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향취를 여행하다
한국엔 고전적인 향취를 가진 곳들이 많다. 저 옛날 후손들을 위한 목적으로 남겨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조상들의 유산 덕분에 우리는 콘텐츠의 소스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고전소설엔 수작들이 많다. 대표작들은 학창시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고 배우고 공부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공부를 통해 접한다면 흥미를 붙이기 어렵지만 순전히 이야기로서, 하나의 대중문화로서 접한다면 유쾌하고 은유적인 작품들이 부지기수다. 나는 그래서 우리나라의 고전소설을 사랑하고 현대적으로 더 많이 각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전소설을 품고 도시 중 한 곳으로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남원이 있다. 춘향전, 광한루, 판소리. 우리네 전통으로 꾸며진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멋진 도시다. 마치 익산에 가면 '서동요'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남원에 가면 '춘향전'의 소설 속으로 들어간 앨리스가 되어 소설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이 든다.
남원은 역사적으로 행정적 위상 또한 높은 도시였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 급격하게 넓어진 국토에 비해 수도 경주는 지나치게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신라는 효과적인 지방행정과 수도의 편재성을 보완하기 위해 전국 곳곳의 주요 도시 5군데에 특수행정구역인 소경을 설치했다. 5소경이란 북원경(원주), 중원경(충주), 서원경(청주), 금관경(김해) 그리고 남원경이다. 5소경 중에선 유일하게 남원경의 지명만 살아남아 전해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행정단위도 등급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가장 높은 행정단위는 도, 그 아래에 12목, 그리고 그 바로 아래가 도호부로 남원이 도호부에 속했다. 역사적으로도 귀한 대접을 받았던 남원이니 고전적 향취를 물씬 풍기는 클래식의 시티가 아니겠는가.
남원에 도착하면 다른 생각할 것 없이 곧바로 광한루를 찾는다. 광한루는 언제 보아도 좋다. 광한루 자체도 좋지만 현재에는 '광한루원'이라고 부르는 공원이 그렇게도 편안하고 한아하고 아름답고 서정적일 수가 없다. 광한루로 들어오는 입구는 세 군데나 있다. 어디든 주차할 공간이 있어서 어디로 들어와도 무관하지만 동문은 피하는 편이다. 동문이 별로라기보단 동문으로 들어오면 광한루를 바로 볼 수가 있다. 광한루를 들어오자마자 보기보다는 입구를 통해 들어오고 흥분되는 긴장감을 가지고 걷고 싶은 마음에 다른 입구를 이용하는 편이다.
여러 나무들이 군데군데 장식해주는 광한루원의 넓은 길을 걷다보면 나뭇잎과 나무가지 사이사이로 광한루가 엿보인다. 설렘은 더욱 고조된다. 그렇게 광한루가 시야에 다 들어오는 곳까지 다다르면 풍채 좋은 돌다리를 건너야한다. 이 돌다리는 견우와 직녀를 이어준다는 오작교다. 조선의 7대왕 세조 대에 만들어져서 임진왜란 때 광한루가 전소되었을 때도 훼손되지 않아 원형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오래된 다리다. 사랑을 맺어주는 다리답게 기골이 크면서도 부드러운 얼굴까지 하고 있는 다리다. 오작교를 건너기 전엔 광한루를 한 눈에 다 담을 수 있고, 오작교를 건너면 광한루를 한 번에 다 볼 수 없는 대신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히 관람할 수 있다. 마치 사랑하는 마음의 경로를 상징하듯 오작교가 나와 광한루 사이를 이어주는 듯하다.
