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향수를 여행하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 대나무 숲에 누웠더니 임금께서 800리나 되는 강원도를 맡기셨다. 아아, 임금의 은혜야말로 갈수록 망극하다. 영추문으로 달려들어 경회루의 남문을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 옥대목의 임명장이 앞에 있구나. 평구역에서 말을 갈아 타고 흑수로 돌아서니 섬강이 어디메요, 치악이 여기로구나"
조선시대 최고의 가사작품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첫 구절이다.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는 송강 정철을 강원도관찰사로 임명했고, <관동별곡>은 정철이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하기까지 한양에서부터 강원도를 유람한 내용을 적은 일종의 여행기이다. <관동별곡>의 첫 구절에 나오다시피 임금께 인사를 하고 한양을 떠난 정철이 강원도에 도착해서 부르는 첫 마디가 '섬강이 어디메요, 치악이 여기로구나'이다. 이 구절의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강원도 원주다. 강원도 원주는 <관동별곡>에 등장하는 강원도 여행의 출발지이다. 원주는 강원도의 '원'자에 해당하는 지역인 만큼 강원도에선 상징적인 도시다.
한때 내 아버지가 강원도 원주에 전근을 가신 적이 있었다. 원주에 묵을 곳도 있고 또 아버지 찬스로 밥까지 얻어먹을 수 있어서 맘 편히 원주 여행에 나섰다. 물론 나도 식비와 숙박비 대신에 여행코스를 짜고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해드렸다. 섬강과 치악산이 안아주는 포근한 도시 원주에는 어떠한 매력들이 있을까.
원주는 닥나무가 많이 나는 지역이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특산물을 세금으로 바치는 제도가 있었는데, 원주의 경우 닥나무가 특산물로 인정되어 닥나무를 바쳤다. 닥나무는 재질이 단단하고 질겨서 종이로 쓰기에 적합하다. 닥나무가 바로 한지의 원료이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故)의 목판인쇄물 신라시대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또한 닥나무로 만들어졌고 고려시대부터는 정부 차원에서 닥나무 재배를 장려했다. 옛부터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닥나무로 닥나무가 바로 한지의 원료이기 때문입니다. 단 중국과 일본은 맷돌로 닥나무를 갈아서 종이를 만들지만 한지는 갈지 않고 두들기만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한지의 질이 중국이나 일본의 화지에 비해 세계적으로 우수하다고 평가를 받고 있다. 조선시대 최대의 한지 제작지는 전주였지만, 닥나무가 특산물이었던 원주에서도 한지공방이 집중되어 있었다. 원주도 한지제작의 중심지라는 자부심이 대단하여 2010년 한지테마파크를 만들었고 매년 원주한지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한지테마파크 전시관 뒤로는 닥나무밭을 조성해두기도 했다. 한지테마파크 전시관에선 한지에 관한 역사와 우수성은 물론 한지로 만든 여러 가지 공예품 전시를 감상할 수도 있다. 1층에선 직접 한지로 원하는 공예품을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관도 있다. 나는 한지로 저금통을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다.
원주는 과거부터 중요했던 행정구역이었다. 통일신라시대 때 설치한 5개의 특별행정구역 5소경 중 북원경이 원주였고, 고려시대에 원주는 전국 12개의 목(牧) 중 한 곳으로 설정되어 원주목이라고 불렸다. 또한 강원도호부를 원주에 설치해 강원도 전체를 총괄하는 지역으로 삼았고, 조선시대에도 원주에 오늘날의 강원도청에 해당하는 강원감영을 설치했다. 감영이란 각 도의 관찰사가 일하는 도청을 뜻하며 각 도별 행정적으로 가장 큰 도시에 설치하였다. 경상감영은 대구, 전라감영은 전주, 충청감영은 공주에 설치하였다. 따라서 원주는 강원도를 대표하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러던 1894년 갑오개혁 때 강원감영을 오늘날의 춘천으로 이전했고 지금까지 강원도청은 춘천에 위치하고 있다. 옛 강원감영 건물 일부가 그대로 남아 있어 원주시에서는 강원감영을 관광지로 개발 중이다. 발굴작업 도중 연못터를 발견해 연못까지 복원해내어 낮에는 산책하기에도 좋은 곳이다.
