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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Nov 28. 2022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안산-시흥 편]

낙조의 속마음을 여행하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인지라 다양한 모습의 바다들을 구경할 수 있다. 그렇다고 세 가지 모습의 바다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동해안 내에서도, 서해안 내에서도, 남해안 내에서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갯벌과 낙조로 유명한 서해안은 경기권, 충청권, 전라권 모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다채로운 서해안을 즐길 수 있지만 그 차이를 알아보려는 경우는 별로 없는 듯하다. 언제나 여행은 질문하는 자에게만 더 풍성한 즐거움이 찾아오는 법이다.


서울을 사는 나에게 조개구이가 땡기거나 갯벌과 낙조의 어우러짐을 보기 위한 곳으로 경기권의 서해안만한 곳이 없다. 친한 동생 중 한 명은 한 때 시간이 나면 언제나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가서 부담없이 오이도를 즐기고 온다고 한 적이 있었다. 여행의 묘미를 잘 알지 못하던 때에 지하철은 오로지 서울 내에서만 이동할 때 타는 교통수단으로 여기던 나에게 그처럼 쉽게 경기도로 간다는 말에 충격을 먹은 기억과 자유로움을 선망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서 와서는 나에게도 경기권 서해안은 친근하고 소중한 곳이 되었다. 경기권의 서해안은 지하철을 타고 쉽게 갈 수 있다는 접근적 용이함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 매력이 다른 곳에 비해서 보잘 것 없지 않다. 오히려 이토록 훌륭한 여행지를 부담없이 즐길 수 있다는 축복에 감사해야 한다. 내가 속한 어느 모임이든 오랜만에 여행 가자는 여론이 만들어지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멀리 가기 부담스러울 때는 나는 언제나 오이도나 대부도를 추천하곤 한다. 오이도와 대부도를 잇는 시화호방조제를 얼마나 오고 갔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아직까지도 전부를 알고 있다는 자신할 수 없는 섬들이다. 마침 전어철이 한창인 가을 친한 일행들이 여행을 가자는 말에 무려 2박 3일 일정의 안산과 시흥 여행 일정을 내가 주도해보기로 하였다.




브나로드의 최전선, 최용신

서울에서 안산-시흥 쪽으로 향하면 동선상 안산 시내를 먼저 들른다. 안산 시내에선 두 곳의 박물관을 탐방할 계획인데 먼저 상록수 역 근처의 최용신기념관이다. 기차역 '상록수'는 1930년대 브나로드 농촌계몽소설이었던 심훈의 소설제목 <상록수>에서 따왔다. 심훈 개인적으로는 안산과 연고가 없는데 무슨 연유로 이 지역 지하철 이름에 소설의 제목 '상록수'를 붙였을까. 바로 최용신 선생과 관련이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인들의 교육수준을 높이자는 교육진흥론이 대두되었다. 고등교육의 기회를 열어보자면 대학교 설립 운동이 있었는가하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사의 주도로 농촌의 문맹률을 퇴치하자는 운동이 1920년대 후반부터 진행되었다. 조선인이 일제강점기의 초등학교였던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비율이 1920년대까지 10%가 되지 못했고 1920년대 중반부터는 10%를 겨우 넘어섰으나 20%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문맹률을 정확하게 추산할 수 없고 온전히 믿을 수도 없지만 한글조차 모르는 조선인의 비율은 결코 적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방으로 갈수록 까막눈들의 수는 훨씬 심각했다.


1928년 동아일보는 ‘글장님 없애기 운동’을, 1929년 조선일보는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했다. 동아일보의 ‘글장님 없애기 운동’은 ‘문맹퇴치운동’의 의도적인 순우리말 번역의 이름으로 진행되어 각 지방에 배포할 선전포스터를 제작하고 곳곳에 삐라를 뿌렸다. 문맹률을 낮춰야 하는 필요성을 사설을 통해 계속 각인시켰으며 지방강연을 주도하기도 했다. 전국 300여 개의 동아일보사가 모두 동참하여 문단계에 내로라하는 학자와 교수들 32명을 섭외하여 명사들의 강연활동을 주최했다. 32명 중엔 연희전문학교의 경제학 박사 조병옥, 조선일보사 기자 안재홍, 독립운동가 홍명희, 조선어학회의 최현배, 최남선, 방정환, 등이 있었다. 총독부가 동아일보의 활동을 가만 둘리 만무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의 ‘글장님 없애기 운동’이 러시아 사회주의의 불온한 사상을 연상케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며 모든 강연활동과 선전물 배포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렇게 동아일보의 ‘글장님 없애기 운동’은 몇 개월 지속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겨야만 했다.     


