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을 여행하다
헤겔은 인간의 역사발전에 대해 이렇게 정의내렸다. "세계사란 자유의 의식에 있어서의 진보다." 어렵게 번역되었지만 인류의 역사발전은 인간이 스스로 자유에 대해 인식하게 되어가는 과정이라라는 뜻이다. 자유란 무엇일까?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일까? 속박으로부터의 일탈일까? 어떻게 보면 대단히 무의미해보이고 관념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헤겔 같은 위대한 사상가가 역사란 곧 자유에 대한 인식의 발전과정이라고까지 한 것을 보면 무의미한 질문 같아 보이진 않는다. 우선 헤겔은 '자유'란 자기를 의식하는 행위로 완성된다고 한다.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를 실현시키는 것이야말로 완전한 '자유'이며 정신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한다. 완전한 자유에 다다르는 것, 자기 자신을 알고 실현해가는 법을 배우는 방법론으로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을 제시한다. 헤겔에게 가장 중요한 관념은 현재를 인식하는 행위였다.
그런 점에서 헤겔이 말하는 자유란 여행과 많이 맞닿아 있어 보인다. 여행이란 것도 자유를 향한 투쟁의 일종이며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알아간다는 말은 언제나 거론될 정도로 뻔한 말이 되었다. 분명 여행은 자유고, 자기실현이며, 현재인식의 하나의 방편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하는 것은 국내에서 이 자유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했던 여행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양양이다.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은 채 함께 양양을 누벼보자.
양양의 '자유'와 관련하여 소개하고 싶은 한 사람이 있다. 통일신라 때의 도의선사이다. 도의선사는 사상과 믿음의 자유를 꿈꾸었고, 그것이 그의 생전에는 환호받지 못했으나 그의 꿈은 양양으로 귀결되어 다시 그의 제자들이 양양에서 사상과 믿음의 자유를 전국에 퍼뜨렸으니 역사학자들은 도의선사를 한국지성사에서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도의선사가 주목을 많이 받지 못한다. 양양의 메인은 바다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바다 외에 양양의 산골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양양의 어느 한 깊숙한 산기슭에 도의선사의 적요한 흔적 하나가 남아 있는 곳이 있다.
한국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이전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에 약간의 시차를 두고 유입되었다. 삼국시대 때 공인되었던 불교는 종교의 개념보다는 통치이데올로기의 한 방편으로 흡수되었다. 고구려든 백제든 신라든 '불교'라는 종교적 구심점으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합심시켜 국왕 아래 그 지배체제가 일원화되도록 중앙집권화를 도모한 것이다. 정치적 이념으로서 불교는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을 포함해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현상이었으며 당시 불교교리들의 사상도 찬찬히 뜯어보면 국왕을 신격화하고 국왕의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들 뿐이다. 덕분에 불교를 공인했던 각 나라들별로 사회적 통합을 이룩해낼 수 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이후로 이제는 더 넓은 영토와 한때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까지도 다스리게 된 통일신라 정부는 더더욱 사회통합을 목표로 정치이념으로서의 불교를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 원효대사, 의상대사가 활동했던 덕분에 어렵지 않게 불교가 사회안정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불교를 '교종'이라고 불렀다. 7세기에는 중국도 그렇고 일본도 그렇고 불교를 통치의 수단으로 적극 활용했던 시기였기에 교종이 당시 불교의 핵심이자 주축이였다.
