요합니다. 즉, 교사 자격 통합은 법적·제도적 통일을 넘어, 두 집단이 공유할 수 있는 전문적 정체성과 가치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유치원은 유아교육법, 어린이집은 영유아보육법에 따라 설립·운영 기준이 다릅니다. 교실 면적, 교사 대 아동 비율, 급식 시설 기준 등 모든 것이 제각각입니다. 모든 기준을 상향 평준화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여기에는 막대한 예산이 필요합니다. 반대로 기준을 낮추거나 이원화할 경우, '교육의 질'을 담보한다는 유보통합의 근본 취지가 흔들리게 됩니다. 정부의 '설립·운영 기준 마련' 계획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어떻게 좁힐지가 관건입니다.
교육정책 연구에서는 모든 기관이 달성해야 할 '최소기준'과 지향해야 할 '최적기준'을 구분합니다. 유보통합에서는 먼저 모든 기관이 반드시 충족해야 할 최소기준을 명확히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지 못한 기관에 집중적인 재정·행정 지원을 제공해야 합니다.
동시에 최적기준을 제시하여 우수 기관들이 지속적으로 질을 개선할 수 있는 인센티브를 마련하는 '이중 기준 전략'이 필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하향 평준화나 격차 확대를 모두 피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접근법입니다.
정부는 안정적인 재원 운용을 위해 교육부 소관 국고와 2025년 말 일몰되는 유아교육특별회계(유특회계) 등을 통합한 '영유아 특별회계 신설'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안정적 추가 재원 확보'인지, '단순한 예산 이관'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만약 새로운 세수 확보 없이 기존 지방교육재정교부금(LGEGF)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방식이라면, 유보통합 비용이 초·중등 교육 예산을 잠식하는 '파이 나누기' 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재정 연구에서 강조하는 '재정적 지속가능성'은 단순히 예산 규모만이 아니라, 재원의 안정성과 예측가능성을 의미합니다. 유보통합의 성공을 위해서는
전용재원(Earmarked Funds) 확보: 특정 세원을 유보통합에 배정하여 예산 변동성을 최소화
점진적 확대(Gradual Expansion): 재원 조달 능력에 맞춘 단계적 확대로 재정 충격 완화
비용-편익 분석(Cost-Benefit Analysis): 유보통합이 가져올 장기적 사회경제적 편익(교육격차 해소, 여성 경제활동 증가, 저출생 완화 등)을 명확히 제시하여 재원 확보의 정당성 확보
등 재정 측면에서의 신중한 접근이 필수적입니다.
국회예산정책처는 '교사 대 영유아 비율 개선'에 최소 1.5조원, '단계적 무상 교육·보육'에 약 2조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러한 막대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시급합니다.
정부는 2025년, 학부모 양육비 부담 경감을 위해 유아교육비·보육료 추가 지원(월 5만 원) 대상을 기존 5세에서 4세까지 확대합니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하지만 사립유치원 학부모 부담금이 월평균 거의 20만원에 달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부담 경감'은 맞지만 이를 '무상교육 실현'으로 부르기엔 한계가 명확합니다. 학부모가 체감하는 사교육비 부담을 흡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며, 진정한 무상교육 실현까지의 구체적인 재원 계획은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복지정책 연구에서 '보편주의'는 모든 국민에게 동일한 혜택을 제공하는 것을, '선별주의'는 특정 조건을 충족한 집단에게만 지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재 유보통합 정책은 보편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한적 보편주의(Limited Universalism)'에 가깝습니다.