우리나라에는 3대 정자건축이 있다. 호남의 제천 한벽루, 영남의 밀양 영남루와 진주의 촉석루. 3대 정자건축에 끼지 못하지만 호남의 광한루는 그에 못지 않게 장대하다. 동양의 전통건축에서 기둥과 기둥 사이를 ‘칸’이라고 하는데 광한루는 정면 5칸에 측면 4칸이다. 경회루가 정면 7칸에 측면 5칸, 진주의 촉석루가 정면 5칸에 측면 4칸으로 광한루와 동일하다. 제천의 한벽루는 윙 건축을 제외하면 정면 4칸에 측면 3칸이니 광한루보다 규모가 작다. 경회루는 왕실건축이니 고사한다면 광한루는 우리나라의 3대 정자건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호남을 대표하는 정자이다.
광한루 뒷편에는 '호남제일루' 호남에서 제일 가는 누각이라며 스스로 당당하게 자부하고 있다. 자기가 예쁜 걸 아는 정자인 듯 해 살짝 얄밉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움이 있다. 광한루가 3대 정자건축에 끼지 못하는 이유는 정자건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3대 정자건축은 공통적으로 자연 그대로의 강을 끼고 있다. (제천의 한벽루는 현재 충주호 수몰로 인해 자리를 이전해서 그렇지 원래 자리에서는 강을 감상할 수 있었다. 물론 인공저수지라도 강처럼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따라서 3대 정자건축 모두 누각에 올라서면 자연이 선물해준 강을 감상할 수 있지만 경복궁의 경회루나 남원의 광한루는 인조호수를 감상하는 누각이다. 감상법의 차이일 뿐 경회루와 광한루의 가치가 3대 정자에 비해 떨어진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더군다나 경회루와 광한루에겐 3대 정자건축에서 볼 수 없는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으니 정자를 바치고 있는 사다리꼴 모양의 사각 돌기둥이다. 우람한 사각 돌기둥의 열주는 정자의 품위를 높여주면서 든든하고 호방한 멋을 살려준다. 이처럼 아름다운 정자건축을 두고 과거의 문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하다. 광한루 안에 들어가서 볼 순 없지만 광한루 천장에는 광한루를 찾은 문인들이 남긴 편액이 무려 83점이나 걸려 있다.
광한루는 조선의 3대왕인 태종 이방원 대에 황희가 남원에 있으면서 지은 정자로 원래 이름은 광통루였는데, 세종대왕 때 정인지가 이름을 '광한루'로 바꾸었다. 옥황상제가 사는 곳 광한청허부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 후반기에 남원 전투 때 소각되어서 조선 후기 인조 대에 남원부사 신감이 복원하였고 정조 때 증축공사를 했다. 광한루를 불태워버린 남원 전투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의 큰 전투였다. 임진왜란은 임진왜란(1592~1597)과 정유재란(1597~1598)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남원전투는 1597년에 일어난 정유재란 중에 일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것을 패착으로 여겼다. 전라도 점령에 실패해서 현지보급 확보에 제약이 있었으며 남해안에서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격파하며 보급로를 차단할 때도 반격할 수가 없었다.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없던 조선 수군을 무력화시킨 일본군은 곧바로 전라도 점령전에 나섰다. 일본군 전 부대가 총동원되었다.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두 방면에서 전라도로 들어갔다. 좌군에 우키다 히데이에, 고니시 유키나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참가를 했고 우군에는 모리 히데모토,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참가했다. 심지어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도도 야스토라가 이끄는 일본 수군의 협조까지 받은 엄청난 병력으로, 총 14만 명에 육박했다. 조선군은 명나라와 조명연합군을 구성하고 있었다. 명나라가 상국이기에 작전지휘권은 명나라 장수들에게 있었다. 일본 우군이 덕유산 인근의 황석산성을, 일본 좌군이 구례를 함락하자 남원에 있던 명나라 부총병관 양원은 전라도 일대 주요 고을들의 수령들에게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남원으로 집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명나라 핵심부대와 전라도 병력이 남원으로 모였다. 일본 우군과 좌군은 전라도의 중심 전주에서 만나기로 하였고, 일본 좌군은 진격 중에 남원을 함락하기로 하였다. 8월 12일부터 16일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가슴 아프게도 조명연합군의 패배였다. 2만이 안 되는 병력으로 일본군 좌군 5만 6천 병력을 이길 수가 없었다. 전투 도중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양원에게 몇 번이고 항복의사를 권유했지만 양원은 거듭 거절하며 결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성벽 일부가 훼손되고 일본군이 물밀듯 들어오자 양원은 500여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후퇴하였다. 조선군은 끝까지 남아 싸웠으며 마지막에는 살아남은 조선군 장수들이 다 같이 화약을 터뜨려 자폭했다. 남원성을 함락한 일본군은 마치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버금가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다. 민간인들도 함께 싸우다 모두 희생되었다. 일본 측 사서에는 "성안 사람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여서 생포한 자는 없었다. 눈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광한루는 이때 불타 없어졌다. 남원 전투의 패배로 일본군 좌군과 우군은 전라도에서 만나 전라도가 완전히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물론 바로 이어지는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으로 전라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은 모두 전라도를 나오게 되지만 말이다.
