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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Sep 20. 2022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김해 편]

철의 나라를 여행하다



















서울, 경주, 공주, 부여. 우리나라의 고도(古都)하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도시들이다. 혹은 익산, 전주, 철원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고도 도시들도 있다. 이 도시들은 한 국가의 수도로 개발되었지만 종국엔 천도하지 못한 경우 아니면 해당 지역들을 수도로 삼았던 국가의 존속기간이 길지 못해 그만큼 품은 역사가 존재감이 크지 않은 경우이다. 그런데 분명 고도로서의 기간도 길고 품은 역사의 내력도 유구하지만 고도의 도시들을 나열할 때 종종 빠지는 한 곳이 있다. 바로 김해다. 김해는 가야의 수도였다. 구체적으로는 금관가야의 수도였으며 금관가야는 단 한번도 수도를 옮긴 적이 없으니 고도로서 김해의 역사는 근 500년이나 된다. '김해'는 지명 자체가 가야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렇다면 왜 김해는 고도로서의 이미지가 옅은 편일까? 아마 가야의 위상이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고대국가로 발돋움한 삼국과는 달리 가야는 연맹국가로, 백제와 신라라는 강대국 사이에 낀 작은 국가로 있다 소멸되어 한국사에서 가야의 입지가 높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심지어 가야는 스스로 역사기록물을 남기지 않아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가야는 누락되어 있으며 백제와 신라 편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분명 가야는 가야만의 독특한 문화를 창달하여 한국 고대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들어준 우리의 소중한 역사이기도 하다.


가야의 역사를 알려주는 자료가 많이 빈약한 만큼 베일에 가려진 신비의 국가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가야를 '미완의 왕국'이라고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그런 가야의 이미지가 나에겐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번 김해 여행을 통해 가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다룰 순 없지만 그 일면만이라도 소개해보고자 한다. 우리의 역사 속 국가들 중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나라가 가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가야를 다루고 있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가락국기>라는 가야에 관한 역사서가 편찬되었지만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삼국시대의 각종 민담과 전설을 기록한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단편적으로나마 가야의 건국신화 파트가 할애되어 있는데 일연 스스로 <가락국기>를 참고했다고 밝혔다. 서기 42년 김해에서 현지부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자 '자줏빛 끈이 내려와 알 6개를 내려주었는데, 이중 가장 먼저 깨고 나온 한 사내아이가 훗날 수로왕이 되어 금관가야를 건국했고, 나머지 다섯 알에서도 태어난 아이들이 각지로 퍼져 다른 가야들을 건국했다'고 하니 이 여섯 형제가 각각 건국한 가야들을 육가야라고 불렀다. <삼국유사>에는 여섯가야로 김해의 금관가야를 포함해 함안의 아라가야, 함녕의 고령가야, 고령의 대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고성의 소가야 등이다. 그런데 일연이 가야에 대해 기술할 때 육가야는 <가락국기>에 의한 것이며 <사략>이라는 역사서에는 육가야가 아닌 오가야로 적혀있다며 오가야로는 금관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아라가야까지는 동일하되 고령가야나 소가야가 없고 창녕의 비화가야가 있다고 적어두었다. 가야 연맹은 육가야였을까 오가야였을까? 가야연맹에 속한 가야들이 6개이냐 아니냐 논쟁은 여기저기서 들어봤으리라 생각이 든다. 후대의 학자들은 10개가 넘었으며 일부 외국 학자들은 20개까지 보기도 한다. 대체 가야와 얽힌 사실이 무엇인지 김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베일을 풀어보겠다.




금관가야 건국자의 무덤, 수로왕릉

금관가야의 시조는 수로왕이다. 일반적으로 '가야'라고만 부를 땐 금관가야를 가리킨다. 한국의 상고시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작은 부족국가들의 연맹체가 존재했다. 이중 낙동강 유역에는 12개의 소국들이 '변한'이란 연맹체의 이름으로 불렸다. 어떤 역사서든 어떤 해석이든 'XX가야'라고 명명된 가야연맹들은 전부 낙동강 유역에 분포해있던 국가들이었다. 변한의 여러 나라들이 이합집산과 흥망성쇠를 거치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변한의 12개 소국들 중 가장 컸던 국가는 김해에 뿌리를 둔 금관가야의 전신인 구야국이었다. 구야국은 철을 매개로 비약적 성장을 거두었다. 철을 직접 생산했다기도 하고, 철 생산은 내륙지방에서 이루어지되 생산된 철을 낙동강 하구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해외 수출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냈다기도 한다. 어느 쪽이든 구야국은 철의 집산지였으며 '김해'라는 말 자체가 '쇠가 바다처럼 풍부하다'는 뜻에 유래했다. 구야국은 바닷길을 통해 철을 일본의 규슈 섬, 한반도 중부에 있던 중국 정권 낙랑군, 그리고 중국본토에까지 수출하면서도 중개무역을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가야의 건국시조 수로의 성씨 '김(金)씨'가 쇠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며 '수로' 역시 '쇠'의 고대순우리말이라는 해석도 있다.