강원감영 바로 옆엔 원주의 재래시장들이 밀집해 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의 전통시장이 미로예술 원주중앙시장입니다. 최근 재래시장의 부활과 청년창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자 전국적으로 전통 재래시장이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고 있다. 광주의 송정시장, 전주의 남부시장 그리고 원주의 중앙시장 등 1층은 예전 전통시장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되 2층에는 청년몰을 만들어 청년창업가들이 소규모의 컨셉 확실한 가게를 꾸리도록 하였다. SNS에 민감한 젊은 세대들이 청년몰을 자주 찾고 있다. 아기자기하고 재치가 돋보이는 카페, 도시에서 볼 수 없는 요리를 내는 식당, 시그니처 수제음식을 파는 상점, 체험까지 해볼 수 있는 굿즈샵 등 볼거리, 놀거리, 먹거리, 구경거리 천지다. 이름대로 미로를 연상케 할 정도로 복잡한 구조가 알찬 콘텐츠로 가득 차있다. 2층 청년몰에서 시간을 보내고 밤에 먹거나 기념으로 집에 사갈 원주 향토주류들을 몇 개 구입하곤 1층 재래시장도 구경하며 자연스레 시장을 빠져나온다.
한때 강원도 최대의 행정도시 원주와 더 친해지기 위해 원주시립박물관 방문을 추천한다. 국립 박물관들은 웅장한 규모에 걸맞은 전시들을 왕창 감상할 수 있고, 시립 박물관들은 대단한 규모는 아니더라도 고유의 지역적 개성을 물씬 느낄 수 있어서 매력이 서로 다르다. 원주시립박물관에서 꼭 봐야 하는 원주만의 특색을 자랑하는 몇 가지 전시들을 추천하자면 이렇다. 먼저 최규하 전 대통령의 승용차이다. 최규하 전 10대 대통령은 고향이 원주로 재임기에도 종종 전시된 차를 타고 원주를 방문했다고 한다. 아마 자동차 매니아들이라면 더더욱 좋아할 듯 싶다.
최규하는 우리나라 10대 대통령으로 그 임기가 8개월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짧다. 최규하 대통령은 공식적인 과정을 거쳐 대통령에 선출된 것도, 공식적인 과정을 거쳐 대통령에서 물러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최규하 대통령을 흔히들 허수아비 대통령 정도로 인식한다. 그러나 애시당초 대통령이 될 마음도 없었고 갑자기 대통령이 된 최규하 대통령에게 '대통령'의 자질로 평가하는 건 최규하에게 억울한 일일 지도 모른다. 최규하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 당하면서 갑자기 대통령 자리가 비게 되자 당시 국무총리의 자격으로 임시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쿠데타를 통해 전두환이 권력을 장악하고 전두환이 막무가내로 대통령이 되자 최규하는 임시대통령직으로 대통령 직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자질로 최규하를 평가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재능이 없던 정치인은 아니었다. 최규하 대통령은 명실공히 우리나라의 뛰어난 대표 외교관이었다. 외교관으로서 최규하 대통령의 행보는 대한민국 외교사에 길이 남을 재능을 겸비하고 있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 교수였던 최규하는 한국전쟁 도중이었던 1951년 외무부 통상국장을 시작으로 외교부 업무에 발을 담갔고 1952년 주일 한국대표부 총영사, 1957년 주일 한국대표부 참사관, 1959년 주일 한국대표부 공사로 승진하며 대일본 외교를 전담했다. 주일 한국대표부 공사로 있은 뒤 얼마 안 있어 귀국 후 최규하는 외교부 차관으로 취임했다. 4.19 혁명으로 최규하는 외교부 차관에서 사임했으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정부가 출범하면서 최규하는 주 말레이시아 특명전권대사를 거쳐 1967년 외교부를 통솔하는 외교부 장관이 되었다. 이후로 최규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전 외교방침을 진두지휘하고 기획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군인 출신으로 행정체계에 대해선 빠삭하지 못했던 박정희 및 휘하 장교들의 약점을 최규하 장관이 제대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최규하는 박정희의 신임을 받는 유능한 관료였다. 이후 1976년 국무총리로 취임할 때까지 대한민국의 외교를 담당했고 1973년에는 세계 오일쇼크를 해결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물론 박정희 대통령 외교방침의 선봉장이었던 만큼 박정희 대통령의 외교실책의 책임도 그에게 있다고 봐야 하지만 말이다. 최규하는 무려 30여 년 간을 오로지 외교업무에만 집중해왔기 때문에 외교계에선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국무총리로 취임했고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않았어도 최규하는 '허수아비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보단 '외교의 돌격대장'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됐을 것이다. 최규하 전 대통령은 2006년 10월 자택에서 별세했다.