다시 광한루원 탐방기로 넘어오자. 광한루를 나설 땐 오작교가 아닌 다른 다리로 건너오면 완월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완월정은 1971년 현대에 들어서 광한루원을 더 동화적으로 꾸미기 위해 세운 정(丁)자형 정자다.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사는 곳이고, 오작교는 견우와 직녀를 이어주는 다리라면 완월정은 지상인들이 달나라를 즐기기 위한 곳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완월정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월매의 집'을 재현해두었다. 월매는 소설 <춘향전> 속 춘향의 어미 이름이다. 역시 광한루에서 춘향전 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겠다. 광한루는 소설 <춘향전>에서 춘향이와 몽룡이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같이 노닐며 사랑을 키운 무대가 되는 곳이다.
광한루원에서 조금만 차를 타고 가면 춘향전을 테마로 한 테마파크가 조성되어 있다. 춘향전의 내용순서에 따라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장면장면들은 세트로 재현해두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도 이곳에서 촬영하였다고 한다. 남원은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도시다. 극중 몽룡의 아버지가 남원부사이고, 춘향의 어미 월매는 남원 소속의 기생이다. 변학도가 사또로 부임해서 춘향이에게 수청을 강요한 것도 변학도가 남원부사로 발령받아서였다.
춘향전은 언제 만들어졌는지조차 알 수 없는 작자 미상의 소설이다. 대략적으로 조선 후기 영정조 시대로 추정할 뿐이다. 공식적인 책으로 출간된 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에 이르러서다. 춘향전은 경판본과 완판본으로 구분된다. 경판본은 한양에서 출판된 책, 완판본은 전주에서 출판된 책을 뜻하며 경판본이 30장, 완판본이 84장이니 차이가 꽤 큰 편이다. ‘춘향전’은 경판본 제목이고, 완판본 제목은 ‘열녀춘향수절가’이다. 모두 한글소설이고 한문 이본은 더 많은데 역시 작자를 알 수가 없습니다. 대표적으로 <광한루기>가 있다. 춘향전의 결말을 제대로 아는 이가 별로 없는데 이는 버전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지기론 두 남녀가 백년가약을 맺었다는 해피엔딩이지만, 결국 둘이 만나지 못했다는 버전도 있고 둘이 혼인을 했으나 훗날 몽룡이 바람을 펴 춘향이가 자결을 했다는 엔딩도 있다.
조선후기에 생긴 춘향전이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 책으로 전해지기까지 중간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 있다. 바로 조선후기 음악연구가 신재효다. 판소리에 관심이 많던 신재효는 떠돌기만 하던 판소리를 연구한 뒤 판소리 마당을 체계화하여 <조선창극사>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판소리 이론서를 저술했다. 우리나라 판소리 12마당 중 신재효는 6마당을 기록했다. 일제강점기 때는 하나가 탈락해서 흔히들 판소리 다섯마당이라고 부르는데 그 중 하나가 춘향가다. (나머지는 흥부가, 수궁가, 심청가, 적벽가다) 춘향'전'이 아니라 춘향'가'인 이유는 판소리, 즉 노래이기 때문이며 조선 후기에 신재효가 그나마 12마당 중에 6마당이라도 그 가사를 남겨주었던 덕분에 나중에 가서 춘향전이라는 책으로도 발간될 수 있었다. 하여 춘향전을 판소리계소설이라고도 장르를 분류하기도 한다.