사진출처: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바통을 조선일보가 이어받았다. 조선일보 간부직에는 조선어학회 소속의 어학자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한글 연구와 함께 동조되며 진행될 수 있었다.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구호와 함께 조선일보는 1929년 문자보급운동을 전개하며 방학 중인 전국의 중등학생들을 모아(여기서 중등학생이란 오늘날의 중학생과 고등학생 통칭이다.) 교육봉사에 나서게 했다. 조선일보가 자금을 마련해주는 선에서 중등학생들은 기초적인 한글 교육과 산수 교육을 농촌 어른들에게 알려주며 30년대 초에 있을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의 좋은 선례가 돼주었다. 1930년까지 중등학생 자원봉사자는 900여 명, 1931년에는 1800여 명, 1934년에는 무려 5000명을 넘어섰다. 또한 조선일보는 1930년 <한글원본>이라는 교재를 자체 제작하기도 했다. 4년 후 1934년에는 <문자보급교재> 라는 교재도 발간하여 <한글원본>의 경우 30만 부를, <문자보급교재>의 경우 50만 부를 배포했다. 조선일보는 1929년부터 시작한 문자보급운동으로 단 1년여 만에 1만 명의 문자해독자를 배출해냈다는 통계를 냈다. 1934년까지 헤아려봤을 때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 혜택을 받은 수가 거의 1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20년대 후반 문맹퇴치운동은 20년대 각종 대중화 운동의 물결과 사회주의 흐름에 따라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던 배경도 작용했다. 기존 농민과 노동자들의 생존권은 식민국가의 독립과 별개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들의 의식수준도 높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어왔고 사회주의 계열, 민족주의 계열 지식인들 모두가 이 의견에서만큼은 동참했던 것이다. 교육의 수혜를 비교적 덜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충분한 교육의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열렬한 공감도로 인해 문맹퇴치운동은 브나로드 운동으로 이어졌다.     

1931년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의 ‘문자보급운동’에 자극받아 일부 지식인들을 문맹률이 높은 농촌 지역에 파견해서 글을 가르치게 했다. 이러한 일련의 농촌계몽운동을 ‘브나로드 운동’이라고 하며 러시아에서 앞서 행해졌던 지식인들의 활동을 모델로 삼았다. ‘브나로드’란 ‘민중 속으로’ 라는 뜻의 러시아어이다. 1932년 동아일보는 농촌계몽운동을 위해 투입된 지식인 혹은 학생 자원자들을 ‘학생계몽운동대’라고 명명했다. 1931년 7월 여름방학부터 시작하여 1934년까지 약 4차례에 걸쳐 파견된 브나로드의 대원들은 야학, 강습소, 보습반 등을 만들어 어떤 대가 없이 지방 어른들과 아이들을 교육했다. 교육내용은 맞춤법, 산수, 위생교육 위주였다. 브나로드에 투입된 교육봉사자들은 지금의 고등학생인 중등 4~5학년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생계몽대, 일반인 참가자들로 이루어진 계몽별동대 그리고 학생기자단으로 편성되었다. 피교육자들을 상대로 공모전이나 사생대회, 백일장, 음악회 등을 간헐적으로 여는 등 브나로드 운동은 나름 다채로웠다. <동아일보>는 1931년부터 34년까지 ‘한글공부’, ‘한글맞춤법통일안’, ‘신철자편람’ 등의 한글 교재 210만 부를 출판해 브나로드 운동의 교재로 삼기도 했다.


브나로드 운동을 소재로 만들어진 소설 심훈의 <상록수>는 브나로드 현장의 생생함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상록수>의 주인공이 채영신이 바로 실제 브나로드 운동에 투입되었던 여학생 최용신을 모델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최용신은 한 소설가에게 주인공의 영감을 줄만큼 브나로드의 최전선에 있었다. 최용신은 함경남도 덕원군에서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다. 집안 자체가 근대서구 문물과 사상에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최용신은 일찍이 기독교인의 길을 걸었고 그녀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사립학교의 선생님이었다. 최용신은 마을에 있던 루씨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자고등학교를 나와 1928년 19살 때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졸업 후 서울로 와 협성신학교에서 추가적인 공부를 하며 20대를 시작했다. 협성신학교에서 만난 황에스터 선생님은 최용신에게 브나로드 운동에 동참하라는 제안을 했고, 교육자 집안에서 나고 자란 최용신은 브나로드 운동의 뜻을 깊이 공감해 농촌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 사회는 무엇을 요구하며 또 누구를 찾는가? 사회는 새 교육을 받은 새 일꾼을 요구한다. 여기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자진하여 자기들의 책임의 분을 지고 분투한다면 비로소 완전한 사회가 건설될 줄로 믿는다. (중략) 그러므로 내가 절실히 느끼는 바는 농촌의 발전도 마지막엔 여성의 분투에 있다는 점이다. 오늘에 교육받은 여성들이 북데기 쌓인 농촌을 위하여 몸을 바치는 이가 드문 것은 사실인 동시에 크게 유감된 바이다. (중략) 중등교육을 받은 우리가 화려한 도시생활만 동경하고 안일의 생활만 꿈꾸어야 옳을 것인가? 농촌으로 돌악 문맹퇴치에 노력해야 옳을 것인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손을 서로 잡고 농촌으로 달려가자” 