다음은 박물관 2층에 있는 '일사 김봉룡' 의 전시관이다. 일사 김봉룡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 때 활동하셨던 원주 출신의 공예 예술가다. 공예 중에서도 한국전통미술인 칠기(漆器) 제작 예술의 장인이었다. 프랑스나 외국 등지에서도 인정을 받은 국제적인 장인이다. 칠기예술이란 옻나무의 진을 칠한 공예품인데 조선시대부터 원주는 칠기예술로 유명했다. 원주에는 닥나무만큼이나 품질 좋은 옻나무가 나고 있으며 현대에도 원주가 우리나라 옻나무의 최대생산지이다. 일사 김봉룡은 칠기공예품에 패류 등의 껍질을 조각해서 덧붙이는, 이른바 나전칠기의 대가였다. 패류의 껍질, 금은판, 청동판, 구리판 등 단단한 물질을 얇게 오려 작품을 만드는 방식을 '평탈기법'이라고 한다. 한국의 나전칠기 역사도 유구한 편이다. 나전기법은 통일신라 시대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 최전성기는 고려시대였다. 중국 송나라 사신들이 고려 나전칠기의 우수성을 거론한 기록들이 수두룩하다. 그중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의 나전은 세밀하여 가히 귀하다고 할만 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전칠기의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졌지만 성리학을 숭상했던 조선에서는 고려 때처럼 화려한 문양보다는 검소하고 사실적인 나전이 주류를 이루었다. 다만 조선후기부터는 재정상의 문제로 민간화 되면서 다시 나전칠기의 예술성은 다채로워졌고 그 본산은 통영이 제일이었다. 현재는 통영과 더불어 원주에서도 나전칠기 생산과 제작에 힘을 쏟아붓고 있다. 나전칠기를 제작하는 무형문화재를 나전장이라고 하는데, 현재 나전장의 명인 이형만 선생이 원주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형만 선생의 스승이 바로 일사 김봉룡이다. 조선시대 나전칠기의 중심지는 통영이었다. 조선시대의 마지막 나전장은 전성규였다. 일제강점기가 되며 조선 나전장은 통영칠기주식회사로 민간화되어 그 맥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다. 나전장에 관심이 많던 통영 출신의 김봉룡은 통영칠기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전성규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전성규와 함께 나전장의 전통을 이어가다가 해방 후 1969년 강원도 원주에 자리를 잡고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원주가 나전칠기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던 것이다. 현대의 나전 예술은 원주의 김봉룡, 통영의 송주안 선생이 정립하였고 최근에는 두 분의 제자들인 원주의 이형만과 통영의 송방웅 선생이 대를 잇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지가 많은 국가라 어느 도시든 그 도시가 상징하는 산들이 있다. 물런 전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상징으로 삼을 수 있을 만한 산을 근처에 두고 있다는 건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원주는 대표하는 산은 단언 치악산이다. 치악산 한 켠에는 돼지문화원이라고 우리나라 돼지연구를 하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가봤다. 돼지문화원에서는 귀여운 돼지들의 레이싱과 또 식사로 돈까스나 삼겹살을 먹을 수 있어서 이곳에서 저녁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소 요리로 유명한 곳들이 있다. 언양, 광양, 진주, 수원 등. 그러나 돼지요리로 유명한 지방을 꼽으라면 바로 튀어나오지 않는다. 과거 우리 조상님들은 소고기만 먹었지 돼지고기는 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해지는 돼지요리는 ‘맥적’이라고 고구려인들이 먹던 고구려식 돼지구이인데 지금의 삼겹살처럼 생고기를 불판에 구워먹는 형태가 아닌 양념하여 구워먹었다. 역사적으로 한국의 육식문화가 그다지 발달하지 않은 편이었으며 그중에서도 돼지고기는 소나 닭에 비해서 거의 안 먹다시피했다. 