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의 음악을 여행하다
여행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는 오감 중 하나를 선택해 테마로 삼아보는 것이다. 한 가지 감각에만 집중해서 감각의 시선으로 여행지를 느껴보면 여행이 그렇게도 풍부해지고 입체적일 수가 없다. 이번 여행은 청각으로 정했다. '청각의 여행이라니!' 음악을 들으면서 돌아다니겠단 뜻이 아니다. 혹시 평소엔 내가 듣지 못한 소리가 있진 않았는지, 내가 미처 잊고 있던 소리가 있진 않았는지 등 미세한 소리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그 다음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사연이, 아름다움이 전해주는 들리지 않는 소리와 노래를 상상해보고자 한다.
쨍쨍한 햇볕이 세상을 쏘는 무더운 8월. 충북 제천을 다녀올 일이 생겼다. 제천에선 어떤 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까
제천고속버스터미널에서 차로 고작 10분 거리에 장락동칠층모전석탑이 있다. 거리와 소요시간을 보면 시내 한 가운데 있다는 뜻이다. 한 가운데까진 아니지만 시내와 하천 하나로 붙어 있는 벌판에 제천장락동칠층모전석탑이 우뚝하게 서있다. 탑을 모시던 절은 폐사지가 되어 황량하지만 높이 9m의 웅장한 이 모전석탑 하나만으로 공간이 가득찬다. 모전석탑이란 벽돌 모양의 석탑을 말한다. 벽돌로 쌓는 전탑은 주로 중국식 양식이고 돌로 쌓는 석탑이 우리나라 고유의 양식인데 모전석탑은 중국에서 유행하던 양식을 한국식에 맞춰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모전석탑으로는 경주의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9~10세기 신라 말 하대에 가면 고전양식에 도전을 가하는 다양한 미술사 양식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일종의 매너리즘 혹은 바로크적 성향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갈래 중 하나로 경북의 북부지역에 모전석탑이 유행했다. 특히 안동에 집중되어 있다. 제천도 경북의 북부와 붙어 있으니 그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한다. 아니나다를까 제천의 장락동칠층모전석탑은 10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단다. 모전석탑들은 하나 같이 장중한 것이 그 멋이다.
어쩌면 제천에 오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이 의림지일 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론 의림지가 제천을 대표하는 관광지였다. 의림지는 제천에서 가장 큰 저수지로 조성연대가 무려 고대 삼국시대이다. 김제 벽골제,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한국의 3대 고대 저수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규모가 크다 보니 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수풀과 조화를 이루어 자연친화적인 경관을 만들고 산책하기 좋은 코스가 생겨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의림지를 찾았다고 한다. 의림지는 용두산이 평지와 맞닿는 선상지 지형에 조성한 저수지로, 주변의 많은 농지에 물을 관개하고 있다. 관개면적이 담수면적의 13배라고 하니 관개효율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며 실제 제천 땅은 의림지의 덕을 톡톡이 봤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의림지의 관개량에 대해 "의림제(義林堤)라 한다. 길이가 5백 30척이며, 논 4백 결에 물을 댄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천의 옛 이름인 '내토'는 '둑'을 의미하는데 곧 의림지를 지칭하는 것이며, 충청도의 별칭인 '호서 지방'에서 '호'가 바로 의림지를 가리킨다. 이 정도로 충청도에서 의림지의 위상이 남다르다.
의림지의 면적은 13만 제곱미터로 규모가 남다르다보니 전체를 둘러보는데 빠른 걸음으로도 약 40분은 소요되고 중간에 '의림지역사박물관'까지 있으니 의림지 투어만 넉넉하게 한 시간 이상 구경할 수 있다. 마냥 걷기만 할 뿐이 아니라 구역구역별 보이는 뷰가 다르고 즐길 수 있는 관람거리도 저마다 다르게 구성해두었다. 아이들이 환장하는 유원지에서부터 어르신들이 신나게 사진을 찍는 나무다리 위, 연인들이 풋풋하게 커피를 마시는 카페, 전문사진가들이 작품 건져가는 스팟까지 말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진흥왕 때 가야금을 만든 우금이 조성했다는 의림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와서 1972년 개축 및 보수공사를 진행하였다. 조선시대 때의 개축공사에서는 체찰사로 파견된 정인지가 무려 1500명의 군인들로 작업했다고 한다. 1972년 공사는 홍수로 둑이 터져 보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공사 과정에서 의림지 바닥과 조성원리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고대조상들의 과학적 슬기에 모두가 감탄했다고 한다.