건국신화에 의하면 이 구야국의 원로들은 강력한 부족장을 염원하고 있었는데 구지봉이란 산에서 구지가를 부르며 제사를 지내자 앞서 말한 자줏빛 끈이 알 6개를 전해주었으며 그곳에서 김수로가 태어났다고 한다. 구지봉과 구지가의 '구(龜)'는 거북이를 뜻하는데, 구야국이 거북이를 토템으로 삼던 부족국가임을 알 수가 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구지가


김수로가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설화는 한반도 토착신화가 아니다. 난생설화를 공유하는 민족권이 어디까지인지 알 순 없지만 '김수로'가 이끄는 외지집단이 구야국으로 넘어와 구야국의 부흥시켰으며 아마 철과 관련된 집단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수로의 구야국은 점차 낙동강의 패권국가로 성장했고 시간이 지나며 '가야' '가락' 등으로 불렸다. 가야의 역사 후반으로 가면 김해의 가야를 '금관'이라고도 지칭하고 있어 후대에 금관가야라는 명칭이 붙었다. 금관가야는 나중에 붙여진 이름이고 당시에 '가야'는 오로지 김해의 구야국에서 발전한 국가만을 가리켰다. 가야는 더 성장했고 고대시대 초창기 때까지만 해도 경주의 사로국에서 발전한 신라와 비등비등한 사이였다. 경주와 김해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고 신라 또한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가야와 자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 초기의 주 경쟁국은 바로 가야였다. 가야는 구야국 시절부터 일본의 규슈와 여러 교류를 시작했기에 일본의 해적들도 신라를 자주 공격하고 약탈했다. <삼국유사> 신화에 의하면 수로왕은 157세의 나이에 사망했으며 가야 사람들은 구야국을 가야로 만들어 준 수로왕을 기리기 위해 둘레 300보의 무덤을 조성했다고 한다.



김해 시내 한복판에 수로왕릉이 있다. 이 왕릉 무덤이 언제 처음 세워졌는지 알 수 없지만 고려시대, 조선시대 문집에도 등장하는 만큼 지금의 한국인 뿐 아니라 고려인, 조선인 모두 이 무덤을 수로왕릉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다. 현재까지 발굴을 하진 않아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지진 않았다. 아마 신비스러운 가야의 이미지를 그대로 두기 위함이며 이 무덤이 수로왕의 무덤이 맞다는 믿음을 지켜주기 위한 존중일 수도 있다. 수로왕릉에는 이 무덤을 만진 자에겐 저주가 내려진다는 전설도 있다.




허황옥이 잠들어 있는 수로왕비릉

수로왕릉에서 큰 길을 따라 곧장 가면 수로왕비릉이 있다. 허황옥이라고 수로왕의 아내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왕이 된 수로왕은 신하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오래도록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 깃발을 단 배 하나가 정박했는데 배에선 어느 이국적인 외모의 공주와 일행이 타고 있었다. 수로왕은 기이하게 여겨 사람을 보내 공주의 일행을 궁궐로 초대했는데,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어찌 따라갈 수 있겠냐며 공주가 거부하자 수로왕이 직접 공주를 만나러 갔다. 수로왕을 만난 공주가 말하기를 자신의 이름은 허황옥이고, 저 먼 아유타국에서 왔는데 공주의 부모가 꿈속에서 상제를 보고는 자신을 동방의 수로왕과 결혼하라고 하여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허황옥의 배 안에는 비단과 옷과 옷감, 금과 은, 주옥과 옥 등의 장신구는 이루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허황옥과의 만남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며 수로왕은 허황옥과 혼인하였다. 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선 10명의 아이들을 낳았는데 이중 8명은 김해 김씨, 나머지 2명은 어머니의 성씨 김해 허씨를 따랐다. 수로왕 사후에는 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낳은 거등왕이 뒤를 이어 가야의 2대왕이 되었다. <삼국유사> 전설에 따르면 서기 189년 157세의 나이로 허황옥이 사망했다고 한다. 