춘향전은 비록 소설이지만 엄연히 실존모델이 존재한다. 바로 인조 때의 성이성이다. 성이성의 아버지가 남원부사로 부임한 적이 있어서 실제 성이성은 10대 시절을 남원에서 보냈다고 하고, 이때 사귀었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춘향전에서는 아예 성이성이 쓴 시를 그대로 인용한다. 훗날 성이성은 세 차례에 걸쳐 호남 지역에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성이성은 유능한 암행어사였고 탐관오리들 때려잡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호남 지역에 암행어사로 파견되면서 성이성은 10대 시절 사귀었던 기생을 수소문했지만 소설과는 다르게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암행어사는 소설 속 몽룡처럼 과거에 급제하자마자 임명받을 수 있는 관직이 아니다. 성이성도 여러 높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아저씨가 다 되고나서야 암행어사직을 맡았고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10대 시절의 기생을 못 찾는 게 어찌 보면 더 당연하다.
춘향전은 왜 그토록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을까? 역시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 이야기야말로 가장 두터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는 불문율의 소설 법칙인가보다. 현대의 관점에서는 유치하고 시시콜콜한 클리셰일 수도 있으나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의 모티프는 신분제가 없는 오늘날보다 신분제가 강력했던 과거에 더 큰 충격을 주었다. 그것도 양반집의 귀한 공자님과 기생의 딸 사이의 사랑이라니. 사랑도 사랑이지만 소설 속 춘향과 춘향의 어미 월매의 대사를 보노라면 속물 같다는 느낌도 많다. 특히 월매는 행색을 의도적으로 초라하게 하여 정체를 숨긴 이몽룡에게 여간 실망을 한 게 아니며, 춘향이도 '과연 몽룡과의 연애가 순전히 사랑 때문일까'하고 의심이 들 정도로 이몽룡을 통해 신분상승욕구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춘향전은 단순히 연애소설이 아니라 춘향전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후기 민중들의 의식 각성을 상징한다는 정치적 코드로 해석되기도 한다.
춘향전 연구에 있어서는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설성경 교수가 우리나라 최고권위자이다. 이몽룡의 모델이 성이성인 것을 밝혀냈다. 설성경 교수는 춘향전의 저자가 남원 출신의 진사 조경남이었다고 말하며, 춘향전의 주제가 기존의 해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춘향전이 성리학의 원리에 입각한 구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려던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반박들도 여러 가지다. 춘향전에 대해 더 깊이 파고 싶다면 설성경 교수의 논문이나 저작을, 그리고 설성경 교수의 연구에 대한 반박글까지 찾아보기를 추천한다.
