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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un 04. 2022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전주 편]

전통의 풍치를 여행하다



















SNS가 점점 활발해지면서 SNS상을 플랫폼으로 급물살을 타고 인지도를 올린 관광지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한옥마을'의 명성으로 페이스북-인스타그램 세대에게 큰 사랑을 받은 전주다. SNS가 새로운 홍보 창구가 되어 국내의 아름다운 명소들을 불특정 다수에게 빠른 속도로 전파되는 일은 아주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급격하게 인기를 끌어 단기간 내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이 과도하게 몰리다보면 관광지가 품은 도시의 깊은 내력이 그 인지도에 가려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전주가 전북여행지의 중심지로 각인된 데에 SNS상의 홍보가 크게 이바지했지만 전주 역시 그 매력의 본질이 다소 명성에 가려져 관광객들에게 그 정성스러운 가치가 충분히 전달되지 못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디든 그렇겠지만 특히 전주는 배경지식이 수반될 때 더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오는 다소 어려운 여행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부족하나마 감히 이 글을 통해 조금이라도 전주 여행의 재미에 일조했으면 한다.


전주는 그 이름부터가 사랑스럽다. 전주의 원래 명칭은 '전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의 많은 지명들은 본디 순우리말로 전해지다가 행정상의 이유로 한자식 이름으로 개칭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원래 지명의 순우리말을 알게 되면 그 사랑스러움과 푸근함에 그토록 정겨울 수가 없다. 전주의 순우리말은 본디 '온고을'이었다. 순우리말 '온'은 숫자 '100'을 뜻하는 말로 의역한다면 '모두의' '전부의' 로 해석된다. '온고을'이란 굳이 풀이해보자면 '우리 모두의 마을' '우리 전체의 마을' 이라는, 참으로 훈훈한 마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단 순우리말을 표현할 수 있는 글자가 없던 삼국시대에 신라나 백제는 순우리말 발음과 최대한 비슷한 한자 '완()' 을 사용하여 '완주'라고 표기하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756년(경덕왕 15년)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하는 작업을 단행해 '온'이라는 순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한 '완()' 을 다시 훈차하여 '전주(全州)' 라는 지명에 이르렀다. 이 당시 '전주'는 오늘날의 전주에 국한되는 지명이 아닌 전국을 이루는 9주 중 하나로,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시 개념이 아니라 '도' 수준이었으며 지금의 전주시가 당시 전주의 행정중심지였다. 


통일신라 말 한반도는 후고구려, 후백제가 생기며 다시 세 나라로 찢어졌다. 이때 백제계승을 위시한 후백제의 시조 견훤은 전주에 수도를 삼았다. 견훤은 전라도 그중 지금의 광주광역시를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백제계승의식이 조금 더 짙었던 북쪽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긴 곳이 전주였다. 전주는 한 국가의 수도였을 만큼 그 위상이 아주 오래 전부터 남달랐던 곳이었고 행정도시로서의 내공이 여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아주 유구한 곳이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기거했던 왕궁은 터조차 남아있질 않다. 왕궁지를 두고 설들만 무성한데 인봉리 일대가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러나 왕궁의 흔적을 찾기란 전문가가 아니면 어렵다. 다만 전주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견훤' 관련 이름들로 그때를 반추할 수밖에 없다. 전주는 남쪽에 산들이 많고 위쪽으로는 평지가 대부분인데 남쪽 산들 중 남고산성과 동고산성은 견훤이 전주를 수도로 삼았을 당시 수도방위를 위해 새롭게 축조하거나 증축한 성들이기도 하다.


또 전주를 돌아다니다 보면 많이 보게 되는 단어가 '풍(豐)'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의 왕족은 전주 이씨이다. 고려 말 추후 조선을 건국하는 이성계가 아직 무인이었던 시절 왜구들을 대파한 '황산대첩'이라는 기념비적인 승리를 거둔 적이 있었다. 지리산 일대에서 왜구들을 토벌한 이성계는 돌아가는 과정에서 본인의 본관인 전주를 들르기로 하고 전주에서 집안 어른들께 인사드렸는데 이때 이성계의 승리를 기념하며 자신이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포부를 담긴 노래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노래가 '대풍가'인데 실제 역사적으로 봤을 때 아직까지 이성계가 나라를 건국하겠노라 마음을 다진 시점이 아니라 아마 일화 자체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애당초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발언은 역모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노래로 부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 '풍'이라는 단어가 한 국가를 세운 시조의 고향 내지 본관을 높이 부르는 단어라고 한다. 즉 '풍'이란 이곳 전주가 조선을 개국한 조선 왕실의 본관에 해당하는 도시임을 자부하는 상징적인 단어다. '풍남문' '풍패지관' '풍년제과' 등 일반 식당에서부터 평범한 가게에 이르기까지 전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은 전주의 자랑스러운 자의식을 뽐내고 있다.


전주에 대한 개괄적인 배경지식은 이쯤으로 하고, 이제 한곳 한곳을 돌아다니며 더 상세한 해설을 곁드려보겠다.



전주를 압축하다, 국립전주박물관

전주역에서 내리면 택시승강장에서 택시를 타자마자 처음 하는 말이 정해져 있다. "기사님 국립전주박물관으로 가주세요." 이렇게 말하면 늘 기사님들이 의아하게 되물어보신다. "박물관이요?" 아마 전주역에 오자마자 처음으로 가는 곳이 국립전주박물관이라고 말하는 손님은 별로 없나 보다. 