허황옥이 왔다는 이국의 국가 '아유타국'이 어딘지에 대한 해설이 분분하다. 먼저 기존에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인도의 아유디아 왕국에서 왔다는 설이다. 그러나 아유디아 왕국은 4세기 이후에 건국되었기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왕국은 아니더라도 인도 고대 지명엔 '아유타'라는 명칭이 있었다고 한다. 인도를 부정하는 입장에선 '허황옥'이 대체 어떻게 인도식 이름이냐는 반론이 있는데 KBS에서 서울대, 한림대 의대와 함께 김해 지역에서 발견된 인골 DNA를 검사한 결과 인도계 유전자와 흡사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도 한다. 두 번째 설은 태국의 아유타야를 지지하는 설인데 태국의 아유타야야말로 저 나중에 건국되었기에 가장 지지를 덜 받고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인도와 중국 사이의 어느 지역이라는 것이다.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계라는 설인데 그럴 경우 '허황옥'의 삼자식 명칭이 납득이 가며 전설 속에서 허황옥이 가져왔다는 파사석탑의 '파사'라는 석재료는 우리나라에선 발견되지 않으며 인도와 중국 사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아직 불교가 한반도 땅에 들어오기 이전에 허황옥이 석탑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어찌됐든 허황옥이 불교와 강력하게 연관이 있는 곳에서 왔다고 볼 수 있다. 


허황옥이 정확히 어떤 나라에서 왔건 허황옥이 타고 온 배에는 비단, 장신구, 고급 옷감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아직까지 비단을 소유하거나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허황옥의 외지세력은 상당한 선진기술을 보유한 집단이었고 수로는 허황옥 집단과의 혼인으로 가야의 위상을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수로왕 이후의 가야 왕들 또한 허황옥을 호종하던 신하들의 딸과 혼인했다는 것으로 봐서 가야는 왕을 배출하는 수로왕의 집단, 왕비를 배출하는 허황옥의 집단, 그리고 상류층을 형성하는 토착부족장들 이렇게 3개의 축으로 국가가 번성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수로왕과 허황옥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 중 일부는 어머니 허씨 성을 받았다고 하는데 허황옥의 집단은 잔존하고 있던 모계사회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다.


비록 허황옥의 출신과 존재가 신비주의이지만 남다른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여인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녀의 무덤은 지금에 '수로왕비릉'이라고 불리고 있다. 본명이 아닌 누군가의 아내의 무덤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허황옥의 무덤을 찾는데 골치를 먹었다. 허황옥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 수 없고 무덤의 주인도 결론내리기 어렵지만 그런 면에선 수로왕도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조선시대 때부터 이곳을 '수로왕비릉'이라고 오래도록 불러오긴 했다만 그럼에도 이제는 허황옥의 존재를 스토리텔링화하여 역사적 콘텐츠를 사용하고 싶다면 그녀의 본명을 가져와 명명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순장의 악습이 담김 대성동고분군

가야는 스스로의 기록물을 남기지 않았다. 우리의 힘으로 가야의 역사를 알기 위해선 전적으로 고고학 성과에 의존해야만 한다. 고대사의 고고학이라 함은, 특히 국가 규모가 크지 않았던 가야에서는 오로지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로 가야의 사회와 문화를 파악해야 한다. 금관가야의 수도인 김해에는 왕실 및 지배층들의 고분군인 대성동고분군이 대표적이다. 1990년 밭을 갈던 농부의 인터뷰로 실마리를 찾은 부산의 경성대 신경철 교수가 본격적으로 발굴 작업에 착수하여 2014년까지 9번의 발굴 프로젝트를 거쳤다. 그 사이 2003년에는 대성동고분군 박물관이 들어섰으며 현재까지 파악된 대성동고분군의 고분 수는 총 304기다.