충청도에는 유독 선교사들이 순교를 당했던 성지들이 많다. 충청도 중에서도 경북, 강원과 붙어 있는 충북지역에 더 두드러진다. 아마 산간지역이라 숨어있기 유리해서일 수 있다. 충북의 성지들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조선후기 가장 큰 천주교 박해사건이었던 신유박해와 얽힌 제천의 배론성지이다. 1801년 정조가 죽고 그의 아들 순조가 재위한 원년에 일어났던 신유박해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천주교인들이 희생된 순교사건이었다. 정조가 죽자 정조의 정적 붕당이었던 노론 벽파가 득세하였다. 노론 벽파는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를 구심점으로 모여들었고, 정순왕후 김씨는 정조의 측근들을 조정에서 몰아내기 위해 꺼내들었던 카드가 천주교였다. 정조는 재위기간 모든 붕당을 두루 등용하겠다는 탕평의 기치 아래 비주류 붕당이었던 남인들을 등용했는데, 한동안 정치 일선에서 배제되어있던 남인이었기에 이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몹시 많았다. 1801년 정약용의 작은 형 정약종의 집에서 '무부무군'이라는 낙서가 발견되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무부무군이란 아비와 임금이 필요없다는 뜻으로 명백한 역모성 글귀였다. 조정은 천주교가 무부무군을 지향하는 사교라며 몰아갔다. 오로지 유교만을 국가의 사상으로 간주하던 조선에서 서양의 종교는 이단시되었고 나이어린 순조의 즉위와 동시에 정순왕후 김씨는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때의 사건을 신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신유박해'라고 하며 조선의 두 번째 천주교 박해사건이었다. 신유박해로 청나라에서 온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포함해 약 300~400명의 교인들이 순교했다.
이때 피해를 봤던 가문 중 정약용 가문도 있었다. 정약용 3형제 중에서 맏형 정약전과 막내 정약용은 젊은 시절 천주교 세례를 받았지만 곧바로 천주교보다는 실학에 몰두했다. 반면 둘째였던 정약종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심지어 정약용 남매 중 맏딸의 남편이 한국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이었다. 아직 조선은 선교사들이 들어오지 않은 동방의 나라였다. 1784년 사신으로 청나라를 방문하는 아버지를 따라간 이승훈은 청나라에서 세례를 받았고 세례명은 베드로였다. 이승훈은 딱히 천주교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만은 않았지만 신앙심만큼은 질실해 귀국 후 조악하게나마 성당을 만들고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천주교에선 제사를 금한다는 교리에 실망하곤 천주교를 배격했다가 그럼에도 제일 먼저 서학(천주교)의 세례를 받아왔단 이력으로 인해 천주교 관련 무슨 사건이 터질 때마다 엮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801년 이승훈 베드로는 신유박해 때 휘말려 처형되었다. 이승훈과도 집안사람이고 오히려 이승훈보다도 더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던 정약용의 둘째형 정약종도 참수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은 지금은 천주교에서 배교한다는 사실이 참작되어 참수형은 면하고 정약전은 전남 완도군의 신지도로, 정약용은 포항으로 유배령을 받았다.
신유박해로 인해 대대적인 천주교 수색작업이 있자 많은 천주교인들이 탄압을 피해 몸을 숨겼다. 그중 한 곳이 제천의 배론이었다. 배론에 숨어들었던 천주교인 황사영은 배론의 토굴에 은거하면서 청나라에 있는 선교사에게 작금의 조선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작성해 부치기로 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선을 넘었는데, 본인들을 구하고 조선을 천주교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어서 빨리 서양의 외국군대가 들어와 조선을 공격해달라는 것이었다. 이 편지는 청나라로 가지 못하고 적발되었다. 황사영의 죄는 역모죄가 가중되어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으로 사망했다. 이 사건이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문제는 황사영이 정약전-정약용 형제의 조카사위였다. 정약전, 정약용 형제도 죄가 가중되어 정약전은 신안군의 흑산도로, 정약용은 전남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서 사건이 영화 <자산어보>의 배경이 되는 사건이다. 정약전은 흑산도에 있으면서 한국 최초의 해산물 백과사전 <자산어보>를 집필했고, 정약용은 18년간 강진에 유배생활을 하며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수많은 저작물들을 남겼다.