국립전주박물관 주차장에서 내리면 3~4분 가량 입구까지 걸어가야 한다. 입구까지 전북 곳곳에 흩어져 있던 고대시대 우리 조상들의 고대 무덤들을 이전해놓은 야외전시들을 관람하면서 걸으면 금방이다. 그렇게 입구 앞에서 계단 위를 걸으면 잘생기고 반듯한 한글서체로 쓰인 '국립전주박물관' 현판이 늠름하게 반겨준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상설전시관과 특별전시관으로 나뉜다. 특별전시관은 국립전주박물관의 공식홈페이지와 SNS채널을 통해 주기적으로 업데이트가 된다. 그러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의 얼굴은 상설전시관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의 상설전시는 역사실, 선비서예실, 전주와 조선왕실, 미술공예실 4 권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사실'은 비단 전주뿐 아니라 전주를 포함해 전북 전체의 역사를 시기순으로 그 유물을 통해 전시되어 있는 학술적인 공간이고, '선비서예실'은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의 서예를 감상하는 공간이며 '전주와 조선왕실'은 전주를 중점적으로 조선 왕실의 본관과 엮어 그 이모저모를 풀이해주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중 나를 가장 설레게 하고 내가 가장 추천하는 곳은 미술공예실이다. 국립전주박물관 홈페이지의 설명을 인용하자면 '미술공예실'은 "미술공예실은 진리와 일상을 예술로 끌어올린 아름다운 조형물을 전시한 공간입니다. 불교미술, 도자, 공예품을 보며 옛 사람들의 솜씨와 정신, 전라북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전라북도 도처에서 발굴된 불교미술품과 도자들 또한 수준급들이지만 내 발길은 내 마음을 아는지 가장 안쪽의 전주의 공예전시로 빠르게 향하고 있다. 공예전시에 서는 순간 빨랐던 내 발길은 급격하게 멈춘다.


전시되어 있는 공예전시품들은 대부분 특별할 게 없는 생활가구들이다. 아주 유명한 누군가가 사용했거나 제작한 마스터피스라기보단 우리네 조상들이 어떤 생활가구와 밀접하게 살아갔는가를 보여주는 일상형 공예의 개념이다. 따라서 이 공예전시는 보편적인 우리 한국인들의 멋과 품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평범하고 수수하고 화려하진 않지만 그 담백하고 섬세한 우리 조상들의 공예디자인 역량은 가히 어느 민족도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이다. 보는 이에 따라선 심심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외국에선 쉽게 접할 수 없는 미학의 디자인이며 우리 조상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런 정갈한 디자인을 지고의 아름다움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 한옥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좌식 문화인지라 사용하는 생활가구들이 높낮이가 다 앉은 키에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고 친구처럼 정겹고 편안하다. 전북대 주거환경학의 박선희 교수는 조선시대 한옥의 가구예술의 특징에 대해 '첫째 독창적인 면 분할과 질서미', '둘째 목재가 지닌 특성을 최대한 살린 의장적 표현과 조형성', '셋째 기능적인 디자인' 을 꼽았다. 대표적인 가구품은 장이다. 전주는 예부터 장 제작으로 유명하여 '전주장'이라고 전국적으로 알아주던 일종의 브랜드였다. 전주장의 미적 정수는 면 분할이다. 장이 아니더라도 그간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미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면 분할'을 이야기 해왔다. 장에서 볼 수 있는 규칙적이고 대칭적이면서도 서로 다른 크기의 면 구성은 보이는 이에게만 보이는 즐거움이다. 더불어 목재의 색감과 질감까지 그 개성을 최대한 살렸으며 따라서 언뜻 모든 장들이 다 비슷하게 생겨 보이겠지만 장마다 그 디자인이 조금씩 다르다. 전시되어 있는 장마다 경첩 장식이 어떻게 다른지 구별해보는 재미도 있다.



전주장 외에도 각종 합, 부채, 소반 등 다양한 생활가구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전시를 구경하다 보면 생활상에서 엿볼 수 있는 우리 전통 미의식이 어떠했는지를 가늠하게 해준다.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한 전통 미학의 공동체 속에 내가 있다는 게 뿌듯해진다. 이런 가구들이 어떤 식으로 배치되어 있었는지 옛 사랑방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구간이 있는데 '주련'이라고 집 대문 앞 기둥마다 한시의 좋은 글귀를 단 편액을 뒤로 정갈하고 한아하고 높은 선비 정신을 보여주는 사랑방의 모습은 인간적인 체취로 가득하다. 장, 농, 소반, 탁자, 문갑, 문방사우, 궤, 서안, 고비, 보료방석 등이 다 저마다 있어야 할 곳에 있는 듯한 감각적인 단순미의 정성은 오늘날의 현대미술에서도 높은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나와 입구 쪽으로 향하다보면 전주시립박물관이 있다. 국립전주박물관은 전북 전체를 관장한다면 전주시립박물관은 전주 자체에 집중하고 있는 역사관이다. 이곳을 갔다오고 안 오고는 확실히 앞으로 전주여행의 식견과 감동에 큰 차이를 만든다. 체력이 있다면 꼭 방문해보기를 추천한다. 




전주의 에너지, 콩나물국밥과 모주

국립전주박물관은 전주 시내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다. 다시 택시를 타고 전주시내로 들어오고 나니 어느덧 식사시간이 넘었다. 전주에선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우는 일이 어렵지 않다. 식상할 순 있지만 그렇다고 안 먹고 오자니 전주를 제대로 여행한 거 같지 않은 두 메뉴 콩나물국밥과 전주비빔밥. 박물관 구경하느라 지쳤기 때문에 원기충전을 위해 콩나물국밥부터 먹기로 한다. 전주의 맛있는 콩나물국밥집이야 많지만 가장 오래도록 명성을 유지해오는 양대산맥은 현대옥과 삼백집이다. 1979년 전주남부시장에서 시작한 현대옥은 현재는 전국적으로 체인화되어 전주 시내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1947년 무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에 시작한 삼백집은 하루에 300 그릇의 콩나물국밥만 판다며 붙여진 상호명으로 삼백집 역시 전국적으로 체인화되었으나 현대옥에 비핸 그 수가 적되 본점의 위상이 현대옥보다 더 큰 편이다. 보통 '삼백집' 하면 전주 중앙동에 있는 본점을 가리킨다.  전주의 콩나물국밥이 유명해진 계기는 국밥 자체보다는 '콩나물' 덕분이었다. 옛날부터 전주의 콩나물이 맛 좋기로 유명하였으나 현재에는 옛 전주의 콩나물 품종은 사실상 사라지다시피 하였고 그 네임드만 전해질 뿐이다. 그러나 '콩나물국밥'이 전주를 대표하고 있으니 세대교체라고 쯤 해두자. 비록 옛날 전주의 그 콩나물은 아니지만 삼백집과 현대옥 모두 전주만의 특색 콩나물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콩나물국밥과 떼래야 뗄 수 없는 환상의 짝꿍이 있으니 모주다. 모주는 막걸리 베이스에 계피, 생강, 대추, 감초, 인삼, 칡 등 8가지의 한약재와 흑설탕을 넣어 끌인 술이다. 모주의 어원은 광해군 당시 광해군의 계모 인목대비의 어머니가 직접 담근 술이라 하여 '대비모 주'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술을 하도 많이 마시는 아들의 건강을 위해 그 어미가 한약재와 막걸리를 함께 끓이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어느 쪽이든 '어머니'와 관련한 내용이다. 정확한 시작점을 알 수 없으나 최소 조선 후기 때는 문헌상에 종종 등장한다. 술이긴 하지만 도수가 2도밖에 되지 않으며 그 달짝지근함이 술이 아닌 음료수로 느껴진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아 전주 사람들에겐 해장술로도 많이 사랑받고 있고 달달하면서도 알싸한 향이 담백한 콩나물국밥과 어울려 그 깊이가 일품이다. 



