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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pr 30. 2022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경기도 광주편]

너른 고을을 여행하다

우리나라의 지명들 중엔 동명이역들이 간혹 있다. 어느 한 쪽이 상대적으로 더 큰 도시이거나 더 유명하다면 다른 한 쪽은 오해를 받아야 하며, 그 지역이 고향인 사람들은 구태여 본인의 출신지가 어디라고 구체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른다. 가장 대표적인 지명이 바로 '광주'다. 다들 '광주'하면 전라도의 '광주광역시'를 떠올린다. 그러나 우리나라엔 또 하나의 '광주'가 더 있다. 바로 경기도 광주시다. 전라도의 광주광역시가 광역시이다보니까 경기도 광주가 조금 밀리는 듯한 느낌이 있지만, 역사적인 영예를 봤을 때 경기도 광주는 결코 어디서 꿇리지 않는, 아니 아주 커다란 지역이었다.


우선 두 광주의 한자부터가 다르다. 광주광역시의 광주는 '빛 광(光)' 자를 쓰는 반면 경기도 광주의 광주는 '넓을 광(廣)' 자를 쓴다. 지명의 뜻에서 유추 가능하듯 경기도 광주는 과거에 아주 넓은 땅이었다.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와 성남시, 의왕시, 안산시과 남양주시 그리고 수원의 일부 지역과 서울의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를 아우를 정도였다.  광주는 한강의 중상류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주요격전지였으며 삼국통일 후 신라가 통일된 한반도 국토를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재편할 때 '한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조선시대에 조선 8도가 있었듯, 신라에는 9주가 있었고 한주는 그 9개 중 하나였다. 한주의 '한'은 '크다, 넓다'는 순우리말로 고려 건국시점에 맞추어 의미만 살려 '넓을 광(廣)' 이라는 한자로 대체하였으니 광주의 시작은 통일신라 '한주'로 소급될 수 있으며, 굳이 따지자면 광주는 평안도 일부, 황해도, 강원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일부까지에 걸쳐져 있었다. 더불어 신라 말 고려 초 광주 이씨는 광주 지역의 아주 거대한 대호족 집안이기도 했다. 고려 성종 때는 전국 주요 도시 12개만 선정하는 '목'으로 승격되어 '광주목'이 되면서 지금의 '광주시' 틀이 형성되었다. 고려 5도 중 '양광도'는 양주와 광주의 앞글자를 따서 명명될 정도로 당시에도 광주는 도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조선 후기 인조 대에는 남한산성이 개축되면서 광주가 군사적 기능을 위해 행정부에서 특별관리하는 '유수부'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해방 후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면서 점점 광주시 내 특정 구역들에 인구가 불어나면서 일부 지역은 서울로 통합, 일부 지역은 경기도의 자치시(군)으로 독립하여 1989년에 지금의 광주시 모습을 최종적으로 갖게 되었다.

신라의 행정구역과 고려의 행정구역

이토록 광주는 유서가 깊은 곳이며 역사적으로 각 국가의 정부에서 특별관리를 했던 곳이기에 다양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기도 하다. 광주의 깊은 매력을 알게 되면 절대 한 번 오고 마는 곳이 아닌, 또 오고 싶어지도록 빠질 것이라 확신한다.




조선 500년의 아름다움을 보관하다, 경기도자박물관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첫 번째 경기도 광주의 얼굴은 경기도자박물관이다. 얼핏 들으면 전국의 그 많고 많은 도자박물관 중 뭐가 특별하나 싶을 수도 있다. 한국도자사에서 경기도 광주는 의미 깊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음식을 관리하고 만드는 '사옹원'이라는 관청이 있었다. 궁중음식과 식재료는 물론 식기까지 담당하였는데 관리 업무는 궁궐의 관청에서 도맡되 제작 업무는 (지금도 많은 기업들에선 사무부와 공장부가 분리되어 있듯) 제작환경에 걸맞은 지방분원에서 담당하였다. 궁중음식에 올라갈 식기이면서 궁궐에서 사용하는 도자였기 때문에 사옹원에서는 질 좋고 형태도 아름다운 식기와 도자를 고집해야 했다. 당시 경기도 광주의 흙이 굉장히 우수해 많은 도공들이 광주를 추천했고 세조 대에 경기도 광주에 사옹원 분원을 신설했다. 성종 대에는 광주 사옹원 분원에 소속되어 있던 사기장이 4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원래는 왕실에 쓰일 식기와 도자를 만들었지만 사옹원 분원에서 만들어진 도자류들이 워낙 우수하고 아름다워 그 수요가 양반들에게도 퍼졌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점점 민가로도 대중적으로 널리 퍼져갔다. 경기도 광주에서 나오는 도자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자 조선 정부는 경기도 광주의 도자요를 본사로 둔 동시에 주변의 이천, 여주, 용인 등에도 지방 도자요를 설치해 수요를 감당케 했다. 즉 경기도 광주는 조선시대 도자의 본산이었던 것이다.