춘향테마파크 끝자락에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단아 김병종은 남원 출신의 미술가로 아직도 현직에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개인작업을 이어가다 지금은 서울대학교 미대 교수 겸 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직을 역임하고 있다.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김병종 화백님이 기증한 본인의 작품들을 모아 지난 2018년 개관하였다. 김병종 화백의 작품은 동양화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서양의 현대미술을 동양화풍으로 승화시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철학 쪽의 박사학위도 가지고 있는 김병종 화백은 예술을 철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그린 그림 장르 ‘문인화’를 특히 좋아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김병종 화백의 작품을 보는 감상법 중 하나가 붓의 질감을 느끼는 것이다. 김병종 화백은 오로지 동양의 모필로만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동양의 모필은 대단히 인간적이고 또한 인문학적인 재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도구를 넘어 사람과 감정을 나누고 소통하며 서로 넘나드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중략) 붓은 대단히 즉물적인 물건입니다. 붓을 잡은 이의 몸 상태와 심지어 기분까지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겨놓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면 경쾌하게 춤을 추고 마음이 무겁고 답답할 때면 좀체 나가려 하질 않습니다. 그래서 물아일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처음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섰을 때부터 붓과의 애틋한 인연이 시작되어 이제는 아예 생애 자체를 그 한 자루에 의탁해 사는 느낌입니다. 세상은 광속으로 변하고 온갖 새로운 것들로 번쩍대는데, 내 첫사랑 붓 한 자루는 나와 함께 세월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진정 낡아도 좋은 것은 사랑뿐인 것 같습니다." - 김병종
김병종 화백 작품의 소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겠다. 하나는 예수다.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한 김병종 화백은 자신의 예술성으로 신실한 신앙심을 표현했다. 심지어 그의 작품 가운데 '바보 예수' 연작도 있다. 각 종교별 절대자의 모습을 권위적이고 이상적으로 그릴 수도 있지만 김병종 화백의 예수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들과 함께 고뇌하고 괴로워한다. 결코 가벼워보이지 않는 건 거친 모필로 화백 당신의 진실한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으로 예수의 존재를 우리 인간과 더 가까이에 있게 해주는 숭고함을 자아낸다.
두 번째는 자연, 특히 물이다. 자연을 다룬 작품에선 화백의 순수한 심정을 엿볼 수 있다. 흡사 양주의 장욱진 화백의 작품과도 친연성을 갖는다. 둘 모두 동굴벽화를 연상하게 하는 원시적 회화성이 뚜렷하다. 두 화백 모두 아마 생명체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을 그린 작품에서는 강인한 생명력이 뿜어져나온다. 김병종 화백은 물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상선약수>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상선약수'란 도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생의 원리로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흐르는 성질의 무구한 물을 통해 김병종 화백은 자연의 생명력, 그 본질에 담긴 순수한 선을 추구했던 건 아닐까.
김병종 화백의 그림도 그림이지만 미술관의 구성과 건축도 훌륭하다. 물과 콘크리트의 조합은 안도 다다오의 건축을 떠올리게도 한다. 건축의 외관도 외관이지만 무엇보다 미술관의 구성이 김병종 화백의 작품세계와 사상을 관람객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이바지하고 있다. (미술관을 직접 찾아가보면 맨 마지막 전시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작가와 작가의 작품, 전시관 세 요소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만족도가 아주 높았던 미술관이었다.
첫째날 저녁은 춘향전보다 더 남원의 명성을 드높인 추어탕이다. 남원을 돌아다녀보면 세상의 모든 추어탕집이 남원에 모여 있다고 생각이 들 만큼 일반식당에서는 추어탕을 대부분 팔고 있다. 그 정도로 추어탕은 남원의 자랑이다. 미꾸라지를 한자어로 '추어(鰍魚 혹은 鰌魚)'라고 한다. 미꾸라지(추어)는 가을에 살이 가장 많이 올라 제철이라고 하며 갈아넣는 방식과 통째로 넣는 방식이 있는데 아무래도 갈아넣는 방식이 거부감이 덜한 편이다. 미꾸라지는 논이나 민물에 보편적으로 서식하기 때문에 추어탕은 오래 전부터 전국적으로 많이 먹는 음식이었다. 다만 지역별 차이점이 뚜렷한데 전라도식은 약간 걸쭉하고 빨갛게 해서 먹는다. 경상도가 고향이신 내 부모님이 해주시던 추어탕은 언제나 맑은 색이었다. 그렇다면 왜 남원이 추어탕으로 유명할까? 남원에는 섬진강의 지류 천들이 워낙 많아서 미꾸라지가 많이 잡힌다. 하지만 남원의 추어탕에는 비밀이 하나 있다. 원래 남원의 추어탕은 미꾸라지가 아니라 미꾸리로 만든 요리였다. 미꾸라지와 미꾸리가 생긴 건 비슷하지만 엄연히 생물학적으로 다른 종이라고 한다. 남원에서는 미꾸리로 추어탕을 해먹었는데 미꾸라지의 성장속도가 미꾸리보다 빨라서 남원 추어탕이 유명해지면서 빠르게 확보할 수 있는 미꾸라지만을 양식했고 현재는 거의 전부 미꾸라지 추어탕만 다루고 있다. 1959년 개업한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추어탕집인 남원의 새집추어탕을 비롯한 소수의 추어탕집만이 전통적으로 미꾸리를 사용한 추어탕을 내고 있다. 과연 추어탕의 성지답게 추어탕만 팔진 않는다. 미꾸리를 활용한 여러 가지 요리들로 구성된 세트 메뉴가 있는데, 남원에서는 추어로 숙회를 해먹는 요리가 있고, 또 깻잎에 말아 튀김으로도 해먹는다. 세트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이만한 몸보신 요리가 또 없다.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K-푸드다.