풍패지관에서 전라감영, 풍남문까지

전주는 관광지들이 넓지 않은 범위에 몰려 있어서 여행 시 동선짜기가 수월한 편이다.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대부분 걸어서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정도다. 삼백집이 있는 중앙동에서 전주한옥마을 쪽으로 걷다 보면 길가에 큼지막한 옛 건물 하나가 시선을 끈다. 그리고 시원시원한 글씨로 '풍패지관'이라고 적힌 편액이 자신을 당차게 소개하고 있다. 풍패지관은 객사다. 객사란 쉽게 말해 조선시대판 초고급 호텔이다. 외국사신이나 왕실 종친 혹은 고위직 정치인이 공적인 업무로 특정 지역을 방문할 시 묵게 되는 호텔이다. 공적 업무 차 방문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주로 지방의 큰 도시들이었고 따라서 큰 도시마다 객사를 세워두었다. 당시 VIP들이 방문하기 때문에 객사의 규모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고 현재 남아 있는 객사들은 별로 되지 않으며 전주객사가 그 중 하나이다. 전주객사는 언제 처음 창건되었는지 기록이 없으나 조선 9대왕 성종 대에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전주는 왕실의 본관이기 때문에 '풍(豐)' 이란 한자를 사용해 풍패지관이라고 불렀다. 풍패는 중국 한 고조 유방의 고향인데 이로 인해 '풍패'가 왕실 본관 혹은 고향을 뜻하는 고유명사가 됐기 때문이다. 객사의 구조 오피스 기능을 하는 정가운데 정청 건물이 있고, 좌우로 숙소 기능을 하는 '익헌'이 있다. 전주의 풍패지관은 건물의 높이가 낮고 지붕의 크기는 커서 확실히 그 위엄이 남다르다. 단 자칫 지붕의 과중한 하중으로 인해 불안정해 보일 수 있지만 좌우로 익헌이 날개를 피듯 펼쳐 있어서 권위를 갖추면서도 부드럽고 단정한 모습까지도 취하고 있다. 대부분의 객사들이 그렇듯 일제강점기 때는 객사의 기능을 잃고 다른 업무용도로 쓰였다. 풍패지관 역시 좌우익헌이 소실되었으나 1999년 복원하였다.


잘생긴 풍패지관을 뒤로 하고 가까이에 있는 풍년제과에서 수제 초코파이로 당도 충전하고 커피 하나 테이크아웃 해 입가심을 하며 걸음의 심심함을 풀어본다. 풍패지관에서 안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보면 언뜻언뜻 비추는 전통기와의 지붕라인이 또 한 번 시선을 끈다. 가까이 가면 그 반질반질한 전통목조 건축의 나무재질이 혹시 한옥게스트하우스인가 하고 착각하게 된다. 이곳은 전라감영이다. 전라감영은 조선시대의 도청 건물이었다. 도청은 해당 도에서 가장 행정적으로 중요한 곳에 위치하는 법이다. 도에 딱 하나밖에 없는 도청소재지가 그 지역에 남다른 상징적 지위를 주는 셈이다. 조선시대 전라도의 도청 소재지가 전주에 있다는 것만 봐도 전주의 행정적 위상을 대변해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곳 전라감영 안에는 방문객들이 많지 않다. 누가 봐도 깔끔한 외관으로 인해 전통건물이라고 생각이 안 된다. 전라감영은 태조 이성계 때 만들어져 일제강점기 때도 그대로 도청으로 활용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되었고 2020년이 되어서야 복원이 끝났다. 복원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외관이 이토록 깔끔했던 것이었다. 전라감영 담벽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본래 모습이 흑백사진으로나마 소개되고 있다. 지금은 우후죽순 새로 생긴 건물들로 가려져 있지만 사진 속 당시 모습을 보면 이곳 전라감영에서 전주성의 대문 풍남문이 육안으로 보였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흑백사진처럼 전라감영에서 쭉 앞으로만 곧장 가면 전주성의 대문 풍남문을 볼 수 있다. 풍남문은 비유하자면 전주의 숭례문이다. 전주 같이 큰 도시들엔 도심부에 성을 둘러쌓았고 동서남북으로 큰 대문들을 두었다. 한양도성에 숭례문, 흥인지문, 돈의문, 홍지문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런 큰 도시들의 성벽들은 일제강점기 시절 도로를 정비해야 하느라 모조리 훼손되었다. 대문들마저도 몇 개만 남고 철거되었고 전주성의 경우 대문인 풍남만만 살아남았다. 전주는 전라도 전체를 관할하는 지역이었던 만큼 전주성의 대문 풍남문은 비단 전주 한 고을만의 대문은 아니었다. 전라도 전체의 문이나 다름없었고 현판도 '호남제일문'이라고 걸려있다. 풍남문은 일제강점기 때 살아남긴 했지만 그 원형은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고 지금의 호남문은 1978년 몇 년 간의 복원과정을 거친 모습이다. 풍남문을 보면 지리적 상징성도 상징성이지만 내 상상력을 가장 자극하는 사건은 바로 동학농민운동 때의 모습이다. 지금의 전북 정읍에서 궐기한 동학농민군은 조선 관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며 사또들이 버리고 도망친 이 전주성에 무혈입성했다. 그때 통과한 문이 바로 이 풍남문이었다. 전라도의 가장 중요한 곳을 장악했을 당시 동학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 문을 통과했을 동학군의 모습과 함성을, 그리고 그때 동학군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상상해본다. 민중의 힘으로 정말 이 세상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었으면서도 반신반의 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꿈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생기면 벅찬 감정에 상황을 받아드리기 힘들 듯 말이다. 그리고 실제 세상이 바뀌는 순간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정부는 동학군을 진압하기보단 동학군과 적당히 합의를 맺어 그들을 달래고 해산시킬 계획이었다. 동학군 역시 전봉준 등의 수뇌부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으로 상륙하려고 하자 외세의 침투에 명분조차 줄 수 없어서 해산하는 쪽을 택했다. 그렇게 정부와 민중 사이에서 민중의 요구대로 민중의 바람이 승인되었다. 이 전주화약에서 신분제 폐지, 토지제도 개혁, 조혼 금지 등 각종 전근대적 악습들이 모조리 폐지되었다. 새로운 세상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었으며 이 시작지가 전주였다는 것은 전주 역사에 있어서 굉장히 자랑스러운 과거 중 하나이다. 전주화약안을 실행하기 위해 정부는 교정청을, 동학군은 호남 곳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한다. 전근대적 불합리한 관습을 뚫고 마침내 한국에서도 민중이 자신의 뜻을 사회에 관철시킬 수 있는 민중들의 자치기구가 들어선 것이다.