'조선'하면 백자를 떠올리지만 고려말 조선초에는 분청사기가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광주의 사옹원 도자요에서도 초반엔 분청사기가 주품목이었다. 원래 고려시대에는 청자가 보편적이었으나 청자가 아주 뛰어난 만큼 사용되는 흙에 예민해야 했는데, 청자에 사용되는 흙이 주로 해안가 지역에서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이 너무 잦아지자 정부는 백성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강제이주시킨다.고려청자를 제작하던 도자요들은 주로 다 해안가에 위치했던 터라 사람들의 거주 지역이 옮겨가면서 도요들이 전부 망해버리고 말았다. 청자를 제작하던 도공들이 별 수 없이 전국으로 퍼져 저마다의 지역에서 민간도요들을 설립하고 개성있는 도자들을 만들어냈다. 내륙지방의 흙들은 청자의 색을 내지 못해 전국의 도예공들은 청자를 제작하는 방식에 백색토양을 섞는 새로운 제작기법을 시도했고, 이렇게 두 가지 색이 섞여 투박한 회색빛깔을 내는 분청사기를 탄생해냈다. 분청사기는 민가와 사가에서 투박하게 만들어졌지만 워낙 유행을 타다 보니 양반들도 분청사기를 선호하게 됐고 정부에서도 분청사기를 공식적으로 제작했다. 분청사기의 미학에 대해서는 혜곡 최순우 미술사학자의 평론이 가장 잘 표현되는 듯하다.


"고려청자에 바탕을 둔 분청사기의 기법은 한층 대범해지고 민중적이었으며 서민적이었다. 고려청자가 귀족적이었다면 분청사기는 매우 서민적이었다. 분청사기의 기술이 왕성하던 세종조에 이르러서는 전국에 300 수십군데의 관욕 있었다고 전하는데 수요와 공급이 그만큼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쓰는 가문도 그만큼 광범위하게 확대되어갔다. (중략) 


그러면 분청사기는 어떤 점이 좋은가. 첫째 거친 살결에 분을 바르는 화장술은 새 맛으로 승화되어 장식 의장 이상의 장식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작위적이거나 인위적인 데가 없어 자연스러운 신선미를 자아내어 마치 한산모시나 안동포 같은 자연스러움을 자랑한다.



둘째는 '대담한 과장, 대담한 생략, 대담한 왜곡'이 그 특징으로 이것은 근대 미술의 세계와도 상통하고 있다.


셋째는 전체의 생김새로서 '예쁘게 생긴 아름다움보다 잘생긴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분청사기의 세계이다. 좌우대칭이나 둥근 맛을 무시하고 되는 대로 빚어낸 것들이지만 억지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어 자연스럽다. 다시 말하면 '못생긴 것이 오히려 잘생긴' 세계가 분청사기의 세계이다.


넷째는 상상의 날개가 자유스럽게 활개친 '치기'의 아름다움이 곧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이다. 또한 무한한 해석이 가능한 추상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또한 비단 분청사기만의 특성은 아니지만 군더더기나 잔재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 그 특색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미술품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분청사기는 특히 가까이서 뜯어보는 아름다움보다 좀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당장에 느끼는 아름다움보다는 돌아서서 느끼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15세기 초부터 발달한 분청사기의 기법은 15세기 중엽 새로운 문물이 싹트던 세종 때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공들을 수 백 명씩 일본으로 빼앗겨서 분청사기의 전성기도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르게까지 되었다."


분청사기에 대한 미학적 특질과 역사적 맥락, 그리고 한국의 멋과 아름다움까지 확대되는 이보다 더 훌륭한 평론이 있을까. 분청사기에 대한 매력들 중 나는 4번째 이유, '치기'의 아름다움이란 말을 가장 좋아한다. 상상의 나래에 제한을 두지 않는 아름다움이라는 말보다 더한 극찬이 어디 있을까. 


분청사기에도 종류가 여러가지가 있다. 고려 말에는 상감청자의 상감기법이 남아 있어 '상감분청사기'가 제작되었고, 조선 초에는 동그란 문양이나 꽃무늬를 연쇄적으로 찍는 '인화무늬분청사기', 전라도 중심으로 퍼졌던 '박지분청사기'와 '선각분청사기', 충청도 중심으로 제작되었던 철의 성분으로 그림을 그리는 '철화분청사기', 그리고 백자의 유행과 함께 분청사기에도 백토칠을 하되 칠의 방법에 따라 귀얄로 칠한 '귀얄분청사기'와 백토반죽물에 덤벙 넣었다가 뺀 '덤벙분청사기'가 있다.