- 최용신의 <조선일보> 기고문     


최용신은 학업을 잠시 중단하고 지금의 안산인 샘골마을에 파견되었다. 샘골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신식 교육을 받은 여학생에게 차별어린 시선을 보냈다. 최용신은 그 숱한 대우를 참으며 교육봉사에 진정성을 보였고 마을사람들도 그녀의 진심어린 열정과 능력에 감응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최용신은 샘골마을에 학원, 야학, 강습소 설립을 주도했고 마을부녀회와 청년회를 결성해주기도 했다. 샘골마을의 생활이 개선되는데 최용신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그러나 이때의 과로가 무리했던 탓인지 1935년 1월 25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기 전 유언으로는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를 영원히 경영하여 주십시오. 김군과 약혼한 후 십 년 되는 금년 사월부터 민족을 위하여 사업을 같이 하기로 하였는데 살아나지 못하고 죽으면 어찌하나.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 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찌하나. 어머님을 두고 가매 몹시 죄송하다. 내가 위독하다고 각처에 전보하지마라. 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 라는 말을 남겼다. 소설가 심훈은 그녀의 일생에 감동받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상록수>를 집필했다. 현재의 샘골 마을 인근에는 소설 <상록수>에서 따와 ‘상록구’라는 지명이 붙여졌고 근처 지하철 역 이름은 ‘상록수 역’ 이다. 지명으로나마 최용신의 영혼을 샘골 마을에 묻은 것이다. 2007년 안산의 샘골마을에는 최용신기념관이 들어섰다.



브나로드의 열기가 워낙 뜨거워지자 총독부는 야학과 강습소 개최도 불법화시키며 탄압했다. 최종적으로 동아일보 브나로드 운동도 장기적으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또한 정확하게 문맹률을 얼마나 낮추었는지도 추산하기 곤란한 점들이 많아서 그 성과를 계량화하기는 힘들다. 브나로드의 아웃풋을 수치화하긴 어려워도 인풋을 수치화해서 설명할 수 있다. 1931년부터 34년까지 매년 한 차례씩 총 4차례에 걸쳐 브나로드 운동이 진행된 일수가 298일. 그 중 개강한 횟수는 2만 737번이고 투입된 총인력은 5751명이었다. 그리고 수강생 총인원은 무려 97598명, 거의 10만 명에 달했다. 따라서 글장님 없애기 운동과 문자 보급 운동,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던 브나로드운동까지 정확하게 콕 찝어 말할 순 없더라도 분명 양적인 성과는 기념비적이었다.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농촌에 투입되는 전통과 문화는 잔존하다가 지금에는 농촌활동, 이른바 ‘농활’이라는 대학생 문화로 정착했다.


최용신 선생 묘



성호 이익의 실학사상, 성호박물관

최용신 선생에 이어 또 한 명 소개하고 싶은 안산 출신의 역사적 인물로 성호 이익이 있다. 성호 이익은 남인 붕당의 가문 출신으로 조선 후기 숙종-경종 대의 인물이다. 어릴 적 몸이 안 좋아 10살까지 글을 읽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둘째 형 이잠의 밑에서 공부를 하며 학문에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이익이 한창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을 때 스승처럼 따랐던 형 이잠이 장 희빈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가고 말았다. 일전에 이익의 아버지도 정쟁에 휘말려 희생된 적이 있는데 형 이잠까지 훗날 옥사했던 사건을 계기로 이익은 정계 진출을 단념하였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쓰는 사상가의 길을 걷기로 하였다. 남인은 붕당의 정쟁에서 몰락한 남인계열 사대부들은 형이상학적 관념론보다는 현실에 입각한 민생이념을 연구했는데 이를 실학이라고 한다. 성호 이익은 실학의 1세대로 간주되고 있으며 성호 이익을 기점으로 실학이 조선 사상계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성호의 타고난 성품은 기신이 정랑하고 성모는 준결하며, 눈에는 정기가 넘쳐흘러서 영채(英彩)가 사람을 쏘는 듯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조선의 토지문제를 비난하며 새로운 토지정책의 대안을 제시하던 중농학파와 조선의 상공업을 진흥하자는 중상학파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각각 경세치용, 이용후생이라고도 한다. 성호 이익은 전자였다. 전 시대에 조선의 토지문제를 최초로 문제삼았던 반계 유형원의 사상을 높이 사며 성호 이익은 새로운 토지제도의 대안으로 '한전론'을 주장했다. '모든 토지를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어 모든 백성들에게 지급하자'는 반계 유형원의 토지개혁론은 다소 급진적이고 이상적이지만 약간의 수정을 가미해 '영업전'이라는 매매 불가한 토지를 지급해주고 그 외 토지에 관해선 자유롭게 매매를 허용해주자는 이론을 내놓았다. 매매 가능한 땅의 범위에 제한을 둔다고 하여 '한전론'이라고 부른다. 성호 이익의 촌철살인은 토지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다. 조선의 사회를 좀 먹게 하는 6가지 폐단;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문벌 제도, 사치와 미신, 부패한 승려, 인간의 게으름 등을 지적했다. 노골적으로 성리학적 신분 질서를 비판하는 사상이었다. 재야에 물러선 사상가였던 성호 이익은 확실히 언제나 주류에서 벗어난 시선을 강조했다. 역사적 관점에 있어서도 사대주의적인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조선인 고유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실증적이고 비판적인 사관을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이익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해체하는 서양의 천문학에도 관심을 크게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만물과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했던 성호 이익은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그 수많은 글들을 성호 이익의 말년에 조카들이 정리하여 두 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 정책 및 제도의 개혁을 논하는『곽우록』과 조선의 각종 만물을 기록한 백과사전 『성호사설』이 그 두 권이다. 두 권 모두 성호 이익의 엄청난 지식량이 수록된 그의 역작이며 그의 논평들까지도 적혀 있다. 성호박물관에서는『성호사설』더러 '100가지 지성을 담은 하나의 책'이라고 묘사한다. 『성호사설』은 총 5가지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천문학과 자연과학을 다룬「천지문」, 인류의 생활과 역사에 관한 「인사문」, 중국과 조선의 시와 문장 등 문학을 수록하고 평론한 「시문문」,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각종 도구와 단위에 대한「만물문」, 유교 경전에 대한 해석이 달린「경사문」으로 성호 이익은 스스로 "지극히 천한 퇴비와 지푸라기라도 밭에서 곡식을 기르고 부엌에서 반찬을 만드는데 쓰인다. 이 글을 잘 보면 어찌 백에 하나라도 쓸 만한 것이 없겠는가?"라고 자평했다. 성호의 사상은 남인 계열 제자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성호의 실학을 '성호학'이라고도 불렀다. 성호학파가 만들어져 제자들이 성호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해석 발전시켰다. 모두 농업 중심의 경세적 연구, 자연과학 및 기술에 대한 관심,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적 세계관 탈피 등을 계승했다. 그러나 성호의 사상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계보가 분화되기도 하였다. 특히 서양의 천주교(서학)에 관한 입장 차이였다. 성호 이익은 서학을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혹은 긍정도 했고 부정도 했다. 이익은 서양의 문물에 환호했지만 서학에 대해선 어느 정도 회의적인 생각을 품었다. 성호 이익의 제자들은 서양의 과학기술만 신봉할 뿐 유교의 정신사상은 지켜야 한다는 신후담, 안정복 등의 공서파와 서학도 주체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권철신, 이가환, 이벽, 정약종 등의 신서파가 있었다. 신서파들은 대부분 천주교를 받아드리며 훗날 조선 정부의 천주교 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을 면치 못했다. 성호학을 누구보다 우수하게 계승한 정약용은 공서파와 신서파 여부가 애매했다. 대표적인 신서파였던 정약종은 정약용의 친형이었다. 정약용은 초반엔 가족을 따라 천주교에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정조의 총애를 받으면서는 천주교를 그다지 가까이 하지 않고 오로지 기기학에만 관심을 쏟았다. 물론 정약용도 천주교 수용 여부에 관계없이 박해 사건에 휘말려 정계에서 퇴출당했지만 말이다.


