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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ul 16. 2022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의정부-양주 편]

산과 땅과 대지의 체온을 여행하다

서울에서 가장 멋진 산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망설임없이 북한산을 꼽곤 한다. 전국 단위로 가도 그 잘생기고 늠름한 외관이 결코 뒤지지 않은 북한산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듬직하게 지켜주고 있는 자랑거리다. 높이가 험준한 만큼 높진 않다지만 그럼에도 빼곡한 나무들로 치장한 거친 살결의 돌봉우리들이 넓게 퍼져 있어서 여러 행정구역들을 아우르고 있다. 정면에는 서울의 은평구, 서대문구, 종로구, 성북구, 강북구를, 좌우에는 경기도 고양시와 의정부시를, 그리고 뒤에는 양주시를 등지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산을 돌아가야 해서 소요시간이 많이 걸리는 곳들이지만 인간의 시선이 아닌 자연의 관점에서는 모두 북한산을 터전으로 엮이는 하나의 문화생활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경기도 북부를 여행할 때는 북한산의 품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나에겐 여행컨셉을 정하는 기준점이 된다. 


군 부대, 부대찌개 등으로 유명한 의정부는 멋진 산으로 둘러싸인 수려한 도시다. 의정부는 군사적 기능을 담당하던 서울의 위성도시였으나 점차 군사적 기능은 줄어드는 추세다. 또한 경기도 북부 행정의 중심이 의정부이기도 하다. 경기도의 주요 부처 제2청사들이 의정부에 밀집해 있기 때문이다. 경기도의 행정적 기능이 다소 경기남부에 치우쳐 있는 현상을 방지하고 경기도 남북부의 균형있는 행정 역할을 의정부시가 도맡아 하고 있다. 양주는 경기도의 북부도시들 중 가장 역사적으로 내력이 깊은 곳이다. 한때 북한산 권역의 모든 행정구역들이 양주시 안에 있기도 했으며 고려시대 5도 중 하나였던 '양광도'가 북쪽의 '양주'와 남쪽의 '광주'의 앞글자를 따왔을 정도였다. 고려의 8대왕 현종이 이 고을에 버들나무가 많이 난다고 하여 직접 '양주'라는 지역명칭을 붙여줬다는 푸릇한 일화도 전해진다.




의정부는 왜 의정부일까?

보통 '~주', '~산', '~천', '~양' 등으로 끝나는 일반적인 행정명칭 가운데 '의정부'라는 지명은 다른 선례가 없는 독특한 이름이다. 우리가 따로 알고 있는 '의정부'는 옛 조선시대에 삼정승, 이른바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이 일하던 관청이었다. 과연 의정부시는 과거의 의정부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조선의 3대 태종 이방원은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올라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 이방원이 왕으로 등극하자 이성계는 이방원의 왕위 즉위를 마땅치 않게 여겨 고향이었던 함흥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이성계가 옥새를 가지고 있었던 것. 아비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옥새도 없는 왕은 완벽한 국왕이라고 할 수 없었기에 이방원은 함흥에 사람을 보내 이성계더러 한양으로 돌아와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성계는 계속 거절했다. 그렇게 거절하기를 3년. 이성계의 스승이었던 무학대사의 설득 끝에 이성계는 한양으로 가서 이방원에게 옥새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 고사가 '함흥차사'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다. 함흥에서 내려오던 이성계는 지금의 의정부 시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또 눌러앉아버리곤 한양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 당황한 태종 이방원은 국가 고위급 공직자들을 이성계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당시 고위급 정승들이 모두 이성계가 있던 곳으로 가자 세상 사람들은 "저곳이 의정부나 다름없네" 라며 의정부라고 불렀던 것이 의정부의 시작이라고 한다. 물론 전설일 뿐이며 함흥차사 고사 역시 실제 역사와는 동떨어진 전해지는 이야기일 뿐이기에 재미로만 받아드리면 된다. 조선시대 이래 의정부는 옆 동네 양주군에 소속되어 있다가 1963년 우리나라 군정이 시작되던 해에 의정부 시(市)로 분리 및 승격되었다.