집강소 모형복원

 그러나 전주화약은 끝에 가서 실패했다. 경복궁을 무단으로 점령한 일본군이 교정청을 해체하고 집강소의 존재도 부정했다. 그렇게 전주화약에서 결정된 12가지 폐정개혁안들은 전면 백지화되었다. 신분제 폐지 등 근대적 해방은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이행되었고 그렇게 우리의 근대화는 반쪽짜리 근대화로 남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동학농민운동과 집강소라는 우리 민중들의 자주적 노력이 선행되었다는 역사가 위로가 되어주고 지금의 풍남문이 그 위로를 간직하고 있다.  



남부시장과 피순대

전라도는 음식 맛있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오죽하면 전라도에서 맛집 찾는 방법은 내가 배고플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식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전라도가 음식으로 소문난 배경엔 전라도 면적의 대부분이 평야지대로 한반도의 곡창지대이고 풍부한 쌀 덕에 반찬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라는 생활사적인 이유가 있다. 전라도의 맛있는 음식은 한식에 국한되어 있고, '한 상 차림' 이라고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의 밑반찬들이 나오는 독특한 식문화가 생겼다. 처음 주문을 하면 그때의 상황에 따라 정해지지 않은 반찬들이 나오고 추가 주문하는 형태이다. 경남에서는 실비 혹은 다찌라고 부르지만 실비와 다찌는 해산물이 쉽게 잡히는 바닷가 마을에서 다양한 해산물을 접할 수 있도록 생겨난 것이고, 전라도의 '한 상 차림' 문화는 품종 좋고 질기고 찰진 우리의 흰 쌀 밥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기 위해 만들어진 전라도만의 개성어린 식문화다. 이 상차림에는 생면부지의 지나가는 나그네에게도 따뜻한 밥 한 공기 대접하려 했던 훈훈한 과거 우리네 풍속의 흔적이 담겨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상차림은 비단 배만 채울 뿐 아니라 여행객에게 흰 쌀밥과 양념 잘 배인 반찬 만큼이나 가슴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기분을 좋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전주뿐 아니라 전라도 어디든 방문을 하면 이 한 상 차림을 놓치고 올 수가 없다. 전라도 중에서도 대도시 위주로 더 큰 상차림 집이 분포해 있어서 전주를 방문할 땐 더더욱 한 상 차림집을 찾게 된다. 첫째날 밤도 푸짐한 상차림 대접을 받으며 모주에 막걸리 거나하게 배를 채운 상태로 숙소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숙소는 일부러 남부시장 근처에 잡는다. 첫째날 과음할 걸 알고 미리 해장할 음식을 찾아두었기 때문이다. 과음을 했지만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고 남부시장으로 들어가 '조점례남문피순대' 를 찾는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들이나 택시 기사님들께 전주에 와서 꼭 먹어봐야 하는 식당을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이 피순대집을 이야기해주신다.  친구들에게 한국인의 소울푸드를 묻는다면 순대가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때 순대를 이야기하면 모두가 격한 공감에 탄식소리가 나온다. 토종순대는 우리나라 각 지방별로 상이하다. 예전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속초 편]에서는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를 이야기한 적이 있고, 이번 전주 편에서는 피순대를 소개할 예정이다. 전주의 피순대는 속초의 아바이순대처럼 돼지 대창을 사용하고 마찬가지로 선지가 들어가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선지가 가장 메인이다. 아바이순대보다 훨씬 더 선지의 양이 많이 들어가 전국의 모든 순대들 중 그 식감이 가장 쫄깃하고 향이 강렬하다. 찾아보니 피순대의 영어명칭이 Blood Sausage 라더라. 이중 남부시장의 '조점례남문피순대'는 1972년 개업한 남부시장의 터줏대감으로 다행히 아침일찍 들어와 바로 먹을 수 있었지 저녁시간대에는 웨이팅이 필수다. 