성호사설


성호 이익의 학문적 성과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지만 당대 주류 사회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 기존의 세계관을 탈피하자는 주장은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성호학이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살아서는 천한 선비였는데 징사라 불렸고

농부로 지냈지만 장부의 뜻을 품었다네

달빛 풍광을 마음대로 타고 날았으니

하늘 아래 어디인들 좋은 길이 아니었을까"

-성호 이익이 스스로 지은 명정



안산다문화 거리에서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1980년대부터 안산에는 여러 개의 공단들이 들어서며 인력이 한창 필요로 할 때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안산으로 유입되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며 2019년 기준으로 107개국 8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4호선 안산역 앞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안산다문화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곳은 물론 무엇보다 연변의 간식거리, 정통 동남아시아 식당들 등 이색적인 음식들이 다채롭다. 안산다문화 거리에서 점심을 해결할까 하는데, 기왕 온 김에 평소에 쉽게 맛볼 수 없는 이국식당을 찾던 중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파는 '후르셰다사마르칸트'라는 식당을 찾아갔다.

중앙아시아 한가운데 카자흐스탄 바로 밑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 문화권과 동아시아 문화권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벡인들의 땅'이란 뜻으로 우즈벡인들이 인구의 83%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우즈벡어를 사용하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은 과거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가였기에 오늘날에도 러시아어를 공용어인 우즈벡어만큼이나 사용하고 있다. 두 언어는 엄연히 다르긴 하지만 러시아의 시베리아 쪽과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는 같은 자연환경 속에서 가까운 역사를 지녀왔기에 문화권은 비슷하다. 수도는 타슈켄트이며 여느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그렇듯 수많은 인종과 민족들이 분포해 살고 있다. 그 중엔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 때 우즈베키스탄에 자리 잡은 일부 고려인들도 있다. 종교는 이슬람교를 주로 믿고 있지만 이슬람 과격단체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어서 테러 활동들이 상대적으로 덜한 곳이다. 우즈벡인들은 튀르크계 유목민족으로 실크로드 교역의 주역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교이기 때문에 돼지를 먹지 않지만 유목민족의 전통에 따라 양고기를 많이 먹고 유제품으로 만든 요거트, 빵 등을 먹는다.