이렇게 교종의 교세가 확고해지는 가운데 한 편에서는 일반 민중들이 개인의 정신적 안녕을 위해 믿음 자체를 강조하는 말그대로 신앙으로서 불교를 전파하자는 불교사상들이 중국에서 형성되고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불교 종파를 '선종'이라고 한다. 선종은 교종과 달리 지나치게 경전에 의존할 필요가 없으며, 글을 모르고 불교의 어려운 사상들을 몰라도 그저 불심에 대한 정성만 있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죽어서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음을 설파했다. 하루하루가 고된 일반 대중들에게는 "이 세상 모든 개개인들이 저마다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선종 종파를 통일신라에 수용시킨 장본인이 바로 도의선사다. 도의선사는 다른 여러 승려들처럼 당나라로 불법공부를 하러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서 선종을 접하고 이 사상에 매료되어 지배층을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닌 민중들을 위한 종교로서 불교를 주장하며 9세기였던 821년 신라의 41대왕 헌덕왕 대에 신라로 귀국했다. 귀국 후 도의선사는 선종을 설법하였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통치이데올로기의 불교를 강조하던 귀족과 왕족들이 선종을 환영해줄 리 만무했다. 신라의 수도에 활동하던 승려들 전부 교종 승려들이었기에 도의선사는 신라의 주류불교사회에서 이단시되었고, 도저히 수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던 도의선사는 지방 곳곳을 전전하다가 양양의 깊은 산골까지 몰려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도의선사는 숨어들어간 이 양양의 산 속에 '진전사'라는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을 조용히 키워내며 생을 보냈다. 도의선사의 꿈은 양양에서 중단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도의선사의 선종은 제자 염거화상으로 이어졌고, 다시 염거화상은 그의 제자 보조선사 체징에게 선종의 계보가 이어졌다. 보조선사 체징은 선종사상을 굳건히 믿으며 오늘날의 전남 장흥의 가지산에 보림사를 세우고 최초의 선종 선문을 개창한다. 보조선사 체징이 세운 보림사의 선종 선문을 '가지산문'이라 하며 이후로 선종은 지방 곳곳으로 퍼지게 된다. 9세기 신라 중앙정부가 점점 부패해지거나 무능해지면서 지방의 호족들은 탈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나의 통일된 이론적 교리를 배척하는 선종을 경제적으로 물씬 지원해주며 전국 지방 곳곳에서 가지산문을 시작으로 큰 선종의 선문들이 생겨났고, 이중 가장 세력이 강하고 넓은 9개의 선문들을 구산선문이라고 했다. 지방호족들은 선종승려들과 선종사찰에 경제적 지원을 하고, 그들로부터 사상적 지지를 받으며 민심을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신라사회를 해체해가며 결국 신라는 하나의 지방호족에서 시작했던 왕건의 고려에게 멸망하고 만다. 따라서 신라의 멸망을 사상적으로 해석할 때 그 시작은 한국에 최초로 불교선종을 도입한 도의선사로부터 소급할 수 있다. 도의선사가 사라져도 그의 사상은 맥을 이어갔으며 양양에 박혀있던 그의 사상이 전국으로 확대되며 종국엔 도의선사를 배척했던 신라의 주류사회가 무너지고 만 것이다.
도의선사가 세상을 피해 마지막으로 정착했던 양양의 진전사는 조선 초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신 진전사지 3층 석탑이 홀로 남아 있어 도의선사의 사상과 진전사의 흔적을 입증해주고 있다. 진전사지 3층 석탑까지 가는 길은 인적 드문 아주 외진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 진입하는 내내 강원도의 잘생긴 산줄기들을 감상하면서도 당시 도의선사가 이 깊은 곳까지 올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내몰렸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진전사지 3층 석탑엔 마땅한 주차장도 없어서 공터에 아무렇게나 차를 대놓아야 한다. 한 여름 신록의 우거진 풀들만 무성한 외진 곳에 진전사지 3층 석탑이 산과 산 사이의 산세를 배경으로 우뚝하게 서 있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커서 우직하고 강인한 첫인상이었다. 진전사지 3층 석탑은 안정적인 커다란 기단부 위에 통일신라의 보편적인 양식이었던 3층 구조의 몸돌들이 올라가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1층의 면마다 부처들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해두었는데, 이 조각상들은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이렇게 탑신에 부처상들을 조각하는 장식성이 9세기 신라 탑 제작의 일종의 유행이었다고 한다. 양양의 진전사지 3층 석탑은 국보 122호에 지정되어 있다.