도봉산의 망월사에서 사패산의 회룡사까지

의정부는 북한산과 더불어 북한산 옆으로 도봉산과 사패산이 이어져 있기 때문에 의정부의 웬만한 곳 어디서든 수려하게 펼쳐진 3개의 석산을 관망할 수 있다. 1호선 망월사 역에 내려서 대중교통 혹은 도보를 이용해 원도봉유원지까지 오면 이곳에서 도봉산에 먼저 오를 수 있다. 도봉산의 중간지점에 망월사라는 절이 자리하고 있는데 '달을 바라보는 사찰'이란 뜻의 망월사는 신라시대 때 창건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망월사' 현판은 중국의 위안스카이가 직접 쓴 현판이라고 한다. 망월사에서 가장 유명한 승려는, 아니 어쩌면 가장 이목을 끈 승려는 춘성스님일 것이다. 욕쟁이 스님으로도 유명한 춘성스님은 차마 이 글에 적기 곤란할 정도의 주옥같은 어록을 많이 남겼다. 그래도 춘성스님은 만해 한용운을 직접적으로 모신 스님이면서 '무소유'를 몸소 체험하신 자유인이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도봉산에서 사패능선을 따라 사패산으로 이동한다. 망월사에 계신 분들이 힘든 코스가 될 거라 극구만류했지만 강행해본다. 헥헥거리며 이제 돌아갈 수도 없는 지점에서 허세넘쳤던 내 자신을 원망하며 별수 없이 하산을 하다가 회룡사에 도착한다. 회룡사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반가웠다. 애초에 오고 싶었던 절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회룡사는 사패산 입구 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회룡사가 나왔다는 건 이 지옥 같은 등산이 끝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용이 돌아오다'라는 의미를 가진 '회룡사'에는 역사적으로 두 마리의 용이 찾아왔었다. 첫 번째 '용'은 이성계다. 한양으로 돌아오던 이성계가 의정부에 머물렀을 때 이 회룡사를 들렀다고 한다. 당시 왕을 용으로 표햔했기에 이성계라는 용이 함흥에서 돌아왔다며 이 절의 이름이 '회룡사'라고 된 것이다. 두 번째 '용'은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이다. 백범 김구는 이 절을 자주 찾았다. 해방 직후 귀국을 하고 나서도 찾았으며 죽기 직전에도 이 절을 찾아왔다고 한다. 회룡사 뒷편엔 작은 석굴암이 있다. 그곳엔 김구 선생이 직접 암각한 글이 새겨져 있다. 김구의 풍채마냥 강골한 기상이 느껴지는 서체다. 도봉산의 망월사와 사패산의 회룡사 모두 꼭 한 번 들러보길 적극 추천하는 절들이지만 동시에 두 개의 산을  탄다는 코스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도 두 번 이상은 도전하지 못할 듯 하다...



의정부 부대찌개의 상징, 오뎅식당

하루만에 지친 몸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오니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 의정부에 살고 있는 군대 동기 녀석을 부른다. 일을 마치고 한걸음에 달려온 동기가 고맙고 감동에 벅찬 찰나 동기놈이 왜 이렇게 땀범벅이고 죽상이냐며 묻는다. 나는 영웅담을 뒤로 미루고 당장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으니 밥부터 사달라고 조른다. 군부대에서 함께 고생하던 시절 의정부를 찾아가면 꼭 부대찌개를 사달라고 했건만 전역이 되어서야 그 꿈을 풀어본다. 


역시 의정부하면 부대찌개다. 부대찌개의 유래에 대해선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전쟁 이후 먹을 것이 없던 한국인들이 미군 부대 근처에서 미군이 먹고 남은 소세지들과 김치를 섞어 만든 국요리가 오늘날의 부대찌개가 되었고 그래서 이름에서조차 '부대'가 붙었다는 일화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설입니다. 실제로 한국전쟁 직후 가난한 한국인들이 미군들이 먹고 남은 소세지 등 미국 요리들을 김치와 섞어서 먹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이 국 혹은 죽은 부대찌개가 아니라 꿀꿀이죽 혹은 UN죽이라고 불렀다. 부대찌개와는 완전히 다른 음식이었고 결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굶어죽기 직전에 쓰레기통을 뒤져서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재료들을 섞어 형체를 알 수 없는 죽이었다. 부대찌개의 탄생은 의정부의 전통재래시장인 제일시장과 연관되어 있다. 미국 양제품을 판매하는 제일시장에선 소세지 등 다양한 미국 식재료도 팔렸고 어느정도 경제발전을 한 이후 우리나라의 요식업자들이 제일시장에서 구입한 미국 재료와 한국 김치를 섞어 찌개 형태로 만드니 바로 부대찌개의 유래다. 의정부가 부대찌개의 고향임은 사실이지만 미군 음식과 함께 탄생했다는 배경 때문에 꿀꿀이죽과 부대찌개의 시작이 다소 혼선되어 퍼진 듯 하다. 의정부에서 부대찌개라는 요리가 탄생하면서  미군 부대가 밀집해 있는 타지역에서도 부대찌개 식당이 발달했는데 대표적인 곳이 평택의 송탄과 서울의 용산이다. 