식당에는 정말 많은 메뉴들이 있어서 뭘 골라야할지 고민되는데, 고기는 실패없을 거란 생각에 양갈비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양갈비 스테이크도 국물이 흥건한 요리와 그렇지 않은 요리가 있어서 사장님이 한 번 씩 더 물어보신다. 아무래도 한국인들은 국물이 흥건한 스테이크를 기피하여 확인을 하시는 듯한다. 오히려 그럴수록 난 당당하게 국물 많은 스테이크로 시킨다. 이국요리를 먹으러 왔으니 가장 현지스러운 맛을 먹어봐야하지 않겠나! 내 선택은 실패하지 않았다. 고기육수에 적셔먹다보니 육질이 훨씬 연하고 부드러웠다. 한국인들은 양고기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양고기 냄새가 덜하지만 그럼에도 양고기 특유의 빠지지 않는 고소하면서 진득한 향이 내 입맛에 제격이다. 감자튀김마저 눅눅한 게 양고기와 잘 어울린다. 중앙아시아인들의 전통요거트 음료 아이린을 시켰는데, 나한텐 과하게 시큼하게 느껴졌다. 원래 그린 요거트조차 먹지 못하는 나다... 밥을 다 먹고 리뽀슈카를 몇 개 사봤다. 속에 고기를 넣어 맛있지만 빵 두께가 워낙 두꺼워 다소 텁텁한 감이 있다. 원래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중앙아시아에선 유제품과 밀로만 빵을 반죽하다보니 칼로리를 많이 태우는 유목생활을 할 땐 이렇게 두툼한 두께의 빵을 먹어야 힘이 난단다. 아무쪼록 아주 독특하고 잊지 못할 맛있는 점심이었다.




시흥과 오이도

이젠 시흥으로 넘어가본다. 시흥과 안산은 묶어서 여행하기가 좋다. 갯벌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안산과 시흥의 관계에서 다소 복잡한 사연이 있기도 하다. 시흥의 지명이 사람을 참 헷갈리게 하기 때문이다. 역사에 경기권의 대표적인 도시로 '시흥'이 자주 등장한다. 정조가 수원으로 행차할 때 중간에 잠깐 들르기 위해 시흥행궁을 설치하기도 했으며, 6.25전쟁 때는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사수전을 치르기도 했다. 이토록 시흥은 내력이 남달라 보이지만 오늘날의 '시흥시'와 과거의 '시흥군'은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과거의 '시흥군'은 아직 서울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전에 영등포, 구로, 금천, 관악, 여기에 광명, 안양, 부천 일부를 아우르던 곳이었다. 과거 시흥의 중심지는 오늘날의 서울 금천구와 경기도 광명 일대였다. 일제강점기였던 1914년 총독부는 원활한 식민지배를 위해 여러 부군면을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시흥군을 대폭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생활권이 맞지 않는 권역들이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강제로 합쳐진 것이다. 당연히 이질적인 부분들이 많았고 해방 이후론 행정구역이 재편되며 대다수가 서울시로 편입되거나 경기도의 다른 시로 독립하면서 시흥군은 해체되었다. 그런데 서울시로도 편입되지 못하고 경기도의 다른 시로 독립하지도 못한 옛 시흥군 변방의 짜투리 구역들이 남아 있었다. 이 짜투리 구역들을 놓고 고민을 하던 중, 때마침 인천과 안산 사이에서도 짜투리 구역들이 남아돌았고, 붙어 있는 짜투리 구역들끼리 합쳐서 지금의 시흥시를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부군면을 통폐합하는 방식으로, 해방 후에는 어쩌지 못하는 짜투리 행정구역들을 처리하는 방식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행정구역을 묶어버린 건 매한가지다.


안산에서 바닷가 쪽으로 달리면 시흥으로 들어오고, 그 끝엔 오이도가 있다. 이제는 간척사업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섬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조선시대에는 '오질애' '오질이도' 등으로 불리던 명백한 섬이었다. 한국 서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석기 시대의 조개무덤(패총)이 발견되었을 정도로 오이도에서 사람이 살던 흔적의 역사는 매우 오래됐다. 오이도는 두 차례의 대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지금의 모습에 이른다. 먼저 일제강점기 때 일대에 염전을 만들며 오이도가 육지와 연결되었다. 일제는 오이도의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수탈하기 위해서 인천과 오이도를 잇는 수인선 철도를 개통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간척사업은 1987~1994년 안산의 대부도와 시흥의 오이도를 연결하는 시화호방조제 건설 사업이었다. 방조제 건설로 인해 바닷물이 차단되고 '시화호'라는 인공호수를 조성하였는데, 간척지에 여러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바다로 방류하는 각종 폐수로 오이도의 갯벌을 포함한 다양한 생태계가 파괴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2001년부터 바닷물을 시화호로 유통하는 구조로 전환하면서 오이도의 생태계가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오이도는 그렇게 크지 않아 산책삼아 충분히 전부 둘러볼 수 있다. 중간중간 갯벌 뷰의 카페에서 쉬기도 하고, 여러 놀거리를 체험하고, 간식거리도 사먹고, 각종 조형물들을 구경면서 갯벌과 오이도 빨간등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다 보면 금세 시간이 지나간다. 거무칙칙한 갯벌에 어느덧 석양의 빨간 조명이 비추면 서서히 저녁먹을 시간이다. 오이도에는 조개구이 거리가 몰려 있다. 바닷가이니 싱싱한 회를 기대한다면 오이도에서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서해안과 동해안은 먹거리가 다르다. 회를 원한다면 바다도 넓고 난류와 한류가 모이는 동해가 그 어종이 풍부하다. 오이도를 포함해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로 인한 갯벌 때문에 횟감보다는 조개류 등의 어패류가 유명하다. 그만큼 갯벌과 석양을 눈안주로 조개구이를 먹는 것이 오이도와 가장 어울리는 풍경이다.