둘째날 눈이 즐겁게 떠졌다. 점심부터 먹고 둘째날 일정을 소화할 예정인데 점심으로 먹을 식당이 예전부터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남원에는 경방루라는 중국집이 있다. 무려 1909년, 그러니까 일제강점기가 시작도 하기 전에 문을 연 중식당이다. 이미 TV에서도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하긴 TV의 역사보다도 긴 식당이니.. 100년전과 오늘날의 메뉴가 같을 순 없겠지만 실력만큼은 그대로라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경방루에선 물짜장이 유명하다고 해서 물짜장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전라북도에는 물짜장을 파는 중국집들이 많다. 군산에도 '국제반점'이라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물짜장 중국집이 있다. 영화 <타짜>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곳이다. 물짜장은 전주에서 화교 한 분이 개발해서 순식간에 전북 지역으로 퍼지며 물짜장이 전라북도의 향토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경방루 물짜장의 맛은 새콤하니 달짝지근했다. 그런데 내가 충격을 먹은 건 탕수육이었다. 이 식당의 탕수육이 가장 유명하다곤 듣기만 하였는데 비주얼로는 특별할 게 없었다. 오히려 튀김 색이 어두워 눅눅해보였다. 물론 바삭거리진 않았지만 눅눅하기보단 튀김 식감이 매우 부드러웠고 속살은 쫀득하여 함께 갔던 일행들이 서로 눈이 휘둥그레져 아무 말 없이 서로 쳐다봤다. 연신 최근에 먹은 최고의 탕수육이라며 탕수육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둘째날은 남원시내에서 더 멀리 가보고자 한다. 신라 말 전국에 창건되었던 구산선문 중 하나인 실상사로 향한다. 통일신라는 중대와 하대로 구분한다. 중대는 전제군주권이 확립된 안정의 시대였지만 하대는 귀족들간의 왕위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던 분열과 쇠퇴의 시대였다. 불교국가였던 신라에서는 중대 때는 교종이라는 종파가, 하대 때는 선종이라는 종파가 유행했다. 교종은 불경의 교리를 중요시하고 통치이데올로기 성격이 짙은 엘리트적 종파인 반면 선종은 불경보다는 불심, 참선 수행을 더욱 강조하는 민중적 종파로써 신라의 중앙정부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던 하대에는 선종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빠르게 퍼졌다. 신라 하대에 선종의 바람을 일으킨 도의선사에 대해선 '양양 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잠깐 '양양 편'의 일부를 발췌해오자면 이렇다.