오늘날의 의정부 부대찌개라는 명성을 만들어낸 식당은 '오뎅식당'이다. 허영만 화백의 <식객> '부대찌개' 편에도 출연했으며 허영만 작가의 <식객>에 의하면 찌개의 간을 어떤 조미료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김치의 맛과 소세지로 간을 맞춘다고 한다. 그래서 허영만 화백은 부대찌개야말로 미국인들의 입맛을 쉽게 사로잡을 수 있는 대표적인 한식메뉴라고까지 말한다. 과연 부대찌개가 맛있어봤자 똑같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 맛이 극명하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요사스러운 조미료가 없다 보니 깔끔한 매력만큼은 일품이다. 하긴 지금 이 몸으로 무슨 음식을 먹든 다 맛있겠지만.


오뎅식당의 부대찌개


양주관아지와 양주별산대놀이

몸이 지쳐버린 상태에서 든든한 부대찌개 그리고 간단하게 맥주까지 곁드리니 그날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졸도하듯 잠들어버렸다. 그래도 잘 먹고 잘 잤던 것인지 다음날 예상보다 훨씬 개운하게 일어났다. 이튿날은 양주를 돌아본다. 의정부에서 양주로 진입해 양주의 여행지를 반시계방향으로 돌아 서울로 들어올 계획이다.


의정부에서 차를 타고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양주관아지를 찾았다. 양주관아지는 말그대로 조선시대 양주고을을 담당하던 관아가 있던 터로, 한때 경기도 북부 행정의 중심지 사무실이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때 소실되었던 양주관아는 1997년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하였다. 이 양주관아가 일제강점기 전까지는 무려 400년 넘게 한 자리에서 양주를 관리했었다. 양주와 떼려야 뗄 수 없는 400년을 양주의 심장으로 있어 왔던 곳이었다. 복원된 건물은 양주목사가 근무하던 관아의 메인사무실 '매학당'과 일종의 관사라고 할 수 있는 '동헌'뿐이다. 동헌 근처에는 송덕비 18기가 세워져 있다. 이 넓은 공터에 덩그러니 놓인 매학당과 동헌이 어딘가 허전하고 어색한 걸 보면 과거 양주관아의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능하다. 조선시대에는 이 양주관아에 총 31개 동의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31개 동의 건물들이 사라진 공터는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복원된 매학당을 찾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아보이진 않지만 가족 단위, 커플 단위로 저마다 도시락을 챙겨와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설령 물리적 형체의 양주관아는 흔적없이 사라졌지만 사람이 모이는 공간의 생명력은 끊기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양주관아지를 뒤로 하고 낮은 언덕을 올라가다보면 양주향교가 있고 그 옆에 전통공연장이 있다. 양주별산대놀이마당이다. 양주별산대는 우리 고유의 전통연희 중 하나이면서 경기권을 대표하는 산대놀이였다. 산대놀이란 서울과 경기권에서 전승되던 가면극이다. 지방에선 가면극이 탈춤의 형태로, 서울과 경기권에선 산대놀이라고 불렸는데 궁중에서 직접 '산대도감'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국가의 행사나 외국사신 접견자리에서 관람했을 정도로 지배층도 폭넓게 관람했던 가면극이었다. 악사와 놀이꾼은 전부 천민들이었지만 행정적 지원을 받았던 만큼 악기도 다양했으며 악사들의 연주실력 또한 수준급이었다. 또 그만큼 풍자의 수위도 약한 편이었고 가면의 과장됨 역시 탈춤의 가면처럼 과하지 않았다. 대신 중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유독 두드러진다. 그러나 조선후기 인조 때 산대도감이 폐지되자 소속 예술가들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다 스스로 극단을 만들어서 산대놀이 전통을 이어나갔다. 가장 컸던 극단이 서울의 송파산대놀이와 경기도의 양주별산대놀이 그리고 퇴계원산대놀이였다. 이후로도 양주별산대놀이는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일제강점기 때 위세가 크게 위축된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고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올라가면서 1964년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등록되었다. 전통연희란 글로 기록하는 문화가 아니라 단절되기 쉽다. 그러나 양주별산대놀이는 그만큼 인기가 많은 전통연희였던 덕에 몇 백 년 간 이어질 수 있었고 명맥이 위태위태하던 상황에서도 양주별산대놀이가 복원될 수 있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양주라는 고을이 나름 경제적 여유와 행정적 여력이 있던 도시여서 더욱 계승되기 유리한 조건이었다고도 한다. 현재는 매년 5월 5일 어린이날과 10월 5일 정기공연을 하고 있으며 4~10월까지 매주 토요일 혹은 일요일마다 비정기적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출처: 양주시