왼쪽에서부터 '상감분청사기' '인화분청사기' '철화분청사기'


조선중기 성리학의 문화가 한층 완숙해지는 16세기부터는 선비들의 고결한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백자가 지배층들 중심으로 유행한다. '고려'하면 청자, '조선'하면 백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백자는 성리학의 국가 조선을 대변했다. 백자도 분청사기와 마찬가지로 15세기경에는 상감무늬를 활용한 상감백자로부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고귀하고 순결한 선비사상이 강조되면서 아무 무늬를 새기지 않는 순백자에 대한 수요가 치솟았고 무늬가 있다고 해도 아주 단순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거의 모든 예술발전단계의 흐름이 그렇듯 어지러운 사회상과 맞물려 고전주의에서 탈피한 '과장의 미학'이 주목받으며 17세기에는 철화백자가, 18세기에는 청화백자가 인기를 끌었다. 18세기에는 일부 도요에서 '달항아리'들이 만들어졌다.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백자의 역사에 있어서 정수 같은 존재다. 일제강점기에도 달항아리는 고미술상들에게 엄청난 가격으로 거래가 되었고 지금에서도 수많은 미술사학자들과 예술가들이 달항아리의 숭고한 듯 완벽하지 않은 저마다의 모든 평론역량을 발휘해 그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누군가 나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백자'라고 대답하곤 한다. 한국 현대추상예술의 거장 김환기 화백도 달항아리에 영감을 받아 걸작 작품들을 여러 개 남겼다. 전해지는 스물 점의 작품들 중 7점이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유홍준 교수는 "달항아리는 기하학적인 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둥그스름한 볼륨감을 갖고 있다. 그 비정형의 둥근 선이 어진 맛을 느끼게 하며 더 큰 미감을 준다"고 표현했다. 혜곡 최순우는 "아무런 장식도 고운 색깔도 아랑곳할 것 없이 오로지 흰색으로만 구워낸 백자 항아리의 흰빛의 변화나 그 어리숭하게만 생긴 둥근 맛을 우리는 어느나라 항아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데서 대견함을 느낀다"고 하면서 '폭넓은 흰빛의 세계와 형언하기 힘든 부정형의 원이 그려주는 무심한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국미의 본바탕을 체득할 수 있다고까지 한다. 달항아리를 한자어로 '백자대호'라고도 부르는데 삼불 김원룡은 이런 시를 남겨 달항아리를 찬미했다.


조선백자의 미는

이론을 초월한 백의의 미

이것은 그저

느껴야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마시오

(중략)

조선 백자에는 허식이 없고

산수와 같은 자연이 있기에

보고있으면 백운이 날고

듣고 있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의 민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려 나오는

고금미유의 한국의 미

여기에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지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김원룡 <백자대호>



18세기 후반에는 설백색의 백자가, 19세기에는 유백색의 백자가 만들어지다가 점차 나라의 국운이 다하면서 백자 제작도 중단된다.


경기도 광주의 사옹원 분원에서는 분청사기와 백자 위주의 도자들이 생산되어 조선시대의 생활사와 문화사의 흐름과 함께 해왔다. 사옹원 분원은 그렇게 조선왕조 500년 간 조선시대의 최고급 도자류들을 빚어오다가1894년 갑오개혁 당시 민영화가 되는 바람에 자금난으로 인한 빚을 감당 못하고 파산한다. 사옹원 분원의 가마들은 전해지고 있는데 과거 사옹원 분원 자리에 지어진 곳이 경기도자박물관이다. 경기도 최대 규모의 도자박물관이며 우리네 멋이라고 감히 자부할 수 있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원없이 구경하고 올 수 있다. 최근들어 K-문화가 전세계를 강타 중이며 한국인으로 강한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한국의 도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아왔다는 도자의 우수성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너무 많이 언급하는 것 같지만 한국 자기에 대한 얼을 혜곡 최순우 선생님의 글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복원한 옛 사옹원 분원 가마

"나는 믿고 싶다. 도공들은 만드는 즐거움에 살고 있다고. 무어라고 조리 있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릇을 빚어내는 즐거움이 바로 그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이라고. 조선의 아름다움은 이미 500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해묵은 조선의 그릇들은 오늘도 아예 늙을 줄을 모르고 있다."   - 혜곡 최순우 <살결의 감촉, 도자기>



지는 아름다움, 단풍놀이: 곤지암의 화담숲

경기도 광주를 찾을 예정이라면 꼭 맞추어야 할 계절이 가을과 겨울이다.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둘 다이다. 먼저 가을에 경기도 광주를 가야 하는 이유는 곤지암의 화담숲에서 단풍놀이를 만끽하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곤지암 역에 내려서 화담숲으로 가기 전 화담숲보다 먼저 곤지암의 명성을 떨치게 해주었다는 곤지암소머리국밥거리에서 배를 든든하게 채우기로 한다. 조선시대 때 곤지암에는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오는 삼남지방의 시험응시생들이 많이 몰렸다고 한다. 부담스러운 시험을 앞두고 지나치게 자극적이거나 기름진 음식보다는 기력을 보충해줄 수 있는 음식이 시험응시생들에게 수요가 많았고 그렇게 곤지암에는 소머리국밥거리의 전통이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최미자소머리국밥이 가장 유명한데 과연 국물의 풍미가 일품이다. 국밥도 국밥이지만 가게 고유의 소스가 입맛에 딱 맞아 고기에 젖가락질이 끊이질 않는다. 지방질이 많은 소머리고기는 그 식감이 또 얼마나 부드러운가!