황사영의 백서는 내용을 떠나 소름이 끼칠 정도다. 조악한 명주천에 잘 보이지도 않은 빼곡한 글씨 무려 1만 3000자를 적어내렸다. 얼마나 할 말이 많았으며 그 심정은 얼마나 절박했을까.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해선 동의하기 쉽지가 않다. 군대를 동원해 조선을 침공하고 조선을 외국의 속국으로 삼아달라니. 가슴 속에 신념 하나 각인하고 살아가는 삶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지만 모든 종교와 사상은 극단화되었을 때 문제가 발생하는 법이다. 단 하나의 사상만을 강요하는 정부 방침도 옳다고 할 순 없지만 내 사상을 보호받기 위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라는 건 더 용납될 수 없다. 희생을 묵인할수록 종교와 사상의 정당성은 잃는 법이다. 훗날 많은 이들이 황사영이 숨었다는 배론의 토굴을 찾아헤맸지만 찾지 못했다. 현 배론성지에 토굴을 복원하여 두었다. 황사영의 백서 원본은 지금 로마 교황청에서 보관 중이다.
지금의 배론성지에는 1856년(철종 7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신학교를 세워두었다. 김대건 신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 사제신부였던 최양업은 조선 곳곳을 돌아다니며 고해성사를 주도하고 천주교를 포교하였다. 뿐만 아니라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충청도 출신인 최양업은 제천의 배론에 있던 신학교를 중심으로 가장 많이 활동했다고 한다. 최양업은 박해받아 사형되진 않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포교활동에 매진한 나머지 과로로 1861년 사망하였다. 5년 후 배론의 신학교도 철폐되었다. 최양업의 묘는 배론의 신학교 근처에 두었다. 해방 후부터 최양업의 묘가 있는 곳을 성지로 개발되어 오늘의 배론성지가 자리잡았다. 배론성지 입구에는 2006년 건립된 모던하고 감각적인 형태의 배론성당이 들어서 있다. 순교와 박해의 흔적을 그대로 복원한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어 모던건축의 성당 형태와 공간의 비장미가 묘한 느낌을 내게 한다.
이제 자양영당으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가는 길에 박달재가 있다고 해서 차를 타고 경유해서 가보려고 한다. 고개라곤 하지만 해발고도가 400m가 넘는 만큼 차를 타고 헤매면서 올라갔는데, 그저 지나치기만 하려 했지만 그 경관에 홀려 별수 없이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박달재에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경상도의 박달도령이 과거를 치르기 위해 한양으로 향했는데 경북에서 수도로 가려면 언제나 충북의 산자락을 건너야 한다. 이곳 제천에 이르러 잠시 머무를 때 마을의 처녀 금봉이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두 사람은 미래를 약속하기로 하고 박달 도령은 과거시험을 치러 떠났다. 하지만 박달 도령은 과거에 낙방했고 좌절하며 방황하던 사이 박달 도령이 떠나갔다고 착각한 금봉 처녀가 박달 도령을 그리워하며 이곳 고개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뒤늦게 도착한 박달 도령은 금봉이를 그리워하다 금봉이의 환상을 만났는데 환상을 향해 뛰어다니다 그만 낭떨어지에서 떨어져버렸다.
이 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노래가 1948년 발표된 <울고 넘는 박달재>이다.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의 노래로 이미 대중음악계에서 널리 알려진 음악인들이 작사작곡을 했으며, 노래를 부른 박재홍은 이 노래로 일약 스타덤이 되었다. 작사를 맡은 반야월이 제천에서 헤어진 남녀 커플을 보고 '박달재 설화'를 떠올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박달재 휴게소에서 이 노래가 구슬프게 흘러나오고 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오 소리쳤오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박달재 하늘고개 울고넘는 눈물고개
돌뿌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길아
도라지 꽃이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본다 산울림만 외롭구나
- 박재홍 <울고 넘는 박달재>
전망대라고 해서 겁이 났지만 5분도 안 되어 걸으면 전망 좋은 지점에서 박달재를 조망할 수 있다. 오전엔 날이 다소 흐렸는데 박달재에 오니 날이 맑아진다. 다음 여행지로 기분좋게 넘어갈 수 있겠다. 박달 도령아, 금봉 처녀야, 어디서든 같이 있으면서 어떤 고개든 웃으면서 넘길 바라. 나도 즐겁게 이 고개를 넘을게.