대성동고분군과 근천의 박물관을 관람하면 안타까운 가야의 풍습 중 하나가 바로 순장이다. 순장은 지배층이 죽고 매장될 때 피장자를 생전에 모셨던 측근들을 함께 묻어버리는 대표적인 인류 고대의 악습이다. 대성동고분군의 발굴 현장에서 피장자 인골 발 밑에 순장된 인골들이 함께 출토됐다. 적으면 4~5명을, 많으면 30명 넘는 사람을 묻었다고 한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순장은 현재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순장이다. 인류고대사의 풍습은 지금의 기준에서 악습일 뿐 당시에는 시대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순장은 당시로서도 악습으로 간주됐다. 고구려와 백제의 경우 일찌감치 순장문화를 폐기했고 신라도 뒤늦게나마 순장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금관가야를 비롯한 인근의 소국들은 순장의 문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순장은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지탄받아야 하지만 사회경제적으로도 국가구성원의 인력을 낭비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한 국가 혹은 한 조직 혹은 한 집단을 좀먹게 한다. 가야가 강대국으로 성장하지 못한 배경에는 이런 비효율적인 시스템도 분명 작동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저 오래 전의 역사라며 거리를 두고 가야의 순장 문화를 손가락질하는 선에서 끝나면 안 된다. 현대판 순장도 분명히 존재한다. 한 조직의 대표가 바뀌면 조직 내 정치질에 따라 인재의 능력여부와 상관없이 물갈이 되는 집단들이 있다. 이런 문화는 가야의 순장만큼이나 조직을 무능하게 하는 악습이다. 우리가 비난하는 역사의 어두운 단면이 현재에도 계속 반복되고 있진 않은지 고민해볼 수도 있어야 한다.


대성동고분군 모형


대성동고분군의 무덤들은 주로 4세기에 집중되어 있다. 출토유물 중에는 서역의 로만글라스, 북방부여계 유물인 청동솥,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는 돌촉과 동기 등 다양한 외국의 유물들이 발굴되는 것으로 봐서 4세기까지 가야의 교류 범위가 남달랐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낙동강레일파크와 김해와인동굴

어느덧 식사시간이 훌쩍 넘어 밥부터 빠르게 해결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근처에 '남광식당'이라는 낙곱새를 파는 유명한 노포집이 있다고 들어 일행과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힘을 얻어 소화도 시키고 후식도 먹을 겸 미리 예매해둔 낙동강레일파크와 김해 와인동굴로 향한다.


예약한 레일파크 시간까지 조금 남아 있어 와인동굴을 먼저 투어했다. 김해의 와인동굴은 산딸기에 집중한 와인동굴이다. 산딸기는 김해의 특산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산딸기를 생산하는 곳이 김해이다. 1960년대 김해 상동면의 한 농부가 시작한 산딸기 농사가 크게 성공했고 1994년부터는 '왕딸'이라는 품종이 발견되어 김해시에서 산딸기 산업을 집중 육성해왔다고 한다. 현재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도 이어가고 있다.


김해의 와인동굴은 이 산딸기를 이용한 와인을 저장한 동굴이다. 볼거리가 많고 와인동굴과 이어지는 열차 카페에서도 산딸기를 이용한 여러 음료들을 판매하고 있다. 운전을 하다 보니 와인을 먹진 못하고 구매만 한 뒤 카페에서 산딸기 음료들을 마시고 시간 맞추어 낙동강 레일파크의 레일바이크까지 즐겼다.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가장 큰 강으로 우리나라 4대강 중 하나이다. 소백산맥에서 발원하여 경상도를 수직으로 가로지르곤 김해와 부산 사이에서 바다로 이어진다. 강은 상류, 중류, 하류 권역별로 다양한 퇴적 및 침식지형을 만드는데 하류에서는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서 '삼각주'라는 퇴적지형을 만든다. 삼각주는 바다제거량보다 하천퇴적량이 많아야만 형성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조차가 크기 때문에 삼각주가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 아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삼각주가 바로 낙동강 삼각주다. 삼각주 근처는 하천이 자주 범람해 주변에 평지가 생기고 평지의 흙은 상당히 비옥하다. 그래서 낙동강 삼각주 인근의 평야를 김해평야라고 하는데, 오랜 세월 이 김해는 김해평야의 덕을 크게 보고 있었다. 김해에서 금관가야라는 나라가 탄생하고 번성한 것도 이상할 것 없이 자연스러운 자연조건이다. 














진영역철도박물관


첫째날의 마지막 코스로 김해의 유명한 폐역 '진영역'을 찾았다. 진영역은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제가 군수물자를 운반할 목적으로 만든 철도 간이역이었다. 해방 이후로도 계속 활용하다가 2010년 설창리로 이전하였고 이전까지 진영리에 있던 구역사는 철도박물관으로 개관하였다. 진영역의 시작에서부터 구역사 시절의 여러 자료들을 전시하는 아담하지만 알찬 박물관이다. 무엇보다 역사 파사드 색감이 아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진영역 앞에서 예쁜 사진을 건지기 위해 줄을 선다.