곤지암에서 국밥으로 배를 채우고 과거시험 대신 단풍놀이를 떠난다. '정다운 이야기'라는 동화적인 뜻의 화담숲은 LG상록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수목원으로 경기도 광주의 독바위산의 한 기슭을 차지하고 있다. 무려 5만 평의 넓은 면적을 자랑하며 2006년부터 생태보호를 위한 수목원으로 운영되다가 2013년부터 민간개방이 되었다고 한다. 서식생물종은 약 4000여 종에 이른다. 규모가 제법 큰 수목원이기 때문에 사계절 내내 다양한 식생들이 계절별 각기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주고 있지만 가을의 붉은 단풍으로 SNS에서 이름을 떨쳤고 지금은 한국의 대표적인 단풍놀이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겨울에는 스키장도 운영한다. 화담숲 내부에는 모노레일이 있어서 체력에 자신이 없다면 모노레일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도보로 한 바퀴 도는 것을 추천한다. 입구의 지도를 보고 너무 넓어 일행과 중간쯤에서 돌아오기로 결정하고 출발했지만 붉고 노랗게 타오르는 가을의 수려한 자태에 취하다보니 2~3시간이 금세 지났고 어느새 한 바퀴를 다 돌고 나와버렸다. 숲 자체가 16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테마별 관람할 수 있는 나무 및 식물들의 모습이 다 달라 지루할 틈이 없다. 중간중간 희귀동물들에 대한 설명과 그 모형들까지 실감나게 준비되어 있어서 이보다 생생한 자연공부가 또 없다. 때를 맞추어 돌아올 때 즈음 일몰이 지면 그 노란석양빛에 붉은 단풍들이 빛을 받아 분위기가 한층 더 고혹해진다. 단풍이나 석양이나 그 본질은 '지는 것'이다. 진다는 건 쇠락해가는 것, 그리고 곧 작별을 고해야 하는 파멸의 정서를 품고 있어서 정조 자체는 쓸쓸하고 아련한 것이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아름답다고 한다. 붉고 노란 단풍과 석양만큼 '지는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감정과 감각을 일깨워주는 역설적인 자연의 매력이 또 없다. 그리고 이 지는 것들이 푸석한 겨울을 지나 다시 날이 따뜻해질 때면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준다는 자연의 순환을 알고 있기에 이 가을의 정서가 도리어 강한 생명력을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느끼게 해주는 듯하기도 하다. 


자연을 예찬하는 시 작품들이 뭐가 있을까 고민할 때마다 난 우선적으로 시조나 가사를 찾는다. 기계문명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자연을 즐기는 방법은 적어도 현재의 우리보다는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어부의 사계절 생활을 계절별로 나누어 지은 연시조인데 이 중 가을 파트의 내용은 이렇다.


수국(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만경징파(萬頃澄波)에 실컷 용여()하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그리고 단풍유랑을 마칠 때쯤 영화 <만추>의 한 대사가 떠오른다. 

"햇빛을 즐기세요. 다시 안개가 끼기 전에"


남한산성에서의 47일

경기도 광주를 가을이 아닌 다른 계절, 겨울에 가야 하는 이유는 이번엔 남한산성을 가기 위해서다. 그중에서도 눈이 오는 날이면 꼭 남한산성에 가보고 싶다. 눈이 올 때 등산을? 맞다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눈이 온다고 무작정 남한산성에 갈 순 없고 한 번 정도 큰 맘 먹고 온몸에 멍이 들 각오를 하고 산성에 올라야 한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한 겨울에 그것도 눈내린 남한산성을 찾는 이유는 설경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는 한 줄의 기사 때문이다.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 <인조실록> 1637년 1월 1일의 첫 기사다.