자양영당은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유인석, 이소응 등 6분을 모시는 사당이다. 1906년(고종 43) 근대화로 접어들며 서양의 각종 문물이 한반도에 물밀듯 들어올 때 한 켠에서는 성리학을 고수하고 지키려는 노력들이 있었다. 이런 일환으로 유림들이 성리학의 기강을 바로세우고자 설립했던 사당이 자양영당이고, 처음 건립됐을 때만 해도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 네 사람만을 모셨다. 주자야 성리학을 집대성한 장본인이고, 송시열은 조선후기 성리학의 대들보였으며, 이항로와 유중교는 이제 막 조선이 개항기로 접어드는 시점에 유생들을 대변하여 위정척사의 기치를 내걸었던 성리학자들이었다. 해방 이후 자양영당에 두 사람 유인석과 이소응 두 사람이 추가되었다. 자양영당의 건립 취지를 고려했을 때 두 사람도 '위정척사'라는 연장선 위의 인물임은 알 수가 있다. 두 사람은 누구였을까?
조선과 대한제국이 아직 주권을 완전히 일본에게 넘기지 못하고 여러 제국주의 강대국들에게 휘둘리던 구한말 크게 3번의 의병투쟁이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인한 을미의병, 을사조약으로 인한 을사의병,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인한 정미의병. 유인석과 이소응은 이중 맨 먼저 발생한 을미의병의 주동자들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조선을 둘러싼 판에서 아웃되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전리품으로 요동반도를 할양하려고 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과격한 반일주의자였던 명성황후는 청나라의 힘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이용하기 위해 러시아에게 접근하려다 일본에게 적발되고 말았다. 일본은 낭인들을 고용해 경복궁 안으로 침투시켰고 (궁궐 내에서도 도움을 주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라고, 한 나라의 국모가 낭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되는 치욕적이고 분기탱철할 만한 일이었다. 이토록 분노심이 팽배한 가운데 일본은 친일개혁가들을 내세워 내각을 수립한 뒤 을미개혁을 단행했는데, 개혁안 중 머리를 짧게 자르는 단발령이 성리학자들을 건드렸다. '신체발본수지'를 신념처럼 가슴에 새기고 있는 성리학자들에겐 부모가 물려주신 머리카락을 자르는 일은 차마 수용할 수 없었고 가뜩이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불만이 가득 차있던 찰나에 유인석, 이소응이 의병을 일으켰다. 이 의병이 을미의병이다.
을미의병은 전국적으로 퍼졌고 유인석은 충청도에서, 이소응은 강원도에서 궐기하였다. 유인석이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작전을 모의했던 곳이 제천의 자양영당이었다고 한다. 을미의병 중에서도 유인석이 이끌었던 충청도 제천 방면의 의병부대를 '호좌의진'이라고 불렀는데, 호좌의진은 자양영당을 기점으로 충주까지 진격하는 등 주요 관아를 습격해 점거하고 단발을 한 사람 내지 일본인 관리들을 살해했다. 강원도 춘천에서 궐기했던 이소응도 제천으로 넘어가 호좌의진에 합류했다고 한다. 호좌의진을 비롯해 전국의 의병대들이 모여 서울로 진군하려 했지만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고 해산 명령을 내리며 을미의병은 자진해산했다.
의병과 독립운동은 개념이 다르다. 독립운동은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에 국민을 나라의 주인으로 삼는 공화국 정부를 완전히 새로 수립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이들이었고, 의병은 국왕 중심의 조선(혹은 대한제국)을 회복시키겠다는 근왕적 성격이 더 강했다. 따라서 의병은 필연적으로 보수적 가치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고종의 해산권고에 자진해산한 것만 봐도 의병에게 가장 중요한 건 왕실의 회복이었다. 그런 만큼 의병은 성리학자들이 주도하는 구조였다. 주자, 송시열, 이항로, 유중교에 이어 구한말 최초의 의병을 대표한 유인석과 이소응이 함께 모셔진 것이다. 의병의 이념이 다소 시대착오적인 부분이 있어 비판을 많이 받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정의에 대해 목숨을 걸 정도로 지키려는 소신은 박수받아야 하며,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발판 역할을 했다는 의의만큼은 무시할 수 없다.