저녁으로는 김해의 노포로 이름을 알린 돼지고기 맛집 '삼일뒷고기'에서 거하게 먹고 숙소로 들어가 이튿날을 위한 휴식을 가졌다. 물론 낮에 구매했던 산딸기와인과 함께!



금관가야에 대한 완전한 이해, 국립김해박물관

둘째날 다시 김해 시내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충분한 관람시간을 위해 첫째날엔 일부러 가지 않았던 국립김해박물관이다. 개관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곤 점심 먹을 때까지 있기로 했다. 국립김해박물관은 국립진주박물관과 더불어 경남 지역에 딱 두 개밖에 없는 국립박물관으로, 금관가야를 테마로 한 박물관이며 가야 유물을 전시하고 소장 중인 박물관 중에선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2층 구조에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총 31개의 챕터로 나누어 (금관)가야를 아주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가 설계되어 있다.



국립김해박물관에는 정말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기에 몇 가지 포인트들만 꼽아 설명하고자 한다. 먼저 가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철제유물이다. 현재까지 출토된 삼국사기 시대의 철제갑옷 중 75%가 가야의 유물이라고 한다. 가야의 성장원동력이 철이었던 만큼 가야는 철의 활용도가 남달랐다. 삼국시대 철갑옷은 쇠붙이 판으로 전체 통으로 만든 판갑과 여러 개의 작은 철판들을 하나하나 이어붙인 찰갑 두 종류가 있다. 가야의 대성동고분군에서는 판갑과 함께 목가리개, 투구 등이 함께 출토되었으며 말머리가리개, 말안장 등도 나오는 것으로 가야의 기병대는 말도 철제무장화했음을 알 수가 있다. 전투용 철제무기뿐 아니라 가야에서는 '미늘쇠'라는 가야 고유의 철제장식품도 있다. 하나의 긴 철판 테두리에 마치 갈퀴를 연상시키는 작은 갈고리 모양의 철제품들을 달아놓았다.


가야의 투구, 미늘쇠 장식, 가야의 갑옷


두 번째는 금동관이다. 어느 나라나 지배층의 문화수준이 표상하는 유물이 금동관이다. 신라의 금동관이 유명하지만 가야도 가야만의 개성적인 금동관이 출토되었다. 어쩌면 가장 유명한 가야의 금동관은 수직을 이루며 올라가는 양팔과 뫼 산(山)자 모양을 만드는 금동관일 텐데, 이 금동관은 김해가 아니 경북 고령지역에서 출토되었으며 국립김해박물관에 있는 유물은 복제품이고 진품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국립김해박물관의 금동관 중 진품은 부산 복천동고분군에서 출토된 금동관이다. 부산은 비록 금관가야의 태동지가 아니지만 금세 금관가야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왔기 때문에 부산의 복천동고분군 역시 금관가야의 유물들을 대표하고 있다. 이 고분군은 3개의 세움장식이 출(出) 자 모양으로 뻗쳐있는데 신라의 금동관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에서 과연 금관가야의 태동지인 김해와 다르게 신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산 복천동고분군 출토 금동관(진품) - 고령 지산동고분군 출토 금동관(복제품)

세 번째, 금관가야도 독특한 청동장식품들이 있었다. 어쩌면 독창성 면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훨씬 튄다. 대롱모양동기, 바람개비모양동기 등의 청동기 유물들인데 이러한 형태의 청동기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힘든 드문 유물이다. 


네 번재는 가야의 토기다. 청동기 시대까지 쓰인 토기는 철기시대로 넘어오면 더 강력한 화력을 이용한 우수한 '도기(질그릇)'로 발전하였다. 색깔도 지역을 불문하고 짙은 색에서 옅은 회색으로 변색되었다. 이를 와질도기라고 한다. 이런 회색빛깔의 와질 질그릇은 특히 경상도 지방, 신라와 가야에서 발달했다. 가야를 심지어는 '도기의 왕국'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더 선진화된 사회의 구성원들은 점차 고차원적인 미를 탐구했다. 쇠뿔장식을 가미한 포인트, 형태의 볼륨감 등을 살리며 와질도기는 다채롭게 진화했다. 한반도 남부지방에선 오리모양 도기들도 많이 제작되었는데, 고대인들은 이 오리를 신성스러운 동물로 여겼다고 한다. 도기로 상형한 오리들은 물론 평범한 오리는 아닌 닭벼슬을 올린 상상 속의 오리다. 시간이 더 흐르면 도기 굽는 기술이 더 발전해 더 단단한 형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이전의 와질도기와 구부하기 위해 강도에 따라 연질도기, 경질도기로 구분하였고 경질도기는 색깔도 어두워져갔다. 