양양의 여행일정을 짜기가 수월한 건 그저 해안변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진전사지 3층 석탑에서 양양의 첫 여행을 시작했기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로 한다. 그렇다면 다음 목적지는 양양의 낙산사이다.
양양의 낙산사를 창건한 승려는 한국의 불교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의상대사이다. 의상대사는 일전 '영주 편'에서 부석사를 소개하며 언급한 적이 있다.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에 활동했던 의상대사는 불교라는 종교를 통해 민족의 사회통합에 이바지한 대고승이었다. 원효대사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들과 함께 어울리며 불교를 대중화했다면 의상대사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뒤 신라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국내 불교 교리의 이론과 체계 확립에 나섰다. 의상은 신라 내 불교의 탄탄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화엄종을 내세워 사회질서와 치안유지에 기여했다. 위에서 말한 도의선사가 깨려고 했던 신라 교종의 틀을 의상대사가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의선사의 가치를 강조하다보니 '교종'이란 불교의 종파를 깎아내린 건 아닐까 걱정된다. 오해를 풀자면 어느 시대나 그 시대에 맞는 가치와 사상이 있는 법이다. 의상대사가 활동하던 신라 중대에는 사회통합을 도모해줄 사상이, 도의선사가 활동하던 신라 하대에는 일원화되고 엘리트 지향적인 사상을 해체해줄 사상이 필요했을 뿐이다. 의상대사나 도의선사가 사상을 달랐으나 두 사람의 사회적 업적은 서로 다른 의미로 꼭 필요한 시대정신이었다. 의상대사가 신라 불교의 체계화를 위해 전국의 각 지역에 총 10개의 사찰을 만드니 이를 화엄10찰이라고 한다. 양양의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영주의 부석사보다 먼저 만든, 당나라 유학 후 신라에 귀국한 뒤 제일 먼저 창건한 사찰이었다. (화엄 10찰의 종류는 기록마다 상이한데 부석사는 꼭 들어가지만 낙산사는 들어가지 않아 화엄 10찰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낙산사의 창건설화는 이렇다. 당나라 유학 후 의상대사가 신라로 귀국했을 때 동해을 마주하고 있는 양양의 어느 한 굴에 관음보살의 진신이 있다는 소식을 듣곤 그곳으로 향하였다. 의상대사는 관음보살이 산다는 전설 속의 신산 '보타락가산'에서 이름을 따와 굴이 있던 양양의 해안언덕을 '낙산'이라고 명명했다. 의상대사는 동해를 보며 관음보살의 진신이 있다는 낙산의 굴에서 7일간 수련을 하니 팔부중이 나타나 수정염주를 주고 또 동해의 용이 나타나 여의주를 주었다. 의상대사는 다시 7일간 수련한 끝에 마침내 관음보살을 영접할 수 있었고 관음보살이 지시한 곳에 사찰을 창건하니 바로 낙산사가 이렇게 탄생했다. 낙산사는 고려시대에 소실됐으나 조선시대로 접어들어 불교를 신봉했던 7대왕 세조가 중창했으나 6.25전쟁 때 다시 큰 피해를 본다. 1976년 복원되었으나 2005년 대형산불로 낙산사의 상당수가 재로 되어버렸고 문화재청의 각고한 노력 끝에 2009년 다시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매표한 뒤 낙산사를 향해 걷다보면 세조 대에 중창하면서 새롭게 건설됐다는 홍예문을 지나치면서부터 비로소 낙산사 권역의 시작이다. 그렇게 바다바람이 흔드는 나뭇잎 소리를 듣다가 걷다보면 '빈일루'라는 누각이 눈앞에 당당히 나타난다. 팔작지붕이 경쾌하고 복층을 떠받치는 기둥의 모습이 아주 듬직하다. 빈일루 자체로도 호방하고 멋진데 뒷편에 노란색 담장을 마치 어깨동무하고 있는 듯한 정면의 비주얼은 색감적으로도 아름답다. 신일루 앞에 서면 1층의 좁은 빈틈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고 그 위로는 신일루가 시야를 가리고 있다. 저 계단 위를 올라가면 어떤 광경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다림의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그렇게 호기심을 안고 좁은 계단 위를 오르면 아담한 공터가 있고 담장이 쳐져있는데 저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의상대사가 관음상을 모셨다는 원통보전 권역이다. 아직 원통보전으로 들어가기 직전, 신일루를 지나쳐 계단을 올라오자마자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의 색감이 참 따스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동화 같은 아늑함을 선사해준다. 담장의 동그라미 장식들은 유려한 율동감마저 느끼게 해준다. 지붕 끄트머리의 처마가 일종의 액자 혹은 프레임이 되어 이 자리에 서서 보이는 담장과 공터는 한 폭의 회화 같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걸음을 잠시 멈추고 일단 사진부터 찍고 본다.