한국의 육식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건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가 불교를 공인하면서 육식문화를 지양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유목민족 풍속이 컸던 고구려에선 돼지가 나름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고구려와 같이 비슷한 유목계 국가 부여에서는 사출도라고 마가, 우가, 구가, 그리고 저가 곧 ‘돼지’ 부족이 있었으며, 고구려의 국내성 천도 신화에는 유리왕이 꿈속에서 돼지를 따라가다가 국내성을 발견했다고 나온다. 그러나 고구려 또한 불교공인 후 고기문화가 더 다양하게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고려 말 원나라 간섭기 때 몽골족의 영향으로 돼지고기 요리가 들어왔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문화가 많이 퇴보하면서 육식문화가 조금 발전하긴 했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돼지요리는 비인기 요리였다. 돼지요리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전부 양념한 고기를 먹는 수준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돼지는 돼지냄새 잡는 일이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돼지냄새 잡는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냄새가 매우 역했다. 돼지를 팔던 가게가 조선시대에 있었지만 소고기 도축장에 비하면 그 수가 현격하게 떨어졌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매우 적었다. 한국인들이 고기를 접하는 건 1차적으로 가축동물들이기 때문이다. 소는 농경에 쓰이고, 닭은 달걀을 낳는다. 그래서 가축동물로 활용이 가능하지만 돼지는 딱히 쓸모가 없다. 수요와 공급이 둘 다 빈약했다는 뜻이다. 그나마 먹었던 돼지는 멧돼지들이었는데 그렇다면 돼지냄새가 더 강하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요리가 되었을 것이다. 현재 토종 재래돼지는 멧돼지과로 분류되고 있으며 털빛이 검은 흑돼지였다. 요약하자면 한국의 전통적인 식문화에 돼지고기는 극히 드물었으며 있어도 토종흑돼지는 냄새가 역해 맛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1884년 고종 재위기에 미국 품종의 돼지가 들어왔다. 그리고 일본에 의해 1903년 요크셔종이, 1905년 버크셔종이 즉 우리가 일반적으로 돼지하면 떠올리는 서양품종의 돼지들이 대거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처음엔 백돼지에 대해 조선인들의 거부감이 심하자 일본은 조선 재래종과 서양종을 교배시키며 이제서야 먹을 수 있는 근대적 돼지고기의 역사가 시작했다. 이때부터 돼지고기가 퍼지는데 유독 한반도의 북쪽지역이 남쪽지역보다 소비량과 선호도와 사육량이 많았다고 합니다. 북한요리가 돼지 기반 요리가 많은 게 이런 이유다. 그리고 비로소 등장하는 우리 한국인의 소울음식인 '삼겹살'. 돼지의 뱃살 삼겹살을 생고기로 불판에 구워먹는 방식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 때나 되어서야 시작했다. 1931년 <조선요리제법>이란 책에 ‘세겹살’이란 명칭으로 처음 문헌에 등장하는데, 살과 지방이 세 번 겹친다고 해서 세겹살이라고 불렀다. 해방 후 1959년 경향신문에서 처음 세겹살이 아닌 삼겹살이란 명칭을 사용했지만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세겹살이라고 불렀고 1980년대가 들어서야 삼겹살이란 이름이 널리 퍼졌다. 80년대가 되면 한국인의 경제소득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소는 너무 비싸 자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노동자 계층 위주로 고기는 먹고 싶은데 소는 비싸고 퇴근 후 술과 함께 기울일 수 있는 소고기의 대체재로 값싼 돼지고기의 삼겹살이 급부상했다. 1980년 휴대용 가스레인지 부루스타가 나오고 또 외식문화가 자리잡으며 삼겹살은 가정에서도 바깥에서도 쉽게 먹을 수 있는 대중적인 음식으로 점점 자리가 굳혀갔다.