조선시대 최대규모의 사찰 터, 회암사지

양주가 평범한 곳이 아님을 대번에 알 수 있는 곳이 회암사지다. 회암사가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때부터 이름이 등장하고 있으며 조선이 개국하고 1대왕인 태조 이성계가 대대적으로 확대 중창을 지시했었다. 조선은 비록 성리학의 국가였고 불교를 배격했지만 태조 이성계만큼은 불교신자이기도 했으며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스승이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회암사에 모시며 숭유억불의 조선이란 국가에서 태조 이성계의 지시로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던 절이 회암사였다. 조선 전기 최대 규모의 사찰이었다고 하는 회암사는 궁궐인지 사찰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의 위용을 자랑했다. 자신의 다섯 번째 아들 이방원이 두 번에 걸쳐 형제들을 제거하고 3대왕이 되자, 그런 아들을 꼴도 보기 싫었던 건지 이성계는 고향 함경도로 가버렸고 그곳에서 '조사의의 난'이라는 반란을 주도하였다. 조선시대 최초의 반란 조사의의 난은 태종 이방원도 직접 친정을 떠난 이성계와 이방원 부자 간의 대결이었고 승자는 이방원이었다. 젊은 시절 단 한 번의 패전이 없던 전설의 이성계가 노년이 되어 패배를 맛 본 굴욕이었다. 조사의의 난 이후 태종 이방원은 굳이 아버지에 대한 보복을 더 진행하진 않았고 뒷방신세가 된 이성계는 이후 한양에서 조용히 사는데, 이때도 회암사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태종 이방원은 계속 회암사에서 무학대사가 있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1405년 무학대사가 사망한 3년 후 이성계도 눈을 감았다. 이성계는 재위시절 회암사를 중창하며 부도를 만들었는데 이 부도에 무학대사의 사리를 봉안하였으며, 태종 이방원이 직접 무학대사비를 작성해주었다.






태종 이방원에게는 정비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네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막내 성녕대군은 요절했고 첫째는 문제아 양녕대군, 셋째는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이다. 그리고 둘째아들이 효령대군인데 아주 독실한 불도신자였던 효령대군이 무학대사의 뒤를 이어 회암사를 왕자의 신분으로 관리하였다. 태종 이방원의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세종대왕이 되고, 세종의 재위기에 늘 사고만 치고 다녔던 맏형 양녕대군이 사냥을 마친 뒤 회암사에서 사냥감들로 육식을 하자 깜짝 놀란 효령대군이 뛰쳐나왔다고 한다. 그런 효령대군에게 양녕대군은 "내가 살아서는 임금(세종)의 형님이고, 죽어서는 불자(효령대군)의 형님인데 지옥이 두렵겠느냐?"라며 넌스레를 떨었다는 일화가 있다. 참 철없는 맏형이었다.


이후 회암사는 계속 이어져내려왔다. 특히 조선의 13대왕 명종의 친모 문정왕후 윤씨 역시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승려 보우를 중용하여 회암사를 맡겼다. 승려 보우는 회암사뿐 아니라 30대의 나이로 봉은사 주지스님이 되었으며 문정왕후는 보우를 내세워 과거시험에 일시적으로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등록시스템인 도첩을 다량으로 발행하여 승려들의 사회적 지위가 크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당시 국왕 명종은 허수아비 왕이었고 조선의 실세는 문정왕후였기에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지만, 1565년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때다 싶었던 사대부, 선비, 유림, 성균관 유생들이 대거 보우를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한다.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지만 보우가 실각하고는 회암사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지고 알 수 없는 이유로 대화재가 발생하여 사찰 모두 소실되었고, 현재 복원되지 못한 채 터만 남아 전해지고 있다.



회암사의 규모에 대해서야 텍스트로만 알고 있었지 그 터를 보는 순간 웅장함에 입이 떡하니 벌어진다. 한 바퀴 다 도는데에만 꽤나 시간이 걸릴 듯하고, 아무것도 없는 '터'가 이토록 풍성해보이는 인상은 또 희귀한 느낌이다. 둘레를 돌기보단 터 한 가운데를 가로질러 보기로 한다. 그 많은 주춧돌들과 돌계단들은 남아 있어 마치 돌다리를 건너듯 껑충껑충 뛰어다니지만 워낙에 돌들이 많아 조심하지 않으면 접지르기 쉽상이다. 그렇게 뒷쪽 끝까지 가면 날렵하고 수직적이면서 자태가 우아한 큰 승탑이 하나 있다. 이 정도 높이의 승탑도 보기 쉽지가 않은데 회암사는 하나하나 물량공세로 퍼부은 양의 건축이라는 게 실감난다. 더 감동적인 광경은 회암사지 앞으로 날 좋은 날 정말 많은 가족단위 커플단위로 빼곡하다. 화목하고 즐겁게 노는 소리들이 이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양주관아도 그렇고 회암사도 그렇고 비록 공백이 많은 터이지만 그곳을 사람들의 즐거운 추억과 행복으로 가득 채워나가고 있다.



빛을 찾아서, 조명박물관

양주의 이색박물관으로 조명제품 회사 KH필룩스에서 운영하는 조명박물관이 있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알차고 세련된 전시를 하고 있어서 양주의 대표 박물관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일상에선 인식하지 못하지만 생활의 가장 근간이 되는 분야 중 하나가 조명이다. 조명의 형태에 따라 인간의 심리에 크게 좌지우지되기 때문이다.