한참을 그 푸근함에 심취해 있다가 담장문을 넘어서면 관음상을 모신 낙산사의 원통보전이 있다. 사찰의 본전은 어떤 부처를 모시느냐에 따라 명칭이 달라지는데 원통보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곳이다. 원통보전 안에 모신 건칠관음보살좌상은 2005년 대화재 때 다행히 살아남아 원형 대로 전해지고 있는 불상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관세음보살은 엄밀히 말해서 '보살'이지 부처가 아니다. 보통 부처라 함은 비로자나불, 석가모니, 미륵불, 아미타, 약사여래 이렇게 다섯 존재들을 일컫는다. 반면 보살은 부처를 보필하는 존재로 부처의 불법을 중생에게 설파하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이들이다. 보살 역시 어떤 부처를 보필하느냐에 따라 석가모니 보살, 아미타 보살, 약사여래 보살로 나뉘는데 이중 관세음보살은 아미타여래불을 모시는 보살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이 여기서 유래했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소리를 본다'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워낙에 대중적으로 인기가 좋았던 보살이라 원통전, 관음전처럼 부처가 아닌데도 독자적으로 사찰이 세워지기도 한다.
낙산사의 원통보전 앞 금당에는 칠층석탑이 오뚝히 서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할 당시만 해도 3층이었다는데 조선의 세조가 낙산사를 중창하면서 더 세련되고 화려하게 7층으로 늘렸다고 한다. 확실히 세조는 돈을 쓸 때는 아낌없이 팍팍 쓰는 군주였다. 낙산사 여기저기에서 은근히 세조의 흔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무엇보다 7층 석탑 위로 살짝 비치는 바다의 수평선이 이 다음 낙산사의 코스를 한층 설레게 해준다.
원통보전에서 '꿈이 이루어지는 길'을 따라 가면 거대한 해수관음상을 만난다. 해수관음상은 1970년대에 낙산사의 정기와 설립 배경을 기리기 위해 권정학 조각가가 6년에 걸쳐 만든 15m의 거대한 석상이다. 관음보살은 한 손에는 나뭇가지를, 한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는데 낙산사의 해수관음상은 정병만 들고 있다. 대신 관음보살이 모시는 아미타불의 수인을 하고 있다. 동해를 굽어보는 낙산사 해수관음상의 표정은 과묵하고 근엄하여 위엄을 갖추고 있고 관음상 앞의 넓은 도량은 관음상의 지엄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듯하다. 이 도량은 강화도의 보문사, 남해 보리암과 더불어 한국의 3대 관음기도 도량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부터 바다냄새와 바다소리가 확 내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나무사이로 비친 바다를 살짝씩 보면서 내려오면 화려한 옥색기와의 보타전이 있고 이곳에서 더 직진하면 관동 8경 중 하나인 의상대를 볼 수 있다. 의상대는 저 오래 전부터 강원도의 대표적인 일몰, 일출 명소로 손꼽혀왔다. 의상대는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했을 당시 바다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절벽에 설치한 정자인데, 언제인지 훼손되었다가 1925년 만해 한용운이 복원했다고 한다. 일부는 1975년과 2009년에 조금씩 개축했다. 바다의 호연지기를 더 느끼고 싶다면 푸른 지붕이 시선을 빼앗는 홍련암까지 갔다 오자. 홍련암이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났다는 그 굴이란다. 그리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오면서 의상기념관을 둘러보고 그대로 쭉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가면 낙산사 일정의 끝이다. (낙산사에는 정문이 있고 후문이 있다. 후문으로 들어오면 이 코스의 역순으로 돌아볼 수 있다.)