갯골생태공원의 가을바람

둘째날 오이도에서 바로 대부도로 넘어갈 수 있지만 인천의 소래포구와 붙어 있는 시흥 안쪽의 갯골생태공원을 찾기로 한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아직 섬이었던 오이도에 일제가 염전을 일군다면 간척사업을 벌였는데, 그 당시 염전이 있던 곳이 갯골생태공원이다. 해방이 되고도 염전으로 계속 활용하다가 1996년 생산을 중단했다. 갯벌들 사이에 있는 습지여서 예전부터 '갯골'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약 45만 평에 이르는 자연습지가 되었고 다양한 동식물들이 머물거나 서식하고 있다. 인간의 손을 최소화하자 생태계는 빠른 속도로 되살아났다. 자연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딱 이 정도가 적당하지 않나 싶다. 갯골생태공원은 생태환경 1등급으로 지정되었다.


갯골생태공원은 가을만 되면 생각나는 여행지 중 하나이다. 가을의 계절감이라면 단풍이나 은행나무가 먼저 떠오르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가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갈대다. 가을이 되면 갯골생태공원의 갈대와 뮬리들이 밭을 만들곤 가을바람에 춤을 춘다. 갯골생태공원 가장 안쪽에는 흔들전망대가 있고, 이 전망대에 오르면 마치 날개를 피고 있는 듯한 갈대밭들을 굽어볼 수 있다. 6층짜리 흔들전망대는 바람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고 하며 바람을 형상화하기위해 나선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바람을 형상화한 전망대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며 갯골생태공원의 주인공은 바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갯골생태공원은 바람을 보러 오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갈대가 맞이해주는 가을바람이 특히나 반갑다.




대부도 가는 길, 시화나래조력공원

이제는 대부도로 넘어간다. 시흥에서 대부도로 가기 위해선 국내의 유명 드라이브 코스 중 하나인 시화호방조제 도로를 지나쳐야 한다. 1994년 시화호방조제로 시화호가 생기면서 심각한 해양오염 문제가 터졌다. 해양오염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안건들이 논의되다가 2001년 해수순환시스템으로 전환하고, 무용지물이 된 간척지에는 2011년 시화호 조력발전소를 설립했다. 조력발전은 밀물과 썰물 사이에서 생기는 낙차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발전시스템으로 지속가능한 친환경 에너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대한민국의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매우 커서 조력발전에 유리하다. 현재 대한민국의 시화호 조력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은 세계 최대 수준이다.


시화조력발전소 옆에는 시화나래휴게소가 있고, 휴게소에 시화나래조력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력공원에는 방조제부터 발전소까지 조망할 수 있는 전망타워가 있으나 인근에 공장단지가 많아 하늘이 뿌연 날들이 더 많다. 차라리 전망타워보다는 조력공원에서 볼 수 있는 바다와 어울러진 큰가리섬의 늠름한 풍채가 더 볼만하다. 큰 섬 하나 우뚝 있는 걸 보자니 정현종 시인의 작품 <섬>이 떠오른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 <섬>




대부도 여행기

시화호방조제를 지나 드디어 대부도로 진입한다. 대부도는 마치 큰 언덕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안산에서 시작한 여행을 어째서 시흥을 거쳤다가 다시 안산의 대부도로 넘어가는 것일까? 안산의 시내와 안산 하위 행정구역인 대부도는 이어져 있지 않아 대부도로 넘어가려면 시흥을 반드시 지나쳐야 한다. 이렇게 별도로 떨어져 있는 행정구역을 월경지라고 한다. 조선시대의 행정구역을 일제 때 무작위로 개편하면서 '월경지' 같은 비효율적인 월경지가 생겼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몇 차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많은 월경지들이 사라졌지만 아직까지도 남아 있고, 대표적으로 안산의 대부도가 있다. 대부도는 최근 경기권 서해안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대부도 초입의 '바다향기테마파크'는 시원시원하고 하늘하늘한 배경 덕에 SNS의 대표포토존이 되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이곳을 질주하는 쾌감이 대부도 여행의 백미다. 그 외에도 카페들도 즐비해 있다. 

아직 이른 저녁이지만 대부도의 맛집으로 유명하다는 '피자플리즈'에서 미국식 피자를 먹기로 한다. 한국식이라면 바다와 가장 어울리는 음식물은 회 혹은 조개구이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바다와 제격인 음식으로 피자가 있다. 후각과 미각이 피자와 맥주로 호강하고, 시각과 청각은 바다 덕에 호강한다. 완벽한 공감각의 완성이다.




저녁을 일찍 먹은 건 일몰을 보기 위함이다. 일몰은 동해안보다 무언가 서해안이 더 매력적인 느낌이 난다. 대부도의 구봉도 방면 끄트머리에 대부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몰을 볼 수 있는 낙조전망대가 있다. SNS에서 워낙 자주 본 곳이라 일몰시간에 맞춰 큰 기대를 안고 갔는데, 주차장에서 내려서 낙조전망대까지 걸어가는데 40분 가량이 걸린다.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한 번 갔다오면 발바닥이 살짝 욱신거리지만,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낙조가 만들어주는 실루엣의 모습들이 전부 제각각이라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마침내 낙조전망대에 오르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붉은 그라데이션에 취해올 수 있다. 프랑스에선 아름다운 황혼을 일컬어 저멀리 보이는 동물의 실루엣이 내가 키우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온 늑대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는 뜻으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 사이에 구봉도 낙조전망대를 즐기고 주차장으로 돌아오면 어느덧 어둑어둑하다. 일몰의 붉은 빛이 하늘을 채우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한 번 지기 시작해서 완전히 어두어지는데까진 순식간이다. 비극적인 섭리이지만 언제나 지고 끝나는 것은 빠르기 마련이다. 




