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번호가 결정하는 시간표: 2025 고교학점제의 민낯

화려한 '선택' 뒤에 숨은 빈곤한 현실

by 에디

안녕하세요, 에디입니다.


오늘은 어쩌면 제가 가장 많이 다뤘던 내용 중에 하나일 수도 있는 '고교학점제'에 대해서 다뤄보려고 합니다.


수강신청 첫날, 엇갈린 풍경


2025년 3월, 고교학점제가 전면 시행되면서 '내 진로에 맞는 과목을 스스로 선택한다'는 이상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은 학교마다, 지역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구현되고 있었습니다.


수도권 대형 고등학교와 농산어촌 소규모 학교를 비교해보면, 개설 과목 수에서 상당한 격차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인공지능 수학, 생명과학 실험, 국제정치, 심리학 등 학생들의 관심사를 반영한 다채로운 과목들이 개설되지만, 다른 쪽에서는 교사 수가 부족하고 수강 신청 인원이 적어 폐강되는 과목이 속출합니다. 교원 수, 학생 수, 예산 등 인프라의 차이가 그대로 '선택지의 차이'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같은 제도 아래에서도 '선택의 폭'은 우편번호에 따라 결정되는 셈입니다.


고교학점제의 핵심 철학은 분명합니다. 학생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춰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대학처럼 학점을 이수하며 졸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자유'는 또 다른 '각자도생'을 강요하고 있지 않습니까? 과목 선택권이 거주 지역에 따라 결정되는 '우편번호 교육'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입니다.


꿈을 위한 선택인가, 점수를 위한 전략인가?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자율성을 전제로 합니다. 자기결정성 이론을 제시한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은 인간이 자율성, 유능감, 관계성이 충족될 때 내재적 동기가 발현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학생이 스스로 과목을 선택하는 경험은 학습 동기를 높이고, 진로 탐색에 긍정적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라이언은 "진정한 자율성은 외적 압력이 아닌 내적 가치와 일치하는 선택에서 나온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육 현장은 이론과 다릅니다. 입시라는 강력한 외적 통제가 작동하는 환경에서 학생들의 선택은 왜곡됩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내 진로에 필요한 과목'보다 '등급 따기 쉬운 과목'을 선택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수강 인원이 많아 상대평가에서 유리한 과목, 수능과 직접 연계되는 과목으로의 쏠림 현상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교육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교육 제도가 표면적으로는 평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계급 재생산의 도구로 작동한다고 분석했습니다. 그의 '문화자본' 개념을 빌리자면, 고교학점제 역시 선택의 자유라는 형식적 평등을 제공하지만, 어떤 선택이 유리한지를 아는 '정보 자본'과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환경 자본'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입시 전략에 밝은 학부모를 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사이의 격차는 '자율 선택'이라는 이름 아래 더욱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에 따라 진로희망이 생명공학 분야인 학생이 생명과학 심화 과목 대신 상대적으로 선택자가 많은 다른 과학 과목을 선택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적성 탐색보다는 입시 유불리를 계산하는 '전략적 수강신청'이 만연하게 됩니다.


더욱 치명적인 모순은 '2028 대입 개편안'과의 불협화음입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들에게 '네가 듣고 싶은 심화 과목을 마음껏 골라라'라고 손짓합니다. 하지만 대입이라는 심판관은 정반대의 호루라기를 붑니다.


2028 대입 개편안이 '전 학년 5등급 상대평가'를 확정 지으면서, 소인수 심화 과목은 학생들에게 '내신 자책골'이나 다름없게 되었습니다. 수강 인원이 적으면 1등급을 받을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수능 탐구 영역마저 고1 수준의 '통합사회·통합과학'으로 묶이면서, 고2·3학년의 다채로운 선택 과목들은 수능과 무관한 '장식품'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교육부는 학생부종합전형을 통해 과목 선택의 다양성을 보정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성평가의 기준이 안개 속에 있는 한, 학생들은 불확실한 '꿈' 대신 확실한 '점수'를 주는 '안전한 과목'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가 방식이 바뀌지 않은 채 주어지는 선택권은, 자율이 아니라 '위험 감수'를 강요하는 것일 뿐입니다.