피순대만큼이나 전주에서는 이 남부시장을 주목해야 한다. 전주의 유명한 식당과 맛난 음식들이 대부분 이 남부시장에서 태어났으니 전주의 어머니 같은 곳이다. 남부시장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조선시대부터 지금의 남부시장 자리에 상권이 조성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15개의 시장 중 하나였다. 남부시장 앞에 풍남문이 떡하고 자리하고 있으니 조선시대에 이 시장은 읍성 밖에 있던 시장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남부시장 외에도 여러 시장들이 읍성에 분포하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전라도 경제의 중심이 전남의 경우 목포로, 전북의 경우 군산으로 이동하면서 전주의 상세가 많이 위축되었고 일제는 전주 내 모든 시장들을 남부시장 하나로 일원화했고 '남부시장'이란 명칭도 풍남문 쪽에 있다고 하여 이때 생긴 이름이다. 해방 후 남부시장은 전주의 유일한 전통시장으로 그 위상의 명맥을 이어왔지만 90년대 이후로 소비수준이 올라가며 전국의 전통시장이 위기를 겪었으나 2000년대부터 청년몰을 열어 청년들의 창업과 상생하며 새로운 모습의 전통시장으로 탈바꿈하였다. 덕분에 여러 세대들이 남부시장에 몰리는 진풍경을 구경할 수 있으며 청년몰에는 놀거리 먹거리 투성이다. 간단하게 혼자서도 낮술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전주의 랜드마크, 전동성당

전주의 랜드마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마 많이들 한옥마을을 언급하리라 예상하지만, '어떤 지역을 식별하는 목표물'이란 사전적 정의대로라면 전동성당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전주 한옥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마치 이제부터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시작임을 알리는 전동성당은 전주의 관광지들 중 가장 높기 때문에 가는 길 내내 스카이라인 위로 언뜻언뜻 비추고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 두고 횡단보도에 있을 때 절반가량 보이는 전동성당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며, 전동성당 입구 안으로 들어가면 그 위풍당당함에 압도되는 느낌이 있다. 전동성당은 여느 고딕양식으로 통일되어 있는 타지역 성당들과 살짝 다르다. 기본적으론 수직성을 강조한 고딕양식이라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처럼 벽면이 두껍고 돔을 활용해서 이국적이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나는 십자가의 크기와 부피감을 최소화하고 돔으로 대체했다는 건축적 발상이 가장 인상적이다. 벽돌의 색깔 또한 다른 성당과 달리 주황빛의 밝은 색을 띄고 있어서, 주황색-회빛색-돌과 지붕의 청녹색의 조합이 산뜻한 이미지를 살려준다. 성당 옆 예수상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어서 푸근한 마음마저 든다. 


전동성당의 설립경위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박해 사건인 '신유박해' 이른바 '진산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때는 조선의 22대왕 정조 재위 15년째이던 1791년. 지금은 충청도지만 과거에는 전라도였던 진산에 살고 있던 사대부 양반 겸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모친상을 당하곤 제사를 지내지 않은 채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제사를 효의 상징으로 여기던 당시 조선의 유교 성리학 사회에서는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웠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불효는 반역만큼이나 중죄로 다스렸던 조선이었기에 두 사람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윤지충이 정약용과 외가 친척지간이라 화는 정조의 측근이었던 정약용에게까지 번졌던 나름 큰 사건이었다. 이때 윤지충과 권상연이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형되었다고 하는데, 이후 1889년 프랑스 보드네 신부가 인근 부지를 매입했고 1914년 프와넬 신부가 성당 공사를 단행해 전동성당이 태어났다. 이토록 전동성당은 일제 때부터 지금까지도 전북 천주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도 많은 관광개들이 찾는 성지가 되기도 했다. 전동성당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는 한옥마을 조망소로 올라가 한옥마을을 굽어볼 때 멀리 보이는 성당 돔의 스카이라인이다. 나도 어지간히 성당의 돔에 빠졌나 보다.


조선 왕실의 본향, 경기전과 전주사고

전동성당 건너편에는 경기전이 있다. 역시나 사람들이 운집해 있다. 왕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어진'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27명 왕들 중 현재 태조 이성계, 영조, 정조, 고종, 순종의 어진만이 온전하게 남아있다. 조선은 왕의 어진을 귀하게 여겨 잘 보관해두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소실되어버렸고 여타 왕들은 그 흔적을 찾아 새롭게 복원하였다. 거의 모든 어진 진품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혹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이지만 유일하게 태조 이성계의 어진 진품이 소장된 곳이 조선왕실 전주 이씨의 본관이 전주고, 그중에서도 바로 이 경기전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조선시대 내내 26점이 있고 각기 다른 지역에서 관리했으나 지금 남아 전해지는 것이 전주의 그것이 유일하다. 국보 317호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경기전의 정전에 모셔져 있다. 사극에 익숙한 사람들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고 왜 왕의 옷 곤룡포가 빨간색이 아니라 파란색인지를 두고 의아할 것이다. 사극에 등장하는 붉은 곤룡포는 4대왕 세종대왕부터 입기 시작했으며 이전에는 모두 파란색 곤룡포를 착용했다. 그러나 이걸 무지의 소산이라 생각해서 부끄러워할 일이 전혀 없다. 붉은 곤룡포가 당연시되던 조선후기에도 일부 왕들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고 어째서 파란색인지를 신하들에게 종종 물어봤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 속 모습은 말년의 모습으로 비록 수염과 머리가 희게 물들어가지만 여전히 그 기골이 늠름하다. 확실히 한 세상을 호령한 최고의 무장 출신답다. 상상도가 아니냐고 물을 수 있지만 아니다.동양의 그림 전통은 초상화를 그릴 때 작은 부분까지 리얼하게 그리는 것이 미덕이었고 이 어진의 얼굴이 실제 태조 이성계의 얼굴을 그대로 본땄다고 생각하면 된다. 정전에 모셔져 있는 어진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경기전 내 어진박물관에서 문화재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보관 중이다. 3대왕 태종 이방원 대 아버지 이성계의 어진을 각각 전주, 평양, 경주, 개성, 영흥에 모시고 그 사당을 세웠는데 4대 세종이 각각의 사당에 명칭을 붙여주었다. 이때 전주의 사당을 '경기전'이라고 하였다.