현재 토종돼지의 맥은 일제강점기 때 외래종과 교배하면서 거의 끊겨버렸다. 재래돼지 복원사업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으며 이제는 한국인의 밥상에 빠질 수 없기에 양돈사업도 발전하고 있다. 원주의 돼지문화원에서는 치악산에서 키우고 기른 돼지들을 '금돈'이라는 상품명으로 전국 50여 개의 매장에 공급하고 있다고 한다.
둘째날 아침 커피를 마시며 산책이라도 할 겸 박경리문학공원을 찾았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소설은 고민없이 박경리 작가의 <토지>다. 우스운소리일 수 있지만 나에게 <토지>는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MCU)'보다 훨씬 더 장대하고 흥분하게 하는 세계관이다. 통영 출신의 박경리 선생님 기념공간이 왜 원주에 있는지 의아할 수도 있겠다. 원주에도 한국현대문학의 거장이신 박경리 선생님의 흔적이 있다. 80년에 시작해서 94년에 집필을 마친 <토지>는 80년대를 한국문단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소설로 16권으로 구성되어 이 있는데, 박경리 선생은 <토지> 를 3권까지 냈을 때 그 수입으로 원주의 집 한 채를 샀다고 한다. 이곳 원주의 집에서 4권과 5권을 집필하셨다.
평소 박경리 선생님이 살아계셨을 땐 원주의 집에서 후배문인들과 자주 만나면서 교류했던 곳이라고 한다. 2008년 작고하신 이후론 당신의 집을 전시관으로 개조해 박경리문학공원으로 조성해두고 있다. 문학에 관심있는 이라면 이 문기 가득한 공간에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단순한 전시관이 아니라 실제 박경리 선생님이 거주하셨던 곳이고 <토지>를 집필한 곳이니 의의가 남다르다. 박경리 선생의 숨결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니 문예답사를 한다면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여행지다.
점심을 먹고는 원주 시내에서 벗어나 더 먼 곳까지 가보고자 한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은 뮤지엄 산이다. 뮤지엄 산에 가는 길엔 간현관광지라고 원주의 대표유원지가 있다. 저너머 치악산이 보이고, 섬강을 끼고 있는 곳이라 한국적인 경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의 출렁다리와 레일파크가 몇 차례 TV 예능에 소개된 뒤로 더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다. 정철의 <관동별곡> "섬강이 어디메요, 치악이 여기로구나" 구절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점심도 소화시킬 겸 뮤지엄 산에 가기 전에 근처까지만 산보를 가볍하기 적절한 코스다.
간현관광지 방향으로 차를 타고 더 올라가면 치악산 안쪽 아늑한 곳에 뮤지엄 산이 자리하고 있다. 대한민국 미술관 중 가장 건축적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뮤지엄 산'의 설계사는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다. 안도 다다오는 세계건축사에서 큰 획을 그은 건축가다. 현대건축은 흔히들 프랑스의 '르 꼬르뷔지에'로부터 출발했다고 한다. 20세기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꼬르뷔지에는 장식성보다는 기능성을 더 중요시 여기는 모더니즘 근대건축을 시작시킨 장본인이다. 현대의 콘크리트 건물을 만든 사람이다. 일본에서 건축을 독학한 안도 다다오는 르 꼬르뷔지에의 작품집을 보고 프랑스로 떠나가 르 꼬르뷔지에를 찾아갔으나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럼에도 안도 다다오는 르 꼬르뷔지에를 사숙하며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계승했다. 그저 거장의 작품과 건축사상을 답습하는 걸로는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지 못하는 법이다. 안도 다다오는 동양인으로서 서양의 모더니즘 건축사상을 접했기에 안도 다다오는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었는데, 안도 다다오는 콘크리트 건축을 메인 건축물로 하면서 자연과 조화로울 수 있는 건축을 그의 건축철학으로 삼았다. 콘크리트 건축과 주변의 자연이 융화되는, 언뜻 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이를 예술적으로 봉합해낸 건축이 안도 다다오의 작품들이다. 안도 다다오는 '건축 안에 자연이 있어야 한다' ' 자연이 포근히 감싸 안은 중심에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보여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뮤지엄 산을 올라가다보면 '이 깊은 산중에 미술관이 있다고?' 의심하게 되지만 정작 뮤지엄 산에 도착해보면 과연 안도 다다오가 말하자는 콘크리트와 자연의 호흡이 어떤 것인지 직감적으로 느끼게 된다. 물, 산, 나무, 하늘, 건축 모든 것들이 같이 공명한다.