탄도항의 갯벌

안산 여행 삼일째의 날이다. 대부도 중앙에는 해물칼국수거리가 길게 조성되어 있어서 대부도를 찾는 누구든 이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가 없다. 이튿날 저녁으로 먹고자 했지만 해장을 생각한다면 다음날 먹는 편이 나아 모두의 합의하에 꾹 참고는 셋째날 늦은 점심에 들렀다. 워낙 많은 가게들이 있어서 어딜 가야할지 고민하다가 '1호친할머니칼국수'집을 방문했다. 워낙에 많은 칼국수집들이 즐비해있다보니 가게명을 이런 식으로 넘버링을 한 듯하다. 1호라니 무언가 원조 느낌이 나지 않는가! 단순한 이유였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 가게가 대부도칼국수거리의 원조가 맞다고 한다. 해물칼국수와 함께 해물파전까지 시켰다. 서울에서는 각자 1인분씩의 칼국수가 나오지만 대부도의 칼국수거리에선 인분 수만큼 한 그릇에 왕창 나온다. 해물파전도 흡사 피자에 가까울 정도고 많은 해산물과 파가 빼곡하게 '토핑'되어 있다. 일행 모두가 연신 오늘 저녁을 먹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남발하며 배불리 먹어해치웠다.



셋째날은 부담없이 한 곳만 들를 예정이다. 바로 탄도항이다. 탄도항은 낙조전망대와 정반대 끝자락에 있기 때문에 돌아가는 길과 소요시간까지 감안한다면 한 곳으로도 충분하다. 탄도항은 화성시에 맞닿아 있는 대부도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탄도항에는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이 있어서 볼거리도 충분하다. 안산어촌민속박물관은 대부도의 어촌생활상을 실제 사용했던 어로도구들과 어촌인들이 사는 곳, 입은 옷, 식문화들을 재현한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다. 같은 어촌이라 해도 동해안의 어촌과 서해안의 어촌 모습은 다르다. 서해안은 갯벌이 주된 터전이기에 어로도구들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대부도에는 무려 70제곱킬로미터의 갯벌이 펼쳐져 있으며 갯벌도 종류가 있어서 퇴적물질에 따라 펄갯벌, 모래갯벌, 혼성갯벌 등이 대부도에 섞여 있다.



상단 왼쪽부터 설명하자면 첫번째 사진은 홰래질이라고 해서 야간에 갯벌 생물체들을 잡는 횃불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부르는데 경기서부에선 '홰래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두번째 사진은 바닷물이 무릎에서 허리까지 올 때 사용하는 사둘그물, 세번째 사진은 뱃고동이다. 아랫줄은 고기를 잡아두는 고기바구니와 통발들이다. 왼쪽 통발은 장어 같은 긴 어종을 담아둔다고 해서 장어 통발이라고 부르고 오른쪽에는 가운데 대형고기바구니 옆으로 꽃게를 담아두는 꽃게 통발도 보인다. 이외에도 많은 어로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2021년에는 갯벌어로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한국이 비록 모든 면에서 세계적이진 않지만 세계적인 수준의 무언가를 갖춘 것들이 더러 있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한국 고유의 문화에 'K-'를 붙이곤 하는데 가장 자랑하고 싶은 K-자연은 갯벌이다. 북유럽 북해의 갯벌, 캐나다 동부해안의 갯벌, 미국 동부해안의 갯벌, 남미 아마존강 하구의 갯벌과 함께 한국의 서해안 갯벌을 '세계 5대 갯벌'이라고 묶는다. 비록 경기권 서해안은 들어가질 못했지만 충남 서해안에서부터 전남 서남해안까지는 지난 2021년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갯벌에는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하고 있다. 갯벌에만 서식하는 어종으로는 짱둥어, 꾹저구 등 망둑어(망둥어는 잘못된 표기라고 한다)과들이 대표적이고 갯지렁이, 고둥, 소라는 물론이고 꼬막, 맛조개, 백합 등의 패류들, 그리고 낙지, 쭈꾸미와 도둑게 같은 갯벌 게 등이 있다. 갯벌에서 집중서식하는 생태종이 이토록 많은 건 그만큼 갯벌이 천혜의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는 뜻이다. 갯벌을 지켜야 하는 이유로 비단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지를 뺏으면 안된다는 윤리적 이유만이 있는 건 아니다. 갯벌은 자체적으로 강물에서 넘어오는 각종 오물과 오염물질들을 정화해주고 홍수도 예방해주기 때문에 인류의 생활에도 반드시 필요한 자연이다. 그리고 바다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소금에 비해 갯벌의 소금이 훨씬 질적으로 우수하다. 1953년에는 대부도에 동주염전을 설치하여 소금을 생산했다고도 한다. 경제적 가치까지 갯벌은 인류에게 소중한 선물인 셈이다.