1637년의 첫날은 다른 해보다 유난히 추웠고 눈이 차갑게 내렸고 임금은 궁궐이 아닌 남한산성에 있었던 정상적이진 않았다. 우리의 임금이 청나라 군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올렸던 전쟁 병자호란 와중이었다. 인조는 궁궐에서 나와 남한산성에서 마지막 47일을 버티고 있었다. 병자호란이란 전쟁은 외교의 실패에서 비롯된 참사였다. 요동만주에서는 중국의 명나라와 여진족의 후금 군대가 한창 맞붙고 있었다. 당시 조선의 가장 큰 화두는 외교적으로 누구를 지지할 것이느냐였다. 명나라는 몇 년 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우러 파병을 와주었으며 오래도록 조선은 명나라에게 사대를 하며 여진족은 오랑캐라고 얕잡아보고 있었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명나라를 지지하는 것이 맞으나 명나라는 나라 구실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던 반면 후금의 군대를 일취월장하고 만주 전체를 차지해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명나라가 휘청거리고 후금이 만주를 제패할 것이 뻔했으며 안타깝게도 조선은 만주와 붙어 있었다. 조선의 15대 임금 광해군은 후금을 지지하기를 원했으나 신하들은 목소리를 모와 광해군의 외교노선을 비판했다. 심지어 광해군의 여당인 북인조차 광해군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광해군은 그렇다면 명나라를 지지하는 가운데 후금에게 공격받지 않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요구했으나 신하들은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반대만 할 뿐이었다. 1623년 광해군의 야당이었던 서인이 광해군을 내쫓아내고 인조를 16대왕으로 옹립해 서인정권이 들어섰다. 정치인들에겐 딜레마가 있다. 정치인들에겐 딜레마가 있다. 전 정권을 부정하고 들어선 정부는 본인이 붕괴시킨 그 정권에서 이어지던 모든 정책들을 폐기시켜야 본인들 정권의 명분과 정당성이 생긴다. 그러나 그러자니 일부 정책들은 전 정권의 정책이 더 현실성이 맞음에도 그마저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광해군을 무너뜨린 인조와 서인 정권은 명나라가 지는 패인 줄은 알았으나 명분에 함몰되어 여진족의 후금과 척을 져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후금의 2대 황제로 갓 등극한 홍타이지는 곧바로 조선을 침공해왔다. 1차 후금의 침공 이른바 정묘호란이었다.


그렇다고 인조와 서인정권이 아무런 전쟁대비를 하지 않고 있진 않았다. 여진족들이 쳐들어오면 북쪽에서 내려오기에 그 대비책으로 조선은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남쪽 3개의 도의 병력을 차출해서 북상시키기는 것을 매뉴얼로 삼았다. 3개 도의 병력이 한꺼번에 올라오면 다같이 주둔할 수 있는 거점지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가 경기도 광주 신라시대에 축성되었던 주장성을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수도를 방위하는 중앙군 군영 중 하나였던 수어청을 주둔시켰다. 지금의 남한산성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정묘호란 당시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강화조건을 적당히 맺은 채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인조는 후금과 맺은 강화내용을 매우 불성실하게 이행했고 이는 다시 후금의 황제 홍타이지의 심기를 계속 건드렸다. 한편 홍타이지는 몽골족까지 복속시킨뒤 대유목민족 통합을 일구어냈고 1636년 국호를 '금'에서 '청'으로 개칭했다. 홍타이지가 청나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에 등극했을 때 홍타이지는 용골대와 마부대를 조선에 사신으로 보내 조선 정부도 홍타이지의 황제 등극에 동참하라는 요구해왔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황제는 명나라 황제 한 명이라 동참할 수 없으며, 용골대가 가져온 공식서한 역시 조선의 관례상  받아드릴 수 없다며 홍타이지의 요구서한을 아예 인조에게 올리지도 않았다. 용골대는 강한 불쾌감을 표하며 인조를 만나지도 않은 채 본국으로 귀국했고, 인조는 척화선언 즉 청나라와의 국교단절을 선언했다. 이러한 사건이 있고 조선에 대한 복속을 확실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홍타이지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조선 침공을 준비하고 1636년 12월 압록강이 얼자마자 청나라 용골대가 이끄는 3만의 병력이 조선을 침략해왔다. 1636년 이른바 병자호란이었다. 


보통은 국경선에서부터 수도까지 중요 성들을 하나하나 공략해가는 전술이 전쟁에선 일반적이다. 그런데 용골대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은 어떤 성도 함락시키지 않고 오로지 기동력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성들을 전부 그냥 지나치면서 곧장 수도 한양으로 진격했다. 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느냐면 12월 13일 경에 청나라 군대가 평안남도의 안주를 지나쳤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오자 인조는 우선 왕자와 공주들, 비빈들, 그리고 왕실 어른들을 먼저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12월 14일에 인조도 세자와 조정 대신들과 함께 강화도로 가려고 하는데 청나라 병력이 지금의 서울시 은평구-서대문구에 도착을 했다. 인조는 가는 길이 차단되어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바꾸었다. 남한산성에서 다시 강화도로 가려고 시도를 했으나 용골대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바람에 인조와 조정은 남한산성에 고립된다.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호조판서 최명길이 적진으로 들어가 강화요구조건을 듣고온다며 시간을 끌어주었기 덕분이었다. 적진에서 돌아온 최명길은 세자를 인질로 보내라는 청나라 측 요구조건을 전달했다. 차마 세자를 보낼 순 없다는 여론 하에 인조는 16일 왕의 동생을 대신 받아달라고 보내는데, 실제 동생은 아니었고 그냥 왕실 종친 누구 중에서 아무나를 왕의 동생이라고 속이고 보낸 것이었다. 청나라 장수는 속임수임을 눈치채고 그 자리에서 왕의 동생과 같이 온 박난영 장군의 목을 베어버리고 나머지는 다시 돌려보냈다. 최명길은 세자를 보내주고 강화조약을 맺자고 주장했다. 다른 조정신하들은 최명길을 비난하며  반대했고 결정적으로 예조판서 김상헌이 강력하게 화의의 부당함을 주장했다. 당시 김상헌은 다소 융통성 없고 꼬장꼬장할지언정 모두가 알아주는 지조있는 선비였고 우직하고 진중하여 다들 우러러 볼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 김상헌은 인조가 남한산성 들어갈 때 지방에 있어서 안 좋은 꼴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신하로서 왕을 곁에서 보좌하겠다고 며칠 후 일부러 남한산성까지 힘들게 들어갔을 정도였다.  