안도 다다오의 주요 시그니처 중 다른 하나가 바로 시퀀스다. 안도 다다오는 관람객의 방문 동선을 복잡하고 꼬아둔다. 그리고 벽을 두어 관람객의 시선을 제한한다. 이는 관람객의 감상에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함이다. 공간의 하이라이트를 멀찍이서 미리 보여주지 않고 있다가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에서 선보임으로써 시각적 충격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다. 관람객의 동선에 일종의 시퀀스를 부여한다.
"길을 매개로 건물에는 여백이 있어야 한다. 길은 건물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연속된 일종의 방의 개념으로 봐야 한다." - 안도 다다오
그런 의미에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는 벽이 대단히 중요하다. 뮤지엄 산에서 볼 수 있듯 안도 다다오는 콘크리트 벽과 자연의 돌로 만든 벽을 병치시킨다. 벽에서도 자연과 인공을 융합을 꾀하는 안도 다다오의 모더니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안도 다다오에게 벽은 단순히 시퀀스를 만들기 위해 관람객의 시선을 제한하는 용이 아니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도록 하자.
"벽은 성역과 속계를 나눠주는 막이다. 벌거벗은 벽의 위압을 부드럽게 해서 내부공간에 생활 또는 이미지의 휴식처를 제공하는 것이 벽의 역할이다. 벽과 기둥은 서로 꾸미고 공명하는 관계다." - 안도 다다오
나는 평소 건축이란 자연을 파괴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물리적 질량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과 더 교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매개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린, 특히 나처럼 도시에 사는 도회인들은 평상시에 건축의 자연적 본질을 깨닫고 다니진 못한다. 뛰어난 건축가의 작품을 볼 때 건축의 자연적 본질이 환기되는 건 그만큼 건축가의 예술철학적 역량이 뛰어나고 순수하다는 뜻일지라. 인간 스스로를 자연적 존재라고 인식하게 해주는 공간이야말로 건축이고 안도 다다오의 말처럼 그런 건축이 성역이다. 뮤지엄 산은 성역으로의 진입이고 안도 다다오의 건축에서 '벽'은 성역으로 가는 초대장이다.
우리나라의 지명에서 '~창'이라고 끝나는 곳들은 조선시대에 세금창고로 운영되었던 역사에서 유래한다. 고속도로가 없던 과거에는 강이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고 특히 전국의 세금을 나르는 운반로로 사용되었다. 한반도 남부지방 세금은 거의 대부분 남한강으로 보여 수도 한양으로 운반되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지만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강원도 남부와 충청북도의 세금을 나르는 조운선이 집결하던 곳이 남한강의 흥원창이었다. 흥원창은 남한강의 지류인 섬강이 시작하며, 혹은 섬강이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이다. 지리학을 전혀 모르는 내가 보더라도 흥원창 터를 가보면 교통의 중추 역할을 했음을 한눈에 파악이 가능했다.