조명박물관 1층은 동서양 조명의 역사를 조망한다. 이 전시에선 역사적으로 인류가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조명등을 사용해왔고 조명이 어떻게 실내디자인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 그 유구한 세월 앞을 감상할 수 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은 아주 오래도록 부싯돌로 밝힌 촛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촛불을 올려놓는 등잔 혹은 촛대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발달해왔다. 서양의 크리스트교, 동양의 불교에서는 촛불의 불빛을 진리의 광명으로 비유하며 종교별 특색에 따라 촛불을 활용해왔고 특히 불교에서는 '석등'이라는 종교건축의 한 가지가 있을 정도였다. 단 촛불은 바람에 쉽게 꺼지기 때문에 바깥거리에선 휴대용으로 촛불을 보호하기 위해 촛불을 감싸는 장비를 활용하였는데 서양에서는 유리로 감싼 랜턴(lantern), 동양에서는 천으로 두른 초롱이 있었다. 촛불이 유일한 조명장비였던 만큼 기름의 중요도가 남달랐고 주로 동물기름을 사용했는데 서양에서는 고래기름을 최고로 처주었다. 그러던 중 18세기 영국의 공학자 윌리엄 머독이 석탄에서 배출되는 가스로 불을 내는 원리를 고안해내 세계 최초로 '가스등'을 만들어냈다. 기름을 대체할 수 있는 조명원리를 발견해낸 것이다. 때마침 영국은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시대. 윌리엄 머독의 가스등은 영국 산업혁명을 가능케 했던 또 하나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1827년 영국의 J 워커는 마찰력을 이용해 불을 켜는 최초의 성냥을 만들어냈고 이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 한층 더 안전하고 휴대하기 편한 성냥들이 보편화되었다. 동양에는 동양의 국가들이 근대화를 하며 성냥이 유입됐고 편의성 덕에 삽시간에 상용화될 수 있었다. 과학의 시대에 박차를 가하던 서양에서는 18~19세기 전기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고 1802년 영국의 험프리 데이비는 전극 사이 전류를 발생시켜 전기를 만들어내는 아크등을 최초로 개발해냈다. 그리고 마침내 마크 트웨인이 스스로 명명했던 물질주의로 팽배했던 미국의 19세기 말 '도금시대'에 에디슨이 필라멘트에 전류를 흘려 빛을 내는 백열등으로 전구를 대중화시켰다. 에디슨이 전구를 '대중화'시켰다고 표현한 건 최초의 백열전구를 만들어낸 사람은 에디슨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보우먼 린지였지만 제임스는 원리만 찾아냈을 뿐 이것을 대중화시키지 못했고 에디슨은 상업화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로 전구를 만들어 특허권을 먼저 얻어냈던 것이다. 한국 최초로 조선시대 경복궁 향원정에 전기조명을 설치해준 회사도 에디슨의 회사였다.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도 당연한 조명을 얻기까지 굉장한 시간이 필요했으며 오늘날에 조명은 하나의 예술로 자리잡고 있다.



지하 1층 전시는 빛의 원리를 활용한 재치 있는 과학전시실이다. 과학이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새삼 느끼게 해주며, 조명 또한 예술임을 상기시켜준다. 1층 전시가 유익하다면 지하1층의 전시는 체험하는 곳이다. 여러 예술분야 가운데 빛의 과학이 가장 중요한 예술은 사진과 영화다. 사진과 영화의 도구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는 빛의 물리학 법칙을 원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원래 명칭은 '카메라 옵스큐라'. '암상자'라는 뜻으로 아무 빛도 없는 암실에 구멍 하나를 뚫어 빛을 통과시킨다면 암실 바깥의 상이 암실 내부에서는 거꾸로 뒤집혀서 보인다는 말이다. 이 암실 안에서 거꾸로 뒤집힌 상의 이미지가 바로 카메라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카메라가 바로 이 암실 역할을 하고 외부의 빛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카메라 내부로 모아준다. 뒤집힌 상은 카메라 내부에 있는 거울로 반사시켜 원래의 모습으로 만들어준다. 모여진 빛이 셔터를 누르면 필름 같은 감광물질에 찍하는 것이다. 이때 빛을 모아주는 렌즈는 오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적당히 섞는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광학 원리는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오다가 1826년 프랑스 발명가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헬리오그라피'라고 불리던 세계 최초의 사진기를 만들어냈다. 당연하게도 원시적인 형태의 사진기 '헬리오그라피'는 오늘날의 사진기와 차이가 많이 났고, 지금의 휴대용 사진기를 만들어낸 회사는 미국의 코닥이었다. 필름 안에 있는 사각형 칸 하나를 '프레임'이라고 부르는데 1초에 12프레임 이상을 교체하면 인간의 눈은 연속된 움직임으로 인식한다고 한다. 이를 가현운동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영화가 유래했다. 가현운동의 원리를 포착한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라고 부르는 영사기를 발명해냈고, 뤼미에르 형제가 촬영한 <열차의 도착>이라는 세계 최초의 영화가 1895년 프랑스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로 발명해낸 '시네마토그라프'는 1초당 16프레임을 움직이는 영사기였고 이후 영화기술이 발전하면서 영화용 필름은 초당 24프레임으로 굳혀졌다. 이젠 필름이 아닌 디지털로 촬영하는 시대이긴 하지만 말이다.