가야 초창기 연질도기를 대표하는 도기는 '굽다리접시'다. 굽다리접시는 신라와 가야가 형태가 살짝 다른데, 신라의 굽다리접시는 수직적이고 굵직한 반면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짧고 옆으로 퍼져 있는 이미지가 강하다. 조금 더 발전하면 둥근 몸체에 긴 목을 단 이른바 '긴목항아리'가 등장하고 전문가들은 가야의 긴목항아리로 도기사의 미적 정점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신라의 긴목항아리는 각이 진 것이 많고, 가야의 긴목항아리는 대체로 부드럽고 곡선미가 강조된다. 가야의 도기는 백제로부터도 영향을 받았고, 백제의 영향으로 그릇받침대가 대량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야의 도기는 언뜻 봐서는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 모를 정도로 그릇받침대라고 하기엔 규모가 크고 조형적 예술성이 극대화되어 있다. 마치 고대 이집트의 유물 같기도 하다.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재치넘치는 모양의 잔들도 많이 출토되었다. 



가야의 토기는 일본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 고대의 스에키 토기가 가야 양식과 동일하다. 김해의 금관가야인들은 몇 번의 환난들이 있을 때마다 일본으로 건너갔다. 금관가야가 한국의 고대국가들 중 가장 먼저 일본과 교류를 틀었기에 그 사이가 밀접했다. 일본에선 이들을 도래인이라고 불렀는데 가야 도래인들이 주로 정착하던 곳은 규슈 북부, 오사카, 교토 등이었다. 이중에서도 오사카의 이즈미에선 마치 가야인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법한 가야와 동일한 양식의 토기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마지막으로 눈여겨보야할 유물은 집 모양 토기이다. 창원에서 출토된 높이 18cm의 작은 집모양토기는 고대 우리 조상님들의 주거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데, 높은 말뚝을 박고 그 위에 집을 지은 수상가옥 형태다. 한반도 남부지방은 북부에 비해 강수량이 많았고 이렇듯 오늘날 열대 지역에서나 볼 수 있는 수상가옥이 고대 한반도 남부에 분포해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국립김해박물관 뒷편으로 올라가다보면 과거 가라국의 촌장들이 구지가를 부르자 수로왕의 알이 내려왔다는 구지봉도 있다.



김해를 굽어보는 분산성

둘째날 점심으로는 항아리수제비가 맛있다는 배가네흥동수제비에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김해에서 소문난 카페 헤이브가 있다고 해서 커피로 후식을 마시며 소위 인스타 사진을 열심히 찍어본다. 날이 더웠는데 카페에서 쌩쌩한 에어컨 바람 쐬고 마지막 여행코스인 분산성으로 올라간다.



분산성은 가야인지 신라인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시대 전기 박위가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성을 보수강화하였고, 임진왜란 때 큰 피해를 입자 흥선대원군의 섭정기간이었던 고종 8년 수리한 성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분산성을 걸어서 올라간다면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으나 차를 타고 가면 가장 유명한 포토존까지 쉽게 갈 수 있다. 성벽 위에 올라가 김해시와 낙동강을 한 번에 굽어보며 이틀 김해 여행을 되돌아보며 완벽한 마무리를 할 수 있다.