정전의 뒤를 돌아 어진박물관을 보고 나오면 사당처럼 보이는 전통가옥들이 보인다. 조경묘라고 태조 이성계의 조상들,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신 사당이다. 원래는 사당묘도 없었으나 조선후기 21대왕 영조 대에 전주 이씨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의 필요성이 거론되어 영조는 경기전 내 조경묘를 마련하였다. 이 조경묘 앞으로는 넓은 공터가 나오고 키 큰 대나무들이 바람에 날려 흔들리는 모습이 운치 있어서 마침 돌아다니느라 피곤한 관광객들이 발도 쉬고 사진도 찍는 곳이다. 이곳이 공터인 이유는 본디 경기전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의해 정전과 조경묘만 두고 모두 헐렸기 때문이다. 


공터 안쪽으로 들어오면 작지만 높이 떠 있는 독특한 건물 한 채를 볼 수 있다. 규모는 작아보이지만 그 역사적 상징성만큼은 어쩌면 이 전주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다. 바로 전주사고다. 사고란 실록을 보관해둔 곳으로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출처 <조선왕조실록>을 아주 오래도록 지켜주고 품어주었던 창고다.


조선은 기록의 중요성을 유독 강조했다. 500년간 단 한 번의 쉼없이 모든 왕들의 하루하루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집념, 왕은 열람할 수 없다는 공정성, 내용의 방대함, 원본 그대로 남아 있다는 역사적 희소성을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으며 지면수만으로 계산할 때 세계에서 가장 분량이 많은 역사서이다. 국왕들은 실록을 작성하는 사관들을 대단히 부담스러워 했으며 한 번은 태종 이방원이 민망한 일이 있어 이 기사는 싣지 말라고 지시하자 사관은 '왕이 싣지 말라 하였다'는 말까지 실을 정도로 그 집념만은 가히 경이로운 수준이다. 실록은 당시에도 소중한 자산이었기에 그 복사본까지 철저하게 관리했으며 원본은 수도 한양에, 그리고 충주, 전주, 성주 세 곳에 사고를 두어 총 4곳에서 실록을 보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전주사고를 제외한 나머지 3곳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실록 전체가 다 날아가버렸다. 유일하게 남아 원본이 된 전주사고의 실록을 토대로 다시 복사본을 만들어 전주사고 원본은 다시 한양에 두고 강화도, 평안도 묘향산, 강원도 태백산과 오대산 총 5군데에 사고를 두어 보관하였다. 이중 묘향산 사고본은 추후 무조의 적상산으로 옮겨갔다가 부간에 보관 중이고, 한양 사고본과 오대산 사고본은 소실되었으며 강화도와 태백산 사고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 중이다.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위상을 보자니 기록의 가치와 대중적 파급력에 대해 새삼 고민하게 한다. 일전 다큐멘터리 감독님들과 프로듀서님들과의 술자리에서 "다큐멘터리는 결국 기록할 소재의 참신함과 파급력이 중요한 거 같아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때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와 <기억의 전쟁>을 제작한 조소나 피디님이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다큐멘터리는 기록하는 작가의 윤리와 태도가 제일 중요해요." 500년간 모든 것을 기록하려고 했던 조선의 사관들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한다. 



전주한옥마을!

드디어 한옥마을이다. 어디를 돌아다니기 귀찮고 동선을 최소화하는 여행스타일인 사람들은 하루 날잡고 한옥마을에만 있어도 될 정도로 이곳은 즐길거리 풍년이다. 계획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이고, 여행 떠나기 전 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지만 전주 한옥마을만큼은 맛집, 전통찻집 등 미리 찾아보고 오기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워낙에 식당과 카페, 찻집이 많다 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가급적 많은 곳을 맛보고 사진찍고 추억을 남기려면 어디어디가 괜찮고 가보고 싶은 곳인지 알아두고 가야 후회가 없다. 나는 전주한옥마을을 갈 때마다 반드시 바이크를 탄다. 바이크에 일행을 태우고 전주한옥마을 이곳저곳을 누비며 중간에 내려 목도 축이고 시장도 하고 전주한옥을의 탄생배경부터 이모저모까지 나름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전주한옥마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성되었다. 한옥마을 치고는 역사가 상당히 짧은 편이다. 전주읍성 내 전주의 도심은 구한말부터 일제에 이르러 일본인 내지 친일자산가들이 물밀듯 들어오며 원래 이곳에 살던 조선인 백성들은 마치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쫓겨나듯 터전을 잃고 전주의 도심은 일식가옥들로 가득차게 된다. 이곳이 오늘날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는 '전주영화의 거리'의 중앙동 일대다. 실제 영화의 거리를 걷다 보면 신식을 제외하곤 상가 건물들이 높지 않은 2층짜리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일제 때부터 형성된 일식 2층 가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쫓겨난 조선인 백성들은 성문 밖 외진 곳에 새롭게 마을을 일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자리 잡은 곳은 물을 쉽게 구할 수 있는 전주천 일대였고 이것이 전주한옥마을의 시작이었다. 일제 입장에선 조선인들끼리 조성한 마을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고 이 한옥마을을 굽어볼 수 있는 곳에 경찰서를 따로 만드는데 그곳이 오목대다. 


한옥마을을 들어서면 동서로 권역이 구분된다. 전동성당이 있는 쪽과 경기전이 있는 쪽 사이로 큰 대로변이 나 있고 이 길이 유일하게 차량이 진입할 수 있는 나름 한옥마을의 심이 되어주는 길이다. 이 길이 과거 전주읍성 성벽이었다. 따라서 경기전 쪽 권역은 과거에 성 안에 있는 곳이었으며, 전동성당 쪽 권역은 성 밖의 영역이었다. 한옥마을이라고 다 똑같은 곳이 아니다. 물론 대로변에 즐비해있는 상가건물들은 최근에서야 새롭게 만들어진 곳이고, 바이크를 타고 전동성당 방면으로 전주천이 나올 때까지 쭉 들어가면 점점 인적이 한산해지고 사람의 발길이 없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이 주거지역이기 때문에 상권이 많이 약하기 때문이다. 즉 전주천을 마주하고 있는, 인적 드문 일대가 전주한옥마을의 본모습이고 발상지이다. 