세금이 모인다는 곳은 교통이 발달할 수밖에는 곳이고 그렇다면 세금뿐 아니라 다양한 물산과 사람들이 모인다는 뜻이기도 하다. 흥우너창엔 옛부터 포구 산업이 굉장히 발달해있던 마을들이 있엇다. 나룻터, 주막, 객주, 여관 등등 상당히 번성했던 번화가였다. 산업화 시대에 내륙지방에 고속도로가 뚫리며 강은 주요 교통로에서 배제되었다. 북적이던 그 마을은 이제 흔적조차 없어져 수려한 경관만을 남겨놓았을 뿐이다. 과거 번성했던 곳이 지금은 아무 것도 없는 현장을 목격했을 때 받는 묵직함이 있다.
원주 여행을 마무리할 곳은 폐사지다. 폐사지를 두고 '보고'라는 말이 적절한 지는 모르겠으나 원주는 폐사지의 보고이다. 과거 원주는 흥원창을 일대 중심으로 가장 번창하던 곳이어서 주변에 큰 절들이 모여 있었다. 지금은 황량해진 흥원창처럼 규모가 상당했던 절들은 지금은 모두 폐사지가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폐사지는 거돈사지이다. 거돈사는 언제 처음 건립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탑 양식이 3층인 걸로 보아 통일신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역시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까지는 유지되었다고 한다. 말그대로 폐사지이기 때문에 거돈사지에는 아무 것도 없다. 기초석들과 석축 정도가 있고 그나마 거돈사지의 3층 석탑과 커다랬던 금당 정 가운데 불상이 앉아있었을 대좌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거돈사지를 처음 가보면 우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스케일에 놀란다. 폐사지 여행이 낯설다면 거돈사지를 제일 처음으로 방문해보기를 추천한다.
거돈사가 배출한 대표적인 고승이 고려 초의 원공국사다. 원공국사는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일으키기 이전에 불교의 천태종 기반을 닦은 분으로 고려의 8대왕 현종은 원공국사를 왕사로 모신 적도 있다. 원공국사는 이곳 원주의 거돈사에서 사망했는데 훗날 천태종을 완성하는 대각국사 의천은 원공국사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함으로 거돈사를 크게 중창했다. 폐사지가 되어버린 거돈사터에는 그나마 원공국사와 관련된 유물들이 있어 거돈사의 역사적 의의를 꿋꿋하게 입증해주고 있다. 원공국사의 사리를 모신 원공국사 승탑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도난당할 뻔 하던 것을 겨우 막아내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야외전시장에서 전시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는 원공국사승탑을 보고 "전체적으로 조형적 비례가 흠잡을 데가 없고 중후한 품격이 느껴지는 전형적인 고려시대 승탑이다"라고 평했다. 원공국사 승탑은 서울읙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지만 거돈사터에는 승탑비가 남아있다. 고승이 입적하여 그를 기리는 조형물을 만들 땐 언제나 당신의 사리를 모신 승탑과 그 옆에 고승의 일대기를 적은 승탑비를 조성한다. 승탑비는 돌거북이 받치고 있고 지붕돌로 상부를 마무리하는 방식이 일반적인데, 돌거북들의 조형성은 승탑비마다 다르다. 원공국사승탑비의 경우 돌거북의 얼굴과 등껍질의 무늬 조각이 대단히 또렷하고 방정하다. 등껍질을 마치 가운 입듯이 걸치고 있어 엄정한 품위를 풍기기도 한다.
유홍준 교수는 "마음이 울적할 땐 가을 하늘의 폐사지로 가라"며 폐사지의 서정을 예찬한다. '폐사지'의 미학을 가장 예술적이고 또 인간적으로 설명하는 대표작은 역시 정호승 시인의 <폐사지처럼 산다>일 것이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나 아직 진리의 탑 하나 세운 적 없지만
죽은 친구의 마음 사리 하나 넣어둘
부도탑 한번 세운 적 없지만
폐사지에 처박혀 나뒹구는 옥개석 한 조각
부등켜안고 산다
가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람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 <폐사지처럼 산다>
내가 거돈사지를 방문했던 계절은 모든 것이 무르익는 가을이었다. 가을은 무르익음과 쇠락의 시작이 공존하는 계절이다. 운 좋게 시간을 맞추어 때마침 해가 지고 있었다.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밖에 들리지 않은 한적한 곳에서 황혼이 비추는 폐사지. 아버지와 둘이서 놀러갔었는데 나보다 아버지가 더 감동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파멸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을까? 파멸의 아름다움이 뭔지 글이나 말로 풀어낼 재간은 내겐 없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다면 '지는 해가 비추는 가을의 거돈사지'의 모습으로 일축할 수 있겠다.