일몰이 동해안보다 서해안에 더 어울리는 이유도 갯벌 덕이다. 붉은 태양빛과 함께 반짝이는 갯벌의 잿빛은 짙은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킨다. 탄도항을 비추는 일몰빛과 갯벌, 그리고 잔잔한 가을바람에 소슬하게 흔들리는 풍력발전소의 풍차날개와 갈대는 비장미를 품은 정중동의 미학이며 생명과 자연의 강렬함을 선명한 이미지를 통해 내비추는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듯하다. 





푸르른 동해안의 청초함을 즐기러 갈 때는 여러 명이서, 서해안의 쇠잔한 낙조의 정서를 느끼러 갈 때는 소수의 인원 혹은 혼자서 가는 여행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반대다. 오히려 동해안의 쾌활한 생동력은 혼자 즐기는 편이고 여럿이서 갈 때는 서해안의 낙조를 감상하러 간다. 낙조를 눈요깃 삼아 술잔을 기울이면 모두가 저마다의 마음 속 깊은 이야기들을 꺼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나도 마찬가지다. 삶에 치이거나 지친 감정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나머지, 그간 자신의 고민들은 혼자서만 삭히던 이야기들이 서로 공유할 때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주고 응원해주고 공감해주며 우리의 사이는 더 가까워진다. 화창한 동해바다의 하늘과 파도를 볼 땐 웃음과 에너지가 끊이질 않지만 적어도 내 기억에선 이른바 '딥톡'을 할 때엔 서해안만큼 판을 깔아주는 곳이 또 없다. 그만큼 우리는 돈독해진다. 혼자서 여행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여행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내 친한 형은 거듭된 시험 낙방에 마음을 추스리러 자기도 모르게 서해안을 찾았었다고 한다. 마음을 추스리러 갔으나 되려 일몰을 보며 혼자서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2년 후 그 형은 시험에 통과했다.


이토록 경기권의 서해안은 나에게 친근하고 소중한 곳이다. 내 친구들의 깊은 이야기들을 함께 들어준 또 하나의 친구다. 그래서 나는 경기권의 서해안이 참 고맙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심훈 <상록수>

안산의 샘골에서 브나로드 운동에 참여했던 최용신을 모델로 1930년대에 발표된 심훈 작가의 농촌계몽소설입니다. 소설에서 최용신 선생은 '채용신'으로, 샘골은 '청석골'로 바뀌어 등장합니다. 브나로드 운동이 한창이던 때에 동아일보사에서 조선의 농어산촌을 배경으로 조선의 정조를 가미할 것, 인물 중에 한 사람은 조선의 청년으로 명랑하고 적극적인 성격으로 설정할 것, 도시인들과 농어산촌인들이 모두 사랑할 수 있을 만한 것 3가지 원칙의 소설 공모전을 주최했는데, 여기서 심훈의 <상록수>가 당선되어 1935년 9월 10일~1936년 2월 15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되었습니다. 심훈은 다른 소설에서도 언제나 조선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상록수>에서도 채용신과 박동혁 등 농촌계몽운동에 몸을 던진 청년들의 패기를 예찬하고 박수를 보냅니다. 채용신과 박동혁의 러브라인을 빼면 더 깊은 내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일제강점기 젊은 남녀의 연애 코드는 대중성을 위해 필수적이었다고 하네요. 어른들은 개입하지 않은 젊은 남녀의 자유연애가 당대 중요한 화두이기도 했고요. 소설에 몰입하다 보면 제목을 까먹게 되는데, 마지막 장에 이르면 언제나 푸르른 '상록수'라는 제목의 의미와 그 상징성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되죠. 소설을 다 읽고 최용신 선생의 무덤을 떠올려 보면 지나가버린 역사에 대한 애잔함과 그럼에도 계속 기억될 역사의 영원함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 미드나잇>

<비포 미드나잇>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3부작'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영화입니다. 1부인 <비포 선라이즈>는 20대 청년들의 풋풋한 사랑을, 2부 <비포 선셋>은 능숙하고 능글맞은 30대의 사랑을, 그리고 3부인 <비포 미드나잇>에선 40대 부부의 현실적인 사이를 다룹니다. 극중 인물들의 시간과 실제 배우들의 시간을 일치시키는, 대체불가한 멜로영화죠. 1부와 2부의 큰 성공에 두 주연 배우인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3부 <비포 미드나잇>에선 직접 각본가로도 참여를 했습니다. 비포 3부작은 각 작품별로 유럽의 서로 다른 도시를 배경으로 삼는데 3부 <비포 미드나잇>은 그리스의 칼라마타와 카르다밀리 해변이 영화의 주공간입니다. <비포 미드나잇>은 앞의 두 작품과는 다르게 사랑의 설렘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지독하게 현실적인 부부관계를 다루면서도 특유의 서정적 낭만성을 잃지는 않고 있습니다. 영화의 시간적 설정은 제목처럼 자정 이전으로, 자정이 되기 전까지 두 부부가 사랑과 가족과 현실과 그리고 과거의 기억에 대해 마치 타구를 랠리하듯 대화를 주고받습니다. <비포 미드나잇>에서 가장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장면은 노을 장면인데요, 일몰을 같이 바라보는 이 씬은 두 부부가 유일하게 서로를 가장 애뜻하게 아껴주는 장면이랍니다. 정말이지 사랑에는 여러 가지의 얼굴들이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가장 현실적이면서 가장 사랑스러운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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