철과 중계무역으로 성장한 김해의 구야국은 가야로 거듭났고 인근 소국들과 연맹하였다. 이 연맹을 전기 가야 연맹이라 하며 맹주국은 단언 김해의 금관가야였다. 신라가 금관가야와 경쟁하며 같이 성장했고 4세기경 신라가 금관가야를 국력 면에서 앞지르기 시작했다. 그 배경엔 신라의 성장도 있었만 금관가야의 쇠퇴가 더 크게 작용했다. 4세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야의 주된 바이어 중 한반도 중부에 있던 중국의 괴뢰정권 '낙랑군'이 있었다. 그간 가야는 낙랑과 일본을 중계하며 낙랑으로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드렸다. 그런데 4세기 초 이 낙랑군이 고구려에게 완전히 병합되었다. 가야는 더 이상 중계무역을 할 수 없었고 중국과의 교역 창구도 단절되어버렸다. 금관가야는 오히려 고립되고 말았다. 일본이랑만 교류할 뿐이었지만 한 나라와의 관계는 도움이 되질 못했다. 더불어 4세기는 백제도 성장할 무렵이었고, 4세기 중후반 백제의 근초고왕은 백제의 최전성기를 누렸다. 황해를 백제가 장악하여 김해의 가야는 더 이상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드릴 수가 없었다. 점점 국경선을 맞대어가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시간이 지나며 전쟁이 격화되었고 주로 물자의 움직임은 바닷길보다는 내륙에서 이루어졌다. 내륙에서 멀리 떨어진 금관가야는 더 쇠퇴하였고 백제와 신라 사이에 낀 애먼 존재가 되었다. 대신에 내륙지방의 소국들이 성장했고 이 가운데서도 백제의 비호를 받던 경북 고령 지역의 소국이었던 반파국이 주도권을 쥐었다. 5세기가 되면 낙동강을 주름잡던 금관가야의 영광은 어디로 가고 더 이상 가야 연맹을 이끌어 갈 국제적 지위를 이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전기 가야 연맹은 해체되고 경북 고령의 반파국이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끌어갔다. 그렇게 쇠퇴하던 금관가야는 532년 신라의 법흥왕에게 병합당한다. 격해지는 6세기 한반도의 전세에서 희망을 보지 못한 금관가야의 10대왕 구형왕은 저항을 그만두고 법흥왕에게 항복하면서 금관가야의 역사는 끝이 났다.


이제 가야에 대한 오해를 풀고자 한다. 글 초반에 언급했던 'XX가야'는 전부 잘못된 표현이다. 당시에는 고유의 국명이 따로 있었고 'XX가야'는 후대에가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존재하던 소국들을 뭉뜽그려 부르기 위한 용어였다. '가야'는 따라서 김해의 구야국에서 출발한 금관가야만을 가리킨다. 애당초 '가야'라는 단어가 금관가야의 전신인 '구야'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5세기경 금관가야는 쇠퇴하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소국들은 경북 고령의 반파국이 연맹을 주도했다. 금관가야의 위상은 추락했지만 한때 연맹을 이끌었던 '가야'의 상징성은 있기에 반파국만이 '가야'의 이름을 뺏어와 스스로를 '대가야'라고 불렀다. 굳이 분류하자면 가야는 금관가야와 대가야 둘 뿐이다. 가야는 금관가야이고, 곧 김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강창훈 <철의 시대>

가야는 역시 철의 나라입니다. 철에 관한 책 중 추천드리는 도서입니다. 철을 깊게 파고들면 일반인 수준에선 이해하기 힘들기 때문에, 읽기 쉽고 편안하면서도 그렇다고 결코 내용이 얕지도 않은 유익한 '철 입문서(?)'입니다. 철에 대한 탄생에서부터 인류가 어떻게 철과 연을 맺어왔는지,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비단 철의 자연과학적, 인문적 의미만을 떠나 철이 그간 어떻게 인류의 삶과 지구환경을 파괴했는지에 대한 성찰까지 다루고 있죠. 이제 철은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없어선 안 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물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앞으로도 인간은 철을 포기하지 못할 텐데 철의 중요성과 함께 우리에게 '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민해보게 하는 책이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서극 감독의 <서극의 칼>

홍콩 무협영화의 일인자 서극 감독의 작품입니다. 주인공은 서극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황비홍' 캐릭터로도 큰 사랑을 받은 주문탁 배우가 연기합니다. 무협영화의 무술은 현실성이 떨어져 몰입이 힘든 단점이 있지만, 액션연출 방식에 따라 몰입도는 천차만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서극의 칼>은 주인공이 아버지의 복수를 하러 간다는 클리셰 모티프지만, 외팔 주인공 모티프는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가 강렬합니다. 편집과 액션연출이 워낙 현란에 과잉으로 느낄 수도 있지만 배우들의 연기도 실감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설정과 전개상의 구멍은 애교로 넘기게 된답니다. 현실적인 액션을 좋아하신다면 무협영화의 액션이 우스꽝스러워 보이시겠지만 무협영화 장르의 액션에 대한 존중이 있으시다면 분명 만족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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