둘째날 하늘을 보니 어제보다 맑아 하늘색이 아주 선명하다. 사람들은 가을 하늘이 높고 푸르다지만 여름의 하늘만의 짙고 깊은 멋도 있다. 혹시 날이 흐려질 수 있으니 아직 하늘이 쨍쨍하게 멋부릴 때 청풍호로 출발한다. 충청도는 '호서지방'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가 많다. 옛말의 '호서'에서 '호'는 의림지를 일컫는 말이지만 이제 충청도의 호수라 함은 청풍호가 대표하지 않을까 한다. 청풍호는 제천을 가운데 두고 충주와 단양이 공유하고 있다. 분명 같은 호수이건만 단양에선 단양호, 제천에선 청풍호, 충주에서는 충주호라고 부른단다. 청풍호를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다. 단양 편에선 유람선을 탔으니 이곳 제천에선 케이블카를 타볼까 한다. 여행에서 케이블카는 치트키다. 그중에서도 난 통영의 케이블카와 제천의 청풍호케이블카를 제일로 취급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청풍호를 굽어보면 놀라운 광경이 펼쳐진다. 호수 하나로 이토록 웅장함을 느끼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다. 바다에선 늠름한 산을 볼 수 없고, 산에선 우아한 물을 볼 수 없는데 호수에선 파란 물과 신록의 우거짐을 동시에 볼 수가 있다. 더 놀라운 건 서 있는 지점에 따라 청풍호가 전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 청풍호는 자연호수가 아니라 인공으로 조성한 저수지다. 1978년 공사를 시작해 1985년 완공한 충주댐의 저수지로 전국 15개의 다목적 댐 가운데 소양강댐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은 저수량을 가지고 있다. 댐으로 만든 인공호수는 길이가 무려 65km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호수다. 이 정도 크기만큼의 마을이 수몰되었다는 뜻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청명한 호수이건만 저 깊은 수위의 물 아래에는 수몰된 마을들이 잠겨 있다.
넓은 면적의 마을들이 수몰되면서 유물들을 빼내야만 했고 새로운 곳으로 이전해 모아두어야 했다. 충주, 제천, 단양에선 각 관할권 내의 유물들을 따로 관리하고 있다. 제천에서는 청풍호문화재단지를 조성해 유물들을 옮겨 모아놨다. 청풍문화재단지 안에는 수몰지에 있던 43점의 문화재와 4채의 전통 민가, 그리고 생활유품 1600점을 모아둔 역사공원이다. 케이블카만큼 높은 곳에 있진 않지만 둔덕 위에 공원이 있어서 케이블카에서 보이는 경관과는 또 다르게 한층 낮아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한때 청풍부로 진입하는 정문 팔영루를 지나 공원을 전체 다 도는데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팔영루로 들어와서 왼쪽으로 더 걷다 보면 한벽루가 있다. 제천 청풍의 한벽루는 진주의 촉석루, 밀양의 영남루와 더불어 한국의 3대 정자로 손꼽히고 있다. 3대 정자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일반적인 정자보다 큼지막하면서도 우아하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문인들이 청풍의 한벽루를 찾고 저마다의 소회를 적은현판을 남기었다. 본디 정자란 정자 자체보다 정자에서 보이는 경치가 더 중요한 법이거늘 한벽루는 건축적으로도 이곳에서 보이는 경치 못지않다. 물론 한벽루의 원래 위치는 이 자리가 아니었다. 이젠 조선시대 문인들이 즐겼던 경치를 볼 수 없지만 지금은 우리 선조 문인들이 보지 못한 충주호를 감상할 수 없으니 시대에 따라 문화재와 예술을 즐기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제천에서는 매년 8월 중순 제천국제음악영화제를 개최한다. 국내 특정 테마로 한 영화제로는 여성영화제, 환경영화제와 함께 독특한 컨셉을 유지하는 영화제다. 2005년 시작하여 메가박스 제천, CGV 제천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의림지와 청풍호에서 콘서트 및 부대행사를 진행한다. 참여 관객들과 자원봉사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으며 음악과 영화의 결합이라는, 흥과 오락의 끝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가수들의 라인업도 국내 영화제 중에서 가장 화려하며 여러 국가들의 다양한 음악장르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국내 독보적인 영화제라고 할 수 있다. 음악영화 아카데미와 제작지원을 통해 영화 생태계에도 일조하고 있으며, <원스> <서칭 포 슈가맨> <프랭크> 등의 음악영화들을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제천 여행의 시기를 꼭 8월로 잡는 이유가 바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때문이다. 영화제 특유의 페스티벌 분위기 속에서 경쾌한 여행의 음악이 비트에 맞춰 박동해주니까!