인조는 일단 계속 항전해보기로 한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었다. 한반도의 북쪽과 남쪽에서 군대를 조직한 대규모 정규군이 남한산성으로 오고 있었다. 이들이 전부 모여 용골대의 청나라군과전면전을 치르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심지어 남한산성 내부에서도 게릴라 전술로 조선의 병사들이 성문 밖을 몰래 나가 만주족 열 몇 명 정도 조금씩 조금씩 싸워서 이기며 작은 전공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지방별 군대들이 조금씩 경기도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지리적으로 가장 인접했던 충청도관찰사 정세규가 이끄는 충청도병력이 12월 27일 경기도에 무사히 진입했지만 경기도 용인과 경기도 광주시의 험천이라는 곳에서 기습을 받아 전멸했다. 기습을 받았다는 건 이미 청나라군 쪽에서 조선지방군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는 게 된다. 정보전에서도 청나라는 조선보다 한 수 위였다. 해가 넘어가고 1637년 1월 1일 청나라의 황제 홍타이지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와 용골대 선봉부대와 합류했다. 홍타이지가 직접 왔다는 소식에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정 대신들은 숙연해쟜다. 최명길은 다시 한 번 홀로 홍타이지에게 국서를 보내자고 주청한다. 김상헌이 또 반대했으나 최명길이 “와신상담도 국가가 보존되어야 할 수 있다”는 말에 일단은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국서를 보내기로 했다. 홍타이지가 답서를 보내왔는데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거나 유린할 생각은 없다. 이 재앙은 너희 스스로 자초했다. 평범한 날로 돌아가고 싶으면 조용히 항복해라. 괜히 우리 군사들에게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라” 라는 내용이었다. 김상헌은 대답할 가치조차 없다고 했지만 최명길이 인조를 다시 설득하곤 ‘죄송하다 우리가 잘못했다 용서해달라’ 는 내용의 답서를 최명길이 직접 들고 홍타이지에게 갔으나 홍타이지는 답서를 받지 않겠다며 돌려보냈다. 이를 두고도 최명길이 괜히 나서는 바람에 국가의 치욕을 당했다며 조정 신하들은 최명길을 탄핵상소를 올렸다. 그저 인조가 최명길을 많이 아꼈기 때문에 그나마 인조가 최명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그렇다고 인조가 굴복하려는 건 아니었다.

1월 5일과 6일 사이에 6000명의 전라도 병력이 경기도 용인에 있는 광교산에서 싸워 승리하고 심지어 적장을 사살하기까지 하는 전과를 올렸다. 당시 육군총장이었던 김자점 장군도 경기도 양평에서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병력을 모으고 있었다. 인조의 항전 의지가 일시적으로 불타올랐으나 경상도 병력 8000명이 경기도 광주의 쌍령에서 너무 피해가 큰 패전을 겪어버리고 말았다. 광교산에서 승리를 한 전라도 병력도 부대 간의 연락망이 체계적으로 잡혀있지 않아 의사소통 장애로 더 이상 진군을 하지 않고 수원으로 도리어 후퇴를 하는 상황이 벌어졌고, 양평에서대군을 끌어모으고 있던 김자점도 군대만 집결시킨 채정작 아무런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강원도 병력도 하남시 검단산에서 선전을 하더니 결국 청나라 기습을 받아 유리한 고지를 빼앗기고 있었다.