세계 최초로 찍은 '집 밖의 풍경' 사진과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
세계 최초의 영화 <열차의 도착>과 뤼미에르 형제


순수한 소년성의 현대미술 장욱진과 양주시립장욱진미술관

북한산의 산기가 양주 쪽으로 점점 내려오며 이어지는 계곡 근방엔 '장흥유원지'가 조성되어 있어 오래도록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해왔다. 이런 산 좋고 물 좋고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일찌감치 예술가들이 영감을 받는 곳으로 헌팅되어 왔다. 이 장흥유원지 근방에는 한국의 또다른 위대한 화가 장욱진을 기리는 미술관이 있다. 장욱진의 회화사적 가치를 설명하자면 한국의 근대 미술은 심전 안중식과 그의 제자 춘곡 고희동이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열었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이중섭, 이인성, 박수근 등의 화백들이 근대미술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받는다. (한국근대미술의 태동에 대해선 [광명-과천 편]에 자세히 서술해두었다.) 근현대 미술의 2세대 중 이렇게 근대미술을 완성시킨 계열이 있었다고 하면, 김환기와 더불어 근대의 자양분을 먹고 현대미술의 분야로 진일보시킨 세대 중 한 명이 바로 장욱진이다. 근대미술이 기존의 미술화풍을 계승하는 가운데 작가의 개성을 녹여냈다면, 현대미술은 기존의 체제와 틀, 화풍, 익숙한 재료 등을 모두 거부하며 예술의 경계를 파괴하고 확장해나가는데 일조하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충청도에서 태어난 장욱진은 6살 때 서울로 이사를 와 경성제2고등학교를 다니다 일본인 교사와 싸우다 퇴학을 당해 양정고등학교로 입학했다. 고등학교부터 미술에 대한 관심과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 시작해 양정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제국미술학교(오늘날의 무사시노 미대) 서양화과를 전공했다. 이때 서양화를 전문적으로 배우며 현대미술의 기본을 닦은 게 아닐까 한다. 해방 후 한국으로 귀국하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며 고미술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화백 스스로 회고하기에 일제가 어떠한 인수인계 없이 도망가는 바람에 보물들과 고미술 작품들을 관리하는 방식과 절차를 아주 고생스럽게 일구어나가야 했고, 힘이 들어도 안목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개인적인 작품활동을 하다 6.25전쟁을 겪었고 부산으로 피난 후 전쟁이 끝나곤 1960년까지 서울대 미대 교수로 일했다. 개인적인 작품활동에 더 전념을 하고 싶었던 장욱진은 교수생활을 청산하고 '덕소'에 작업공간 아틀리에(화실)를 만들고 약 10년 가까이를 대표작들을 만들어냈다. 집 자체는 서울 명륜동이어서 양주의 덕소와 서울 명륜동을 오가며 환갑이 다 되어 완전히 명륜동에 정착, 그곳에서 화실을 꾸렸으나 나이가 들수록 더더욱 자연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했던 장욱진은 아내와 함께 충주 수안보에서 작품활동을 이어나갔다. 6년 후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를 가 낡은 한옥을 개조해 예술가의 말년을 보내다 1990년 잠드셨다.


덕소의 화실, 명륜동의 화실, 수안보의 화실, 용인의 화실 모두 장욱진 화백이 직접 살기를 원했던 곳이지만 자서전을 읽다보면 양주 덕소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나는 화실을 덕소에 꾸미기로 결심했고, 그것을 이룩하여 이제까지 거기서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해도 썩 잘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내 주장은, 아틀리에는 교외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부와의 관계가 차단될 수 있어야 함은 창작 활동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나와 같이 생산력이 그림 이외에는 전혀 없는 소비성향 인간에게는 교외에서 살아야 소비가 절약될 수밖에 없다는 경제적 이점이 있기도 하다.  (중략) 내가 살고 있는 덕소 화실은 한강을 낀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거기에서 내 행위가 시작된 것도 어느덧 십이 년여.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강물에 발 한 번 담그지 않았다. 내가 아끼는 강이요 내가 즐겨 찾는 강은 나에게 그림이 아니더라도 위안을 주는 벗이다."