개인적으로 전주한옥마을 중 가장 안온하고 아름다운 곳이며 데려간 일행들도 이 전주천과 청연루 일대가 가장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다시 바이크를 타고 상권의 중심부가 되는 곳으로 나온 뒤 이번에는 경기전 쪽 권역의 한옥마을 일대를 누벼보기로 한다. 전동성당 쪽 권역은 안쪽으로 들어갈 수록 사람의 발길이 줄어들지만 경기전 쪽 권역은 아무리 들어가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길 생각을 안 한다. 상권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원래 전주천 방면에 집중되어 있던 전주한옥마을은 그 규모와 상권을 점점 넓혀가다 성벽이 허물어진 자리를 넘어서 한옥마을 주차장이 있는 곳까지 확장되었고, 경기전 쪽 권역은 전통적인 한옥마을이라기보단 '한옥'이라는 컨셉으로 최근들어 조성되었다고 보면 된다. 전주한옥마을의 상업적 기능이 대폭 강화되면서 현재의 한옥구조는 대부분은 관광지적 성격에 맞게 새단장한 모습들이다. 그나마 원래의 모습을 보고 싶으면 전주천 방면으로 한옥마을 안쪽까지 들어와야 한다. 남부한옥의 일반양식인 일자(一)형 모습을 갖고 있는 찻집 혹은 게스트하우스들도 종종 있기도 하지만 일부러 찾으러 다니지 않는 이상 쉽게 발견하긴 어렵다.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다 내 구미를 확 잡아당기는 현판을 발견했다. '전주전통술박물관' 일단 바이크를 멈추고 안에 들어가보았다. 애주가라면 전주의 '이강주'를 모를 리 없다. 이강주는 배와 생강으로 빚은 전통증류주로 제조에 들어가는 재료 울금이 한때 전라도에서 임금께 진상할 정도로 품질이 좋아 자연스레 전라도에서 이강주 제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조광조를 배출한 한양 조씨 가문이 대대로 전주에서 이강주를 빚어왔는데 배와 생강 외에도 울금, 쌀, 계피, 누룩, 꿀 등을 첨가하고 기본적으로 6개월을 숙성시키고 종류에 따라 1년~3년까지 추가적으로 숙성시키기도 한단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박정희 3공 당시 1965년 양곡관리법에 따라 쌀로 증류주를 제조하는 주조가 금지되면서 많은 전통증류주들이 그 맥이 끊겼다. 1988년 이후로 전통증류주에 대한 관심이 치솟았고 관과 명인들의 활약에 의해 일부 전통증류주들이 맥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이강주의 경우도 처음 전주 땅에서 이강주를 빚어 먹었던 한양 조씨의 조정형 명인이 이강주 복원에 앞장 섰고 1996년 농식품부 식품명인 9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박물관 매장에서 이강주를 기념으로 사고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오늘도 지친 몸을 이끌고 숙소에서 쉬려고 하는데 일행들이 다함께 모여 있다고 가맥집으로 오란다. 전주에 오면서 가맥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마터면 가맥집을 놓칠 뻔 했다. 서울에선 일부러 어렵게 찾아가야하는 가맥집이 전주에는 널리고 널렸다. 가맥집은 '가게맥주'의 줄인말로 80년대부터 낮에는 슈퍼가게로, 밤에는 술집으로 운영하는 형태의 가게를 말하는데 나중에서야 이 시초가 전주라는 걸 알았다. 슈퍼와 술가게를 병행하고 있기 때문에 과자들을 편하게 가져와 소소한 안주거리로 먹을 수도 있고, 반건조 생선이나 오징어, 집에서 먹는 거 같은 계란말이와 퍽퍽한 통닭 등 저렴한 안주를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내 술스타일과 아주 똑 맞는 가게라 분명 어제 과음했단 사실도 잊은 채 이틀 연속을 연거푸 마신다. 기념품으로 산 이강주를 꺼내는 게 아니었어...



음식을 디자인하는 전주비빔밥

다음날 아침 어제 과음한 일행들을 억지로 깨워다 부른다. 뜨끈한 국물로 해장하자는 골골대는 일행들을 억지로 데려다 향한 곳은 전주비빔밥 집이다. 전주에는 어디 한 곳 콕 집기 힘든 만큼 전주비빔밥 맛집이 상당히 많다. 조금만 찾아봐도 맛집들을 알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성미당 집을 가장 좋아한다. 성미당은 휴일이 있어서 때를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일행들을 데려온 것이다. 


회의적이었던 처음 반응과는 달리 각자의 비빔밥들이 나오자 밑반찬에 수저 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연일 이곳에 오길 잘 했다 칭찬남발이다. 모든 반찬들이 다 꼭 여기 있어야 할 것만 같지만 그중에서 숟가락이 가장 많이 닿는 반찬은 황포묵이다. 치자물을 섞어 쑤었기 때문에 노란 황금빛이 나는 황포묵은 전북 향토음식이기에 우리 같은 서울 출신들에겐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호기심 반 맛있음 반으로 가장 인기 많은 반찬이다. 이때 다들 각자의 비빔밥 그릇에 이미 황포묵이 있어 아까부터 먹고 있었다는 말을 하자 다들 유심히 저마다의 비빔밥 그릇을 보더니 정말로 노란 황포묵을 있는 걸 확인하고 놀란다. 전주비빔밥의 시그니처가 바로 이 황포묵이다. 비빔밥은 어느 한 지역 고유의 음식이라고 할 수 없다. 냉장고를 열면 안에 있는 음식들을 죄다 섞어 비벼먹는 욕구가 치솟는 것처럼 여러 재료의 음식들과 밥을 함께 비벼 먹는 식문화는 어디서나 누구나 쉽게 생각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중 전주의 비빔밥이 유독 이름을 날린 이유는 다른 지역에선 넣지 않는 황포묵을 고명으로 올리기 때문이다. 고작 황포묵 하나로 전주비빔밥이 전국의 비빔밥을 제패할 수 있었나 회의할 수도 있다. 황포묵의 맛보다는 멋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된다.