원주에는 거돈사 지외에도 원주 법천사지와 원주 흥법사지가 있다. 거돈사지, 법천사지, 흥법사지 3개를 일컬어 원주의 3대 폐사지라고 한다. 금빛과 붉은 빛이 가득하고 정겨운 가을에 폐사지 탐방은 여행의 마무리로 딱 어울리는 곳들이다.
겪어보지 못한 과거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향수해볼 수 있는 법이다. 그래서 옛것을 상상해보는 일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원주는 인문으로 가득찬 도시다. 옛 강원도의 행정의 중심, 닥나무를 활용한 한지 예술, 옻나무를 활용한 칠기 예술과 나전 예술, 안도 다다오의 뮤지엄 산, 그리고 옛 영광을 아스라하게 품고 있는 폐사지의 공간 등 휴머니즘의 체취로 가득하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건 원주의 예술적 인문은 결국 자연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체취는 자연과 어우러질 때 만개할 수 있다. 원주의 치악산과 섬강부터 이름없는 작은 개울과 나무 한 그루 그리고 이 모든 원주를 감싸주는 하늘과 땅. 아무리 우리 인문이 시간이 지나며 사라진다하더라도 늘 그 자리에 있던 그 자연은 지나가버린 것들을 모두 기억해내고 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한눈에 보는 나전칠기>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발간하는 '우리공예디자인리소스북' 시리즈의 1편에 해당하는 책입니다. "전통 기예로 오래된 선물인 공예, 현대 기예로 현재의 현물인 디자인, 이 둘을 함께 갈고 닦아 앞으로 천 년 동안 보존될 영물로 발아시키고자 합니다."라는 발행인의 글이 가슴 벅차게 합니다. 예술에 관해 관심이 부쩍 많아진 최근이지만 전통 예술에 대한 관심이 아직 제자리 걸음 중입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예술 또한 현대예술과 상통하는 부분들도 많고 전통 예술의 거듭된 현대화를 거치며 국제적인 전문가들의 호평을 사고 있습니다. 그중 자랑스러운 전통 예술이 자개 예술입니다. 자개 예술이 무엇인지, 어떤 역사를 거쳐 발전했으며, 현대에는 어떤 관심을 받고 있는지를 책 제목 그대로 '한눈에' 볼 수 있는, 자개예술을 처음 접하시는 분이 읽었으면 하는 책입니다. 책은 총 5장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에서는 장인들의 인터뷰, 2장에서는 나전의 역사, 3장과 4장에서는 나전을 제작하는 방식, 5장에서는 나전의 무늬들을 소개합니다. 다양한 시선에서 나전(자개)을 다뤄주는 덕에 나전에 대한 인문적·예술적 가치를 배울 수 있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미즈노 시게노리 감독의 <안도 타다오>
안도 다다오를 다룬 일본 다큐멘터리영화입니다. 건축가와 건축작품에 대한 정보는 책보다 영상물이 더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습니다. 글만으로는 건축작품이 잘 그려지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미즈노 시게노리 감독의 <안도 타다오>는 세계 곳곳의 안도 다다오 작품들을 소개하며 안도 건축사무소의 제작과정과 안도 다다오가 일하는 방식, 그리고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다룹니다. 역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보면 자연과 인공은 상반된 개념이 아님을 증명해줍니다. 뮤지엄 산에 반하신 분이라면 같은 건축가가 설계한 다른 건축작품으론 어떤 것들이 있는지, 뮤지엄 산과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구경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일 겁니다. 전기영화 구성에 일정한 패턴이 반복될 뿐이라 영화적인 요소는 별로 없습니다. 안도 다다오에 대한 일반론적인 접근이 메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