낙산사를 창건한 의상대사의 흔적은 양양 외에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후대의 사람들은 원효대사야말로 불교의 대중화에 이바지했으며 의상대사는 불교의 교리를 닦기만 했다며 둘을 분리한다. 물론 의상대사는 이론적인 토대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지만 전국을 유람하며 좋은 자리에 수많은 사찰들을 세워주었다. 그 자리들은 대부분 큰도시가 아닌 중심으로부터 외진 곳들이었다. 의상대사가 중심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방 곳곳에 큰 사찰들을 만들어준 덕에 지방민 교화와 더불어 신라라는 새로운 국가로 통합된 고구려, 백제의 백성들을 종교의 구심점으로 통합해낼 수 있었다. 의상대사는 불교의 화엄사상을 강조했다. '화엄일승법계도'에 의상대사가 집적한 의상대사의 화엄사상이란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다'는 끝없는 조화를 중요시 여긴다. 그의 화엄사상대로 의상대사는 사찰 건립을 통해 하나된 신라인들의 궁극적인 조화를 실행해나갔던 것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고 공동체의 미래를 쉽게 예측하기도 어려운 이 시대에서 더더욱 의상대사의 '끝없는 조화'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한다.
낙산사의 의상대와 더불어 양양의 대표적인 일몰, 일출 명소가 있으니 바로 하조대다. 근래에는 그 인지도가 많이 수그러든 듯하지만 하조대는 '양양'하면 반드시 들러서 봐야 하는 절경 중 하나로 손꼽혔다. 새벽아침에 TV에서 틀었던 애국가 영상에서 해돋이 장면으로 하조대의 명성이 아주 유명해졌다. 인지도는 꽤 잊혀졌다고 한들 그 아름다움은 변하질 않는다. 일몰, 일출 명소라고 해서 꼭 그때 갈 필요는 없다. 환한 낮에도 푸른 하늘과 바다, 하얀 파도의 포말을 병풍으로 주변에는 무채색의 흙과 돌 그리고 송림들을 낀 이 절벽 자체로 자연의 걸작품이기 때문이다. 하조대는 고려 말 권문세족 겸 신진사대부였던 조준과 하륜이 기거한 적이 있다고 해서 두 사람의 이름 앞글자를 따와 붙여졌다고 한다. 거칠게 깎아내린 하조대의 절벽 위에 고고하게 서 있는 휜 소나무는 양양의 자유로운 바다바람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예전부터 하조대는 유명한 관광지였다. 조선 2대왕 정종 대에 하조대를 볼 수 있는 정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의 하조대 정자는 1998년 복원한 것이다.