양주에 장흥유원지에 들어서 사람의 떼를 타자 장욱진은 매우 아쉬워하면서도 양주 덕소에서의 삶을 찬탄하는 소회도 남겼다.


"십이 년간 생활하던 덕소 화실에서 쫓기듯 피해 나와 나는 다시 제2의 작업장을 찾아야만 했다. 등잔불 신세 진 지 십년 만에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왔고, 도로포장이 되면서 완연한 변화가 오더니 덕소 주변은 유원지가 되고 말았다. 소음을 피해 나갔으나 시끄러움 때문에 다시 옮겨야 했으니 쫓겨 온거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나에게 그동안 자연을 맛보게 해주었고 두 차례의 개인전도 갖게 하였으니 지금 덕소를 떠나와도 아무 후회도 미련도 없다. 단지 고마웠을 뿐이지."


이토록 자연에 대한 순수한 동경을 가득 품은 장욱진의 그림세계는 어떠한가. 장욱진의 그림이 현대미술로 분류되니 현대미술의 가장 근간이 되는 추상성이 돋보인다지만, 장욱진의 그림세계는 추상성만으로 포괄해버리면 특유의 천진난만한 소년성을 놓칠 수 있다. 장욱진의 작품은 마치 동굴벽화를 보는 느낌이다. 그만큼 인간 원시적인 근원의 무언가를 원초적으로 표현해내려는 듯하다. 장욱진은 인간의 근원을 아이들에게서 찾았다. 장욱진은 아이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동경했다. 따라서 굳이 골라야한다면 장욱진의 세계는 추상성보다는 순수성이다. 그림이 제멋대로인 이유도 아이들은 제멋대로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장욱진의 그림이 지나치게 작다고도 이야기한다. 유홍준 교수는 그래서 장욱진의 그림에선 그림을 그리는 바닥의 재료가 중요하다고 했다. 장욱진 스스로는 그림을 작게 그리는 이유에 대해서 그림이 작아야 화면을 지배할 힘이 생긴다고 말했다.


"나는 네 계절 모두가 동화처럼 펼쳐지는 세계에서, 강변에 자리한 '화가별장'의 주인으로 십이 년을 살고 있다. 어린아이들의 천진스러운 놀이에서 적나라한 자연을 보곤 한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에의 향수가 감미롭고도 서글프게 전신에 휘감겨 옴을 느낀다. (중략) 티 없이 노정되는 인간의 본성을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짐으로써 이기적인 내적 갈등과 감정의 긴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에 찬 미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우울한 함정에서 절망 대신에 긍정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실한 정신의 휴식인 것이다. (중략)

무섭도록 하얀 캔버스 앞에서 미를 강조한다. 내 그림은 빛깔을 통한 내적 고백이며, 내 속에서 변형된 미와 자연의 찬미이다. 하나의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의 고통과 희열은 하나하나의 붓 자국에 담겨 그림 속에 스며든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미의 승리를 확신하고 캔버스를 향해 감행하는 영혼의 도전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내 그림들을 아낀다. 깊은 애정으로써 바라본다. 거기에는 나의 진실된 얘기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장욱진


어디선가 미술관과 박물관을 즐기는 방식으로 다 관람을 한 이후 이 전시품 중 단 한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해보는 상상이 안목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들은 적이 있다. 상상으로만 그치진 아까워 나는 꼭 뮤지엄샵을 들러 전시품을 활용한 엽서들을 선별해 구매하곤 한다. 이 과정이 마치 전시품 중 몇 가지를 내가 가져간다는 느낌이 들어서. 이때만큼 여행할 때의 뿌듯함이 또 없다.



중종 제1비 단경왕후 신씨의 외로운 무덤, 양주 온릉

양주에는 총 50기의 조선왕릉 중 '온릉'이 있다. 보통은 조선왕릉들이 모여 있는데 양주의 온릉은 조선 11대왕 중종의 첫번째 부인 단경왕후 신씨의 무덤이 홀로이 앉아 있다. 단경왕후 신씨는 그다지 존재감이 강한 왕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경왕후 신씨는 왕비 재위기간이 고작 3일밖에 되지 않은 최단기간의 왕비이기 때문이다. 중종은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원래 왕이 될 서열이 아니었으나 연산군이 반정으로 쫓겨나면서 중종으로 즉위하였다. 중종은 반정에 참여를 하지 않았으며, 반정세력이 중종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사저를 방문했을 때 형 연산군이 본인을 죽이러 오는 줄 알고 숨어있었다고도 한다. 그렇게 중종은 얼떨결에 왕이 되었고 그의 아내였던 신씨도 얼떨결에 단경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단경왕후 신씨는 연산군의 처가와 같은 집안 사람이었고 이것이 문제가 되어 신하들은 중종에게 왕비를 교체할 것을 압박했다. 반정세력 덕에 왕이 된 중종은 반정세력의 압박을 무시할 수 없었고 조강지처로 정평이 나 있던 단경왕후 신씨를 사흘만에 궁궐에서 쫓아내야만 했다. 정치적으로 희생되고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이었는데도 무덤까지도 그녀의 무덤이 외롭게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단 한 개의 조선왕릉도 분명 운치 있지만 그녀의 삶을 생각해보자니 참 쓸쓸하고 애처롭다.