누가봐도 전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최명길은 홍타이지에게 화친국서를 보내자며 편지를 써오자 김상헌은 그 자리에서 서한을 찢어버리는 등 남한산성 내부나 외부나 상황이 격해지고 있었다.  남한산성의 성벽은 허물어지고 심지어 인조가 있는 행궁까지 대포가 날라오며 공포 분위기는 확산되면서 일부 군부 장교들과 군사들이 그만 전투를 포기하자며 항전강경파들을 전부 성 밖으로 내쫓으라는 시위까지 벌였다. 인조는 최명길을 통해 화친과 항복의식에 대한 내용으로 조율을 하는 사이 강경파들은 계속 안 된다만 외칠 뿐이었고 말이다. 결정적으로 1월 22일 왕자들과 비빈들을 포함해 왕실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던 강화도가 함락되었다. 강화도 성을 지키던 장수와 지휘관들은 화약에 불을 붙여 폭사했고, 강화도 행궁에 있던 인조의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항복을 하면서 청나라 장수들이 이 왕실사람들을 데리고 강화도를 나왔다. 인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젠 강경파들조차도 항전을 주장할 수 없었다. 1월 27일 인조는 항복하겠다는 문서를 보냈고 1월 29일 항복의식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는 청나라 측 편지가 전달되자 1월 30일 47일만에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오게 되었다. 


인조가 머물렀던 남한산성 행궁

청나라 진영이 있던 삼전도에 단을 설치하고 그 가장 꼭대기에 홍타이지가 앉아 있었다. 인조는 단 아래에서 홍타이지를 향해 절을 세 번하고 한 번 절을 할 때마다 3번 머리를 땅바닥에 박아 총 9번을 절하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의 굴욕을 겪어야 했다.  향간에는 인조의 머리에서 피가 낫다고 하는데 이건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삼배구고두례는 인조만 한 것이 아니라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평범한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홍타이지가 다른 유목부족 통합할 때 복속된 부족장들은 모두 그런 의식을 치뤘다. 더불어 그 의식을 치른 뒤 홍타이지가 두 국가의 우방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 입장에선 치욕스러운 일이 맞죠다. 엄연히 나라의 지존인 존재가 머리를 조아렸다. 말그대로 ‘삼전도의 굴욕’이었다. (삼전도가 바로 지금의 잠실 롯데월드가 있던 자리이다.) 청나라는 이 사건을 비석에 새기라고 지시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치욕의 비석이 삼전도비이며, 삼전도비는 여러 사건을 좀 겪었지만 지금은 그 자리에 있다. 


강경파의 당수였던 김상헌은 의식자리에 참석하지 않고 목을 매 스스로 자결하려고 했으나 아들들이 조기에 발견해 목숨을 부지한다. 김상헌과 함께 대표적인 강경론자였던 윤집, 오달제, 홍익한 세 사람은 용골대에게 체포되었고 세 사람은 형장에서도 꿋꿋하게 청나라의 만행을 비판하고 본인들의 이념은 아직까지도 옳다고 생각한다며 당당하게 나오자 용골대가 세 사람을 처형시켰다. 이 셋을 삼학사라고 한다. 


인조는 다시 궁궐로 돌아오는데 남한산성에서 서울까지 광경은 차마 기술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다. 우리나라 백성들이 언급하기도 껄끄러울 정도의 참상을 겪는 걸 바로 눈앞에 보면서도 한 나라의 임금인 인조와 조정신하들은 아무런 항의를 하지 못했다.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조선의 사회적 풍속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부는데, 첫째로 방구석 정치인들이 많아진다. 다들 현실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정계에 진출하지 않은 채 그냥 집에서 사람들 불러다가 입만 나불대는 키보드 워리어들이 많아진다.


둘째 포로 문제다. 포로들이 몰래 도망쳐나와 조선으로 무사히 와도 발각될 시 조선 정부는 다시 송환시켜야 했다. 포로들을 데리고 오려면 돈을 지불해야 했는데 그 가격이 점차 높아져 사오기가 곤란했으며, 특히 조선으로 돌아온 아녀자들의 경우 온갖 차별의 시선을 받으며 파혼당하기 일쑤였고 과부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졌다. 과부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유교사회에서 포로였다가 풀려난 아녀자들의 처우 문제가 조정에서 논의될 정도로 심각했었다.


이토록 끔찍한 전쟁을 자초한 인조와 서인정권을 향해 후대의 우리들은 맹비난한다. 그런데 모든 역사적 사건에는 그 당시의 분위기와 딜레마라는 게 있다. 만약 예시를 들어보자면 중국이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국제정세를 주도할 뿐더러 모든 중국기업들이 전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중이라고 가정해보자. 반면 미국은 몇 십 년 째 경제가 추락해서 모든 기업들이 도산되거나 중국기업에 인수되고 있다. 회복의 기미는 안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미국이 동시에 한국에 금전적 도움을 요청해온다면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중국에 투자하면 수익을 낼 수 있는 확신이 있고, 미국에 투자하면 한국도 같이 따라 망할 게 뻔하다. 오래도록 반중, 혐중 정서가 유독 강한 한국에서 망설임없이 중국을 선택할 수 있을까? 6.25 우방국인 미국을 버리고? 만약 정부가 중국을 선택한다면 친중국가라며 국민들은 대시위를 벌일 것이고 아마 다음 대선 때 정권이 교체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렇다면 전 정권의 외교문제를 비판하며 승리한 다음 정권은 원론과 명분에 함몰될 수밖에 없다. 조선은 지금 우리가 중국을 싫어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진족을 가찮게 봤으며, 지금 우리가 미국에 의지하는 것보다 조선은 훨씬 더 크게 명나라에 의지하고 있었다. 인조와 서인정권을 변호해주는 말이 결코 아니다. 과거 역사의 실수를 보면서 그저 삿대질만 하며 능력적 우월감에 취해 정신승리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때의 사건이 지금 또 한 번 오버랩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만약 비슷한 외교구조가 현대에 나타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최선과 최악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편이 가장 중요하다.