하조대의 인지도가 예전보다 내려갔다고 하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서 최근 다른 이유에서 하조대를 찾는 발걸음이 부지기수로 늘었다. 하조대를 찾는 관광객들은 늘 옆에 있는 하조대해수욕장까지 즐겼는데, 최근 SNS에서 이 하조대해수욕장이 '서피비치'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젊은 세대가 일부러라도 와서 찾는 청춘의 성지가 되어버렸다. 이국적인 카페가 생기고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기 전에는 주말밤마다 파티가 열렸다고 한다. 서피비치가 이토록 빠르게 인기를 얻은 시작은 서피비치가 이름대로 서퍼들이 몰리는 바다로 이름을 날렸고 최근 부쩍 서핑에 대한 관심이 치솟아서다. 꼭 프로가 아니더라도 서핑을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양양에 갔다 오면 "서핑하고 왔어?"라는 질문이 늘 따라다닐 정도다. 서핑의 유행은 서핑에서 즐길 수 있는 무언가를 일상에서는 느낄 수 없는 시대상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일어서기도 힘든 파도 위에 오로지 혼자 힘으로 보드 위에 어렵게 일어서 파도와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서핑 특유의 그 즐거움은 땅에서 찾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유로움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하조대해수욕장을 서피비치로 재탄생시킨 개국공신 서퍼들은 양양 현지인들뿐 아니라 양양을 사랑하는 타지인들도 부지기수다. 양양으로 이사해 정착하기도, 혹은 본가와 양양으로 오가며 활동하시며 서핑교실이나 서핑장비 대여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자체로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들인가! 일상의 루틴을 벗어나는 자유는 얻기 위해서 상당한 용기와 각오가 필요하기에 '자유'란 숭고하디 숭고한 내면의 가장 큰 투쟁인 것이다. 그러나 서핑에 대한 급격한 인지도 상승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운집하게 해 예상치 못한 쓰레기투기 문제가 발생했다. 개국에 대한 책임까지 지시려는지 서퍼분들은 환경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등 저마다의 노력을 다 하고 계신다. 양양은 '책임 있는 자유'의 고향인 셈이다.
서피비치에서 나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유명한 멕시칸 타코집이나 하와이안 수제버거집들이 꽤 있다. 바다를 보고 멕시칸 타코나 하와이안 수제버거를 먹어주지 않으면 제대로 다 즐기지 못하는 기분이다. 퀘사디아에 맥주 한 잔 하고 싶지만 차를 가져와 맥주 대신 퀘사디아와 최고의 궁합인 닥터 제로로 대체한다. 서퍼들 사이에서 '장판'이라고 불리는 평탄한 바다와 그 시야를 장식해주는 송림들의 광경까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어느 감각 하나 빠드리지 않는 최고의 체험이다.
(개인적으로 '파마씨' 식당을 좋아하는데 얼마 전 영업을 종료했다고 한다. '파마씨'만큼이나 '파머스 키친'이라는 식당이 유명하지만 이외에도 찾아보면 맛집들이 꽤 있다.) 오는 길에 죽도해변을 지나치며 보니 오히려 서피비치보다 훨씬 더 많은 서퍼분들이 몰려 있다. 서피비치는 이제 관광해변으로 자리잡은 듯하고 제대로 서핑을 즐기러 오는 스포츠맨들은 죽도해변을 찾는 듯하다. 하긴 자유의 스포츠인 서핑에 굳이 특정 해변을 콕 집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것으로 자유의 의미를 찾아 떠난 양양 당일치기 여행은 끝이다. '자유란 무엇인가'라는 거창한 질문을 안고 떠났지만 결국 내가 찾은 답은 '모르겠다'다. 사실 답을 못 찾을 걸 알고 떠난 여행이었다. 나 자신을 찾는 여행? 그런 거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행의 과정이 '자유'라는 추상적인 관념을 조금이나마 구상적 가치로 바꾸어주는 느낌은 분명 든다. 나는 그것을 양양에서 진전사지 3층 석탑에 깃든 도의선사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지방 각지에 사찰을 건설한 의상대사를 통해, 그리고 양양의 바다로 모여드는 서퍼들을 통해 대충이나마 어림잡은 거 같다. 집으로 돌아온 뒤 서핑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유명한 서핑선수들을 찾다가 한국의 문리나 서핑선수를 알게 되었고, 선수님의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인터뷰 중 선수님의 인상적인 답변들을 인용해보고 싶다.