진정한 무상교육을 위해서는 정부지원금이 표준유아교육비(월 55만7천원 수준)에 근접해야 합니다. 현재의 단계적 접근은 현실적이지만, 최종 목표와 달성 시기, 그리고 재원 조달 방안에 대한 명확한 로드맵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2024년 152개 시범사업으로 추진되는 '(가칭)영유아학교'를 통해 통합모델의 현장 체감도를 높이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 시범사업이 자칫 기존의 우수한 국공립 유치원·어린이집을 '간판만 바꿔 다는' 형태에 그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전체 영유아 기관의 질을 상향 평준화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시범 기관 중심의 '보여주기식' 정책으로 흐를 경우, 일반 기관과의 격차는 오히려 더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는 유보통합이 '또 다른 엘리트 코스'를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사회학자 머튼(Robert Merton)이 제시한 '마테 효과'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이미 우수한 자원을 가진 집단이 추가 지원을 받으면서 격차가 더욱 확대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시범사업이 이미 우수한 기관을 선정하여 집중 지원할 경우, 일반 기관과의 격차가 더욱 벌어지는 '역진적 효과(Regressive Effect)'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시범사업 기관 선정 시 다양한 유형과 수준의 기관을 포함
시범사업의 성과와 노하우를 일반 기관에 신속히 확산시키는 '확산 전략(Diffusion Strategy)' 마련
취약 기관에 대한 별도의 집중 지원 프로그램 병행
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유보통합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입니다. 하지만 30년간 묵혀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두르기보다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025년 '통합법' 제정 시, 교사 자격 및 처우를 상향 평준화하는 구체적인 시기와 재원 계획을 반드시 명시해야 합니다. 현장 교사들의 동의 없는 통합은 사상누각일 뿐입니다.
교사들이 유보통합을 '위협'이 아닌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통합 과정에서 어떤 교사도 처우가 낮아지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또한 두 집단의 전문성을 상호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체계적인 통합 연수와 교류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초·중등 교육과 제로섬 게임이 되지 않도록 안정적인 추가 재원(예: 지방세 항목 신설, 목적세 도입 등) 확보 방안을 국회와 즉각 논의해야 합니다.
재원 조달 방안은 단순히 재정당국의 몫이 아니라, 국민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사안입니다. 유보통합이 가져올 장기적 편익(인적자본 향상, 여성 경제활동 증가, 교육격차 해소 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여, 추가 재원 확보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영유아학교' 같은 특정 모델 시범사업에 집중하기보다, 모든 기관이 충족해야 할 '최소한의 통합 운영 기준(시설, 인력, 프로그램)'을 명확히 제시하고, 이에 미달하는 기관을 집중 지원해 격차를 줄이는 방식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시범사업은 '우수 모델 창출'보다는 '다양한 유형의 기관이 최소 기준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 파악과 해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야 시범사업의 성과를 전국 모든 기관으로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유보통합은 정부와 교육·보육 종사자만의 과제가 아닙니다. 실질적인 수혜자인 학부모와 지역사회가 정책 설계와 평가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지역별 유보통합 협의체에 학부모 대표를 반드시 포함시키고, 정기적인 만족도 조사와 의견 수렴 과정을 제도화해야 합니다. 또한 지역사회의 다양한 자원(도서관, 문화시설, 의료기관 등)과 연계하여 영유아 교육·보육의 질을 높이는 '지역사회 기반 유보통합 모델'을 적극 모색해야 합니다.
'영유아 최우선'이라는 원칙이 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30년 만에 잡은 기회의 사다리가 삐걱대지 않도록 정부의 더 촘촘하고 실효성 있는 설계가 필요합니다.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에서 제시된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은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유보통합 역시 단순한 제도 통합을 넘어, 모든 영유아가 출발선에서부터 공정한 기회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추진하는 유보통합은 단순히 두 제도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모든 아이들이 태어난 환경과 무관하게 양질의 교육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정부는 명확한 비전과 구체적인 실행 계획, 그리고 충분한 재원을 제시해야 하며, 현장은 적극적인 참여와 건설적인 비판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30년이 걸린 만큼, 앞으로의 여정도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영유아 최우선'이라는 원칙을 진정으로 실천한다면, 유보통합은 단순한 제도 개혁을 넘어 대한민국 교육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에디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