일영역에서

옛날에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버려진 공간이 이제는 감성의 공간을 탈바꿈되어 젊은 관광객들이 찾는 유행이 번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폐역이다. 양주에는 서울 은평구 근처에 '일영역'이라는 폐역이 있다. 기차역은 아무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설계를 할 때 교통과 교통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을 수 있는 지리적 이점에 위치하고, 기차역에는 사람이 몰리니 상권이 발달하며 하나의 생활권이 형성된다. 그러나 폐역은 그 모든 흔적들이 사라진 묘한 사멸의 정서와 폐허적 감각을 유발한다. 녹슨 미학이 사람들의 감성을 건드리는 게 아닐까 한다. 양주의 일영역은 1961년 운행을 시작해 2006년 공식 종료하였다. 특히 일영역은 방탄소년단(BTS)의 명곡 <봄날>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로 이름을 알렸다. 일영역은 그다지 큰 폐역은 아니지만 '어떤 어둠도 어떤 계절도 영원할 순 없다'는 '봄날'의 가사처럼 버려진 공간이 아닌 다시 꽃 피우는 공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산은 허허벌판의 평지에 느닷없이 솟아오른 봉우리가 아니다. 산에는 산자락이 있다. 산 자체는 사람이 살기에 부적합할지 모르겠지만 산자락을 끼고 곁가지로 형성되는 준엄한 계곡과 맑은 개울, 푸르른 나무들 곳곳엔 관광객들이 잠시나마 휴식하고 보낼 수 있는 안락의 휴양처들이 즐비한다. 의정부와 양주가 북한산의 아우라를 몸에 쓴 덕분에 '살기 좋은 곳'이 되었고 그만큼 많은 인파들이 몰리는 게 아닐까 한다. 여기서 많이 몰리는 인파는 대규모 관광지를 즐기러 온다기보단 땅의 체온, 가족의 체온, 사람의 체온을 물씬 느낄 수 있는 평범하면서 일상적인 즐거움을 누리러 온 것이 아닐까 하며, 이 즐거움은 경기도 위성도시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당당한 독립적인 이름의 '양주'와 '의정부'라는 이름 속에서 이곳에서만 체득할 수 있는 안온함에서 기인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 안온함의 근원은 북한산의 '자락'이 주는 자연의 기운이 아닐까.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 화백이 그림을 그리며 남겼던 에세이를 모아 엮은 그림 산문집입니다. 1975년 초판이 나온 이래 2017년 출판사에서 추가로 발견한 에세이들을 더 실어서 장욱진 탄신 100주년에 맞춰 개정증보판이 나왔습니다. 다양한 그의 에세이에는 작가의 미술관, 예술관, 이런저런 푸념, 일상의 것들, 그가 추구하는 것들,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유롭게 나열되어 있어 한 예술가를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답니다. 화가임에도 문장 하나하나 특히 그의 화론에 대한 생각을 펼 때는 그의 진심이 묻어나오는 좋은 문장들이 많습니다. 그림만으로 해설이 불충분하다고 여기고, 장욱진의 그림을 조금 더 심도 있게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이 책을 반드시 읽을 것을 권장드립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양우석 감독의 <강철비>

정치물을 가장 대중적으로 풀어내는 양우석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 <강철비>입니다. 정우성 배우가 맡은 북한군과 곽도원 배우가 맡은 대한민국의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두 사람의 케미도 흥미로운 버디물이죠. 동아시아와 미국 사이의 국제관계 속 가장 뜨거운 이슈인 '핵무기'를 사건의 중심으로 두고 전개되며 비록 설정 자체는 허구이지만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건의 핍진성을 보유하고 있답니다. 남북한의 버디물은 많지만 이 영화는 정치적 어젠다까지 강하게 끌고 오며 드라마와 사회성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죠. 영화 속 차를 타고 의정부를 지나치다 '부대찌개거리'를 보며 "남한은 아닌 척하며 식당에서조차 병영화하냐"는 대사에 그러고보니 대표적인 한식이라고 생각했던 부대찌개가 미군 기지 주변에서 탄생한 음식인 만큼 북한에는 있을 수 없는 음식이구나에 이마를 탁 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는 없고 남한에만 있는 한식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느낌을 만들어주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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