공유 캠퍼스의 명암, 온라인은 만능열쇠가 아니다


도농 간 교육 격차는 새로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고교학점제는 이 격차를 더욱 가시화하고 있습니다. 소규모 학교는 구조적으로 다양한 과목을 개설하기 어렵습니다. 교사 1인당 담당 학생 수가 적어 한 과목을 개설해도 수강 인원이 최소 개설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가 잦습니다. 결국 학생들은 원하는 과목을 듣지 못하고, 교사들은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과목까지 떠안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교육철학자 존 듀이는 "교육은 삶 그 자체이지, 미래의 삶을 위한 준비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고교학점제는 학생이 현재 자신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배움을 구성하는 민주적 교육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듀이가 강조한 '교육의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택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이 동등한 교육 기회를 누릴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선택지 자체가 불평등한 상황에서의 자유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합니다.


해외 사례를 보면 이 문제의 본질이 더 명확해집니다. 미국의 경우 학구별 재정 격차가 교육 불평등으로 직결됩니다. 부유한 학구의 고등학교는 다양한 AP 과목을 개설하지만, 저소득층이 밀집한 학구의 학교는 기본 과목조차 제대로 운영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육학자 조나단 코졸은 『야만적 불평등』에서 미국 공교육의 학구 간 격차를 고발하며, "가난한 지역의 아이들은 선택의 자유가 아니라 선택지의 결핍 속에 산다"고 비판했습니다. 한국의 도농 격차는 이와 유사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반면 핀란드는 다른 접근을 택했습니다. 핀란드의 후기 중등교육은 무학년제이며, 학교 간 연합 체제를 통해 운영됩니다. 개별 학교가 모든 과목을 개설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단위로 교사와 커리큘럼을 공유합니다. 학생들은 소속 학교를 넘어 인근 학교의 수업을 자유롭게 수강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한 교통편과 시간표 조율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핀란드 교육개혁의 설계자 파시 살베리는 "협력이 경쟁보다 항상 더 낫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소규모 학교의 한계를 지역 공동체 차원에서 극복한 사례입니다.


핀란드가 학교의 물리적 담장을 허물어 학생들을 직접 만나게 했다면, 한국 교육부는 인터넷 상 가상의 공간을 만드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온라인 공동교육과정'을 대안으로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대면 수업과 온라인 수업의 질적 차이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실시간 쌍방향 소통의 한계, 실험·실습 과목의 제약, 학습 몰입도 문제 등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교육심리학자 레프 비고츠키는 '근접발달영역' 이론을 통해 학습이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강조했습니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 간의 즉각적이고 풍부한 상호작용이 제한되는 온라인 환경은 비고츠키가 말한 '비계 설정'을 어렵게 만듭니다.


우편번호를 넘어서는 교육을 위하여


고교학점제가 진정한 의미의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려면 세 가지 전환이 필요합니다.


먼저, 지역 단위 '학점제 클러스터'를 의무화해야 합니다. 개별 학교가 모든 과목을 떠안는 구조에서 벗어나, 인근 학교들을 묶어 공유 캠퍼스를 제도화해야 합니다. 핀란드 모델을 참고하되, 한국의 실정에 맞게 재설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학교 간 시간표 통합, 학생 이동을 위한 교통편 지원, 학점 인정 체계의 표준화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둘째, 교사 수급 체계를 유연화해야 합니다. 현재의 학교 단위 교사 배치 방식으로는 수요에 즉각 대응하기 어렵습니다. 교육청 소속 순회 전담 정교사를 대폭 확대하고, 산학겸임교사 등 학교 밖 전문가의 교직 진입 장벽을 완화해야 합니다. 단, 교육의 질 관리를 위한 연수와 평가 체계는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셋째, 소인수 과목의 평가 방식을 개선해야 합니다. 현재 5등급 상대평가 구조에서는 수강생이 적은 심화 과목이 '내신 불리 과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정 인원 이하 과목은 절대평가나 P/F 제도를 도입하거나, 소인수 과목 이수자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등 학생들이 진로 관련 과목을 안심하고 선택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필요합니다. 선택의 용기에 불이익이 아닌 보상이 따라야 진정한 자율성이 보장됩니다.


교육학자 넬 노딩스는 "모든 아이는 자신이 돌봄 받고 있다고 느낄 권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고교학점제가 '금수저 과목', '흙수저 과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지 않으려면 물리적 환경의 제약을 넘어서는 과감한 인적·물적 투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학교의 담장을 허물고, 지역이 함께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 때 비로소 고교학점제는 모든 학생에게 '선택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택의 자유는 선택지의 평등에서 시작됩니다.


에디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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