여행에서 만나는 공백을 상상으로 채우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다. 제천에서 다양한 들리지 않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의림지, 청풍호, JIMFF에서는 즐겁고 경쾌한 축제의 소리를 들었다면 박달재, 배론성지, 자양영당에선 한맺힌 소리를 들었다. 더 세분화한다면 세분화할 수도 있다. 의림지에선 소소한 바람에 가벼운 수풀들이 서로 부딪히거나 호수의 잔잔한 울림의 미세한 소리를 들었고, 청풍호에선 호방하고 탁트인 호연지기의 소리를, JIMFF에선 음악과 영화가 하나가 된 예술의 소리를 들었다. 박달재에선 사무친 사랑의 노래가, 배론성지에선 간곡한 순교의 절규가, 자양영당에선 나라를 지키기 위한 뜨거운 의(義)의 함성을 들었고 말이다.
평범한 여행지를 그냥 지나칠 수도 있지만 그곳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해본다면 분명히 들리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소리가 소음으로 들릴지 노래로 들릴지는 듣는 이의 심리에 따라 좌우된다. 같은 곳이라도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선율을 들을 수도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에 귀기울일 때 여행은 예술이 된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정병설 <죽음을 넘어서, 순교자 이순이의 옥중편지>
이순이는 1801년 신유박해 시절 순교한 양반 가문 출신의 여인입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전주로 시집을 갔는데 천주교를 믿었던 이순이는 신유박해에 휘말려 순교하였죠. 이순이의 남편 유중철과 그 집안도 천주교를 믿었습니다. 가족과 일행이 뿔뿔이 흩어지고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이순이는 집에 계신 어머니가 걱정되어 옥중에서 어머니에게 쓴 편지가 남아 전해집니다. 훗날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한국천주교사>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 이 편지는 신유박해 당시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있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눈물의 사서입니다. 대개 조선시대에는 사형수들은 이미 혹독한 고문을 받아서 사형장으로 오기까지 반송장 상태로 실려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순이는 오직 순교만을 바라며 여자로서 그 힘든 고통을 받으면서도 꼿꼿하게 사형장에 도착해 차라리 죽음을 덤덤하게 받아드렸다고 합니다. <죽음을 넘어서, 순교사 이순이의 옥중편지>는 이순이의 편지를 분석해 조선후기 사회상과 천주교의 양상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서 이순이 개인의 숭고한 신앙심을 통해 인간상을 탐구해봅니다. 저자 정병설 교수님은 신학과 교수도 그렇다고 천주교 신자도 아니라고 합니다. 무교인 저도 이 책을 감동적으로 읽은 건 특정 종교를 찬양하는 내용이 아니라 인간의 위대한 믿음, 그리고 깊은 질실함을 감동적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말릭 벤젤룰 감독의 <서칭 포 슈가맨>
한동안 인기를 끌었던 음악예능 <슈가맨> 제목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음악 다큐멘터리영화입니다. 일반적인 음악 다큐멘터리영화는 유명한 음악인의 생애 혹은 예술관을 다루지만 이 다큐멘터리영화는 조금 독특합니다. 미국에서 소수 음반관계자들을 제외하곤 대중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가수 로드리게즈. 그런데 뜻밖의 나라에서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독재와 인종차별로 상처 가득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로드리게즈의 음악이 사랑을 받았고 이미 대스타였던 겁니다. 노래제목에서 따와 남아공 사람들은 로드리게즈를 '슈가맨'이라고 불렀습니다. 미국에선 도저히 음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어서 청소업무를 하며 노숙생활을 하던 무명가수 로드리게즈는 남아공에 초청되어 대규모 콘서트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남아공에서 공연 후 로드리게즈는 잠적하는데, 이 때문에 남아공 콘서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퍼졌죠. 로드리게즈가 세상에 나오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영화를 통해 확인해보세요. 예술이 아무리 고결해도 인간이 만든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 만든 사회로부터 절대 동떨어질 수 없음이 예술의 본질과 운명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