"바다라는 곳이 일상과는 떨어져서 분리된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라는 느낌을 줘요. 가끔은 너무 크거나 어려운 파도를 만날 때는 그런 자연을 통해 인생을 배우기도 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죠. 바다에서는 행복, 즐거움, 희망, 어려움, 힘듦 여러 가지 것들을 느끼고 배울 수 있어요. (...) 보드 하나로 느낄 수 있는 행복감과 평온한 감정, 그로 인해 맞춰지는 삶의 균형이 제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일상과 분리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고 일어서는 것이 '자유로운 삶'인 듯하지만 찬찬히 인터뷰를 읽다보면, 그리고 양양 여행을 통해 느낀 바를 고려해보면 결국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와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어딘가로부터 해방하고 떠나고 일탈하는 것이 예삿만은 아닌 스스로의 삶에 확신을 갖고 (그것이 주류의 보호를 받진 못하더라도) 내 앞길을 무모하고 도전적으로 걸어가보는 행보야 말로 내가 해석하는 헤겔에 가장 근접한 자유다. 그런 존재들의 '자유에 대한 인식' 덕에 인류의 삶과 역사가 여기까지 진보해왔고 진보할 것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허먼 멜빌 <모비 딕>
19세기 미국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작 중 하나로 고전문학의 상징으로 손꼽히고 있는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입니다. 출판 당시에는 편집장의 실수로 에필로그가 수록되지 않아 이야기 설정의 구멍 탓에 대중적인 성공을 보지 못했지만 20세기 멜빌 연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에필로그가 발견되었고 이후 숱한 평단과 대중들의 열렬한 환호를 지금까지도 받고 있죠. 고전문학이라지만 문체가 아주 힘차고 독특하고 유려해서 시대적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은 전혀 없습니다. '모비 딕'이라는 향유고래에게 다리를 잃은 포경선의 선장 에이해브는 복수를 위해 피쿼드 호의 포경선을 타고 모비 딕을 찾아나서는 줄거리인데, 관찰자 이슈미얼의 서술, 선원들의 복잡다단한 관계망과 묘사까지 여러 서브텍스트들이 겹겹이 쌓인 이야기죠. 작가 멜빌은 자신을 에이해브에 투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관찰자 이슈미얼에 투영하는 것 같기도 하며 모비 딕을 잡겠다는 에이해브의 집념 그리고 서술방식은 인간의 욕망을 도발적으로 들추어냅니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과 포경업에 관한 배경지식, 고래에 대한 백과사전식 설명까지 어떤 장르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독특한 소설이죠. 극단적인 상황을 여러 번 연출해내며 바다라는 두려움과 낭만의 망망대해에서 인간의 심연 깊숙히 품은 자유에 대한 양가적인 열망을 꼬집으며 독자들에게 다양한 고민과 질문을 제시해주는 불후의 명작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커티스 핸슨, 마이클 앱티드 감독의 <체이싱 매버릭스>
캘리포니아의 바닷가 마을 산타크루즈에 사는, 유난히 파도에 관심이 많던 소년 '제이'가 동네 서퍼였던 '프루스티' 아저씨와의 만남을 계기로 서핑의 세계에 입문하고 초대형 파도인 '매버릭'에 제이가 도전하는 줄거리의 영화입니다. 어릴 적 서핑에 재능을 보인 제이는 더 높은 파도에 도전하기를 염원하고 프루스티는 그런 제이를 훈련시키는데요, 훈련과정에서 제이와 프루스티 둘 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족, 사랑, 우정의 문제를 함께 해결합니다. 한계에 도전하는 스포츠 훈련이 종종 인생에 비유되듯 이 영화는 단순한 스포츠 영화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는 서브 텍스트를 가지고도 있답니다. 파도의 일부가 되기 위해 자연과 교감하는 일은 결국 세상과 그리고 자기를 둘러싼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라는 성장영화이기도 하죠. 서핑선수 제이 모리아티의 실화를 다룬 내용이며, 파도와 바다를 연출해내는 방식과 서핑의 시원한 쾌감을 간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촬영기법 그리고 영화의 무드와 꼭 맞아떨어지는 음악의 활용까지 인상적인 '여름' 하면 반드시 생각나는 영화 중 하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