전주비빔밥을 주문하고 내 앞에 나오면 형형색색의 음식 디자인에서부터 이미 눈이 즐겁다. 전주비빔밥은 전국의 모든 비빔밥들 중 가장 예쁜 비빔밥이다. 음식의 비주얼이 음식의 맛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이 비주얼 디자인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재료가 노란 빛을 띠는 황포묵이고, 정가운데 샣노란 빛을 반사하는 날달걀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날달걀 또한 전주비빔밥의 시그니처 중 하나이고 말이다. 다양한 색깔의 기타 나물들, 새빨간 선명도를 높여주는 고추장까지 그리고 빠져서는 안 될 질소하고 단아하면서 고급스러운 떼깔을 만들어주는 놋그릇까지 색의 조합이 완벽하리만큼 이상적이다. 우리의 한식 중에서 가장 예쁜 음식은 비빔밥이라는 내 견해는 아직까지는 깨지지 않았다.



전주국제영화제의 Film Goes On

언젠가부터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면 늘 전주를 갈 일이 생긴다.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 우리나라 영화제의 양대산맥으로 한국예술영화계를 지탱하고 있는 전주국제영화제가 열리기 때문이다. 영화제 시즌이 되면 노란색 옷을 입은 지프지기 자원활동가들과 저마다 뱃지를 건 영화인들, 그리고 영화를 즐기러 온 관객들로 전주영화의 거리는 예술적 기운으로 가득찬 북새통을 이룬다. 전주중앙극장, 백도극장, 제일극장, 현대극장 등 전주에는 옛날부터 여러 극장들이 집중분포해 있던 영화의 도시였다. 한국영화의 흐름과 유행이 크게 뒤바뀔 준비를 하던 20세기와 21세기 분기점에서 전주시의 도움과 일부 영화인들의 주도로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가 공식적으로 시작해 어느덧 20주년을 넘어섰다. 영화 자체의 예술적 미학을 탐구하는 노력이 여실히 빛나는 프로그램 라인업들과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들을 소개해주는 섹션들, 이른바 '전주시네마펀드'라고 불리는 독립영화 제작지원 및 수입, 배급까지 아우르며 대체될 수 없는 한국의 아주 중요한 영화제가 되어 매년 5월이면 전국의 많은 영화팬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화제라는 행사가 개최하는데 있어 여러 애로사항들이 많지만 한국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추세에 힘입어 영화계를 한층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영화제의 노력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전주에 대해 오래도록 행정적으로 큰 규모의 도시였다는 가치만을 부각한 듯 하지만, 전주의 매력은 넓은 스펙트럼의 문화예술을 품은 '문기 가득한 고장'에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수 백 년의 내공이 축적된 전통공예예술부터 한옥마을, 경기전, 전동성당의 건축적 예술 그리고 영화 예술을 소개해주는 5월의 영화제까지 심지어 전주의 그 수많은 개성어린 음식들조차 내게는 하나의 예술로 다가온다. 그래서 전주를 떠나 서울로 오는 기차에선 그 어떤 지역을 돌아다녔을 때보다 예술적 감수성으로 충만해진다. 그만큼 전주여행이 쉽지만은 않은 곳이다. 물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전주를 돌아다녀도 '전통'이라는 아름다움에 충분히 취해갈 순 있지만 글 처음에도 말했듯이 깊은 내력을 간직하고 있는 전주는 알면 알수록 그 매력에 더 심취할 수가 있다. 


'전주'라는 도시가 기품 넘치는 예술의 도시가 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키워드는 '진심'과 '자신감'이다. 예술을 대하는 창작자들의 진심이 정성스러운 창작의 결과를 내고 그 예술품을 역시 진심어린 마음을 갖는 관람자와 진득한 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진심은 전주예술이 구축해두었던 오랜 시간에 대한 자신감에서 배태된다. 유형의 물체가 그저 오래 이어져내려오기만 했다고 최고가치의 기준이 될 순 없지만 그 안에 담겨진 자기만의 일을 묵묵히 해온 나날의 노력과 직업정신의 곡진한 태도가 오래 이어져내려왔기에 전주는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전주는 (...) 인구가 매우 많고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이 옛 나라다운 풍치가 있다. 때문에 그 고을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도 모두 의관을 차려입은 선비들 같이 행동거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볼만한 것이 있다."  - 이규보, <남행월일기>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전봉희, 권용찬 <한옥과 한국 주택의 역사>

저자 두 분 모두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출신으로 '한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책입니다. '한옥'은 직역하자면 한국인들의 집이라는 뜻일 텐데, 통상적으로는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집 전체를 가리키죠. 그러나 '한옥'이란 용어 자체는 개화기 서양식 양옥의 들어오며 이를 구분하기 위해 생겨난 용어입니다. 이전까지 우리 조상들의 가옥 형태도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천차만별이었고 '한옥'의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죠. <한옥과 한국 주택의 역사>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선사시대부터 고대시대, 고려와 조선의 중세시대, 조선후기를 거쳐 격변의 20세기 그리고 현대 아파트 문화에 이르기까지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물론 한옥의 본질을 찾는 여로에 맞추어 풀어가는 책입니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2000년 역사의 한옥의 특질들이 압축적으로 소개되고 있으며 한옥과 우리 한국인의 주택 사이의 상관성 그리고 향후 우리 주택의 흐름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분석까지도 제시되어 있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

가장 한국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영화를 만들어오신 대가 임권택 감독의 2011년작인 동시에 무려 101번째 작품입니다. 워나 거장 감독님에 명작 필모그라피도 화려하신 분이라 <달빛 길어올리기>에서 실망한 팬들도 많지만 전주와 가장 어울리는 영화임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합니다. 박훈정 배우님이 맡은 '필용'은 만년 7급 공무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상사의 추천으로 전주시의 '한지'를 홍보하고 복원하는 사업을 담당합니다. 한지에 대한 연구가 한창인 와중에 한지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지원'과 만나 한지 사업에 동참합니다. 위에서 말씀 못한 전주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바로 한지입니다. 조선시대 때 한지를 진상할 정도로 전주의 한지전통문화도 내력이 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드라마 속에서 함께 풀어내는 한지의 우수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임권택 감독 특유의 서정적인 미쟝센 덕에 눈호강까지 만족할 수 있죠. 영화를 보시면서 영화제목 '달빛'이 무엇의 은유인지, 왜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을 '길어오른다'고 표현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얼마 전 별세한 강수연 배우님의 명연기를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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