눈오는 남한산성은 그래서 나에게 애잔한 정서로 가득하다. 추위와 불안과 두려움에 고립되어 있던 그때의 사람들이 곳곳에 깃들여 있다. 눈내린 등산은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한 번에 남한산성을 다 돌 순 없다. 물론 눈이 오지 않아도 남한산성 전체를 하루만에 돌아다니기가 쉽지만도 않다.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면 남한산성 행궁과 남문이 지화문, 그리고 지화문에서 서쪽 능선과 동쪽 능선 중 한 곳을 선정해 체력이 닿는 데까지 걸으면 된다. 남한산성의 경사가 가파르지 않아서 가벼운 운동으로는 제격이다. 또 한 곳, 서문 근처에 사진사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전망대가 있다. 잠실을 포함해 서울 시내를 굽어볼 수 있으며 특히 야경은 서울의 매력에 취하게 만든다. 가장 잘 보이는 롯데타워 저 바로 아래에 한때 제단이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곳에서 한눈에 조망하고 있는 이 서울엔 참 많은 이야기들이 누적되어 있다.



경기도자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한국의 우수한 자기 작품들, 화담숲의 붉은 단풍의 매력과, 서릿발 같은 차가움의 남한산성이 품은 애잔한 정념은 한 번 겪고 모든 걸 이해했다고 할 수 없는 미학들이다. 한 번에 느끼기엔 그 존재의 가치가 압도적이고 웅장하다. 화담숲과 남한산성의 경우 글의 재미와 여행의 양념을 위해 특정 계절을 콕 집어 소개했지만 그 외 계절에도 저마다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매력을 지녔기 때문에 한 계절만 보고 그곳의 가치를 완전히 만끽했다고도 할 수 없다. 따라서 광주는 그저 옛날옛적 물리적으로 넓기만 했던 곳이 아니다. 과거엔 행정의 중추기능을 담당하며 땅면적이 넓은 곳이었다면 오늘날 경기도 광주시의 넓음은 내적이고 정서적이고 예술적인 가치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너른 고을이 지닌 다양한 스펙트럼에 물씬 빠지기를 적극 권장한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박은숙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

우리는 조선백자의 우수함을 찬미하지만 백자가 생산되었던 과정과 백자를 구워냈던 장인들에 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박은숙 교수님의 <시장으로 나간 조선백자>는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에 설치되었던 국영도자공장 '분원'의 변천과정과 운영방식 등을 소개합니다. 조선의 역사 흐름에 맞추어 국가 정부가 어떻게 국영기업을 운영해왔고 조선 정부가 구한말 해체되는 과정에선 운영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아주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죠. 표면적으로는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기업이 어떤 외부적 환경에서 어떻게 변해가는지가 주된 내용이라 오히려 기업과 회사에 관련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생각보다 경기도 광주에서 분원이 차지하는 위상이 당시 광주 사람들에게 얼마나 컸는지도 가늠해볼 수 있죠.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사업진흥원에서 우수출판콘텐츠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

<오징어 게임>으로 대박을 치신 황동혁 감독님의 작품입니다. 황동혁 감독님은 이미 <수상한 그녀>라는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만든 작품이 <남한산성>입니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정부가 마지막 47일을 항전했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사극영화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삼았다기보단 김훈 작가의 소설 <남한산성>을 리메이크한 영화라 가공의 인물들이 꽤 나옵니다. 물론 소재 자체는 역사의 실제 사건이며 주요인물들은 전부 실존인물들입니다. 영화 <남한산성>은 이전 한국 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참신한 연출법으로도 화제가 되었죠. (특히 전투씬은 정말 놀랐습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명연기가 돋보입니다. 영화는 역사에 대한 주석이나 해설을 한다기보단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집중되어 있고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클로즈업은 그 효과를 배가시켜줍니다. 이 영화를 그저 옛날 역사 정도로 끝내버릴 순 없는 게 대한민국의 현 국제외교 현실을 투영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다소 푸석하고 딱딱한 정조가 있긴 하지만 영화의 내용과 짜임새는 깊고 진중하고 비장한, 그래서 많은 역덕들과 밀덕들이 환호하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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