"귀국 후 도의선사는 선종을 설법하였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통치이데올로기의 불교를 강조하던 귀족과 왕족들이 선종을 환영해줄 리 만무했다. 신라의 수도에 활동하던 승려들 전부 교종 승려들이었기에 도의선사는 신라의 주류불교사회에서 이단시되었고, 도저히 수도에서 활동하기가 어려웠던 도의선사는 지방 곳곳을 전전하다가 양양의 깊은 산골까지 몰려들어가게 될 수밖에 없었다. 도의선사는 숨어들어간 이 양양의 산 속에 '진전사'라는 사찰을 세우고 제자들을 조용히 키워내며 생을 보냈다. 도의선사의 꿈은 양양에서 중단되는 듯했다.
그러던 중 도의선사의 선종은 제자 염거화상으로 이어졌고, 다시 염거화상은 그의 제자 보조선사 체징에게 선종의 계보가 이어졌다. 보조선사 체징은 선종사상을 굳건히 믿으며 오늘날의 전남 장흥의 가지산에 보림사를 세우고 최초의 선종 선문을 개창한다. 보조선사 체징이 세운 보림사의 선종 선문을 '가지산문'이라 하며 이후로 선종은 지방 곳곳으로 퍼지게 된다. 9세기 신라 중앙정부가 점점 부패해지거나 무능해지면서 지방의 호족들은 탈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나의 통일된 이론적 교리를 배척하는 선종을 경제적으로 물씬 지원해주며 전국 지방 곳곳에서 가지산문을 시작으로 큰 선종의 선문들이 생겨났고, 이중 가장 세력이 강하고 넓은 9개의 선문들을 구산선문이라고 했다. 지방호족들은 선종승려들과 선종사찰에 경제적 지원을 하고, 그들로부터 사상적 지지를 받으며 민심을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토대로 신라사회를 해체해가며 결국 신라는 하나의 지방호족에서 시작했던 왕건의 고려에게 멸망하고 만다." -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양양 편>
도의선사의 종맥을 이어받아 탄생한 구산선문 중 가장 규모가 컸다던 성주산문은 '보령 편'에서 소개한 바 있다. '동방의 대보살'이라 불리던 무염스님이 개창한 성주산문은 보령의 성주사에서 크게 확대되어 2천 명의 승려들이 수도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번 남원 편에서는 두 번째 구산선문 실상산문을 소개하고자 한다.성주산문의 개창자가 무염스님이었듯 실상산문의 개창자는 홍척스님이었다. 신라 말 대학자 최치원은 "북산에는 도의, 남악에는 홍척"라고 평하며 한국 선종의 선각자인 도의선사와 홍척스님을 동등하게 보았다. 홍척스님은 당나라에서 유학 후 귀국하여 신라 42대 국왕인 흥덕왕 3년 째인 828년 지금의 전북 남원에 실상사를 개창했다. 흥덕왕과 흥덕왕의 아들 선강태자 김충공이 홍척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적도 있었다. 홍척의 실상사도 흥덕왕과 선강태자의 경제적 지원으로 창건되었던 듯하다. 홍척스님의 실상사는 제자 수철 스님이 이어받았다. 실상산문을 개창한 건 홍척스님이지만 수철스님 대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흥덕왕이 홍척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면, 수철스님은 신라 48대 국왕인 경문왕에게 불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보령의 성주사는 현재 소실되어 터만 남아았지만 남원의 실상사는 실체가 남아 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9세기에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도 큰 사찰 중 하나였지만 1468년(세조 14년) 전소되고 말았다. 그간 승려들은 근처의 암자 백장암에 기거하면서 작게나마 일부 전각들을 복원하나싶더니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되어버렸다. 조선의 19대 임금 숙종이 크게 중건해주었다. 하지만 1882년(고종 19년) 양재묵, 민동혁 두 사람이 절이 있는 땅을 빼앗고자 실상사를 불태워버렸다. 이듬해부터 승려들이 힘을 모았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부분적으로 전각들을 복원하였다. 도굴의 기억이 많아 지금의 실상사 모습은 과거 구산선문의 영광을 생각한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크다. 차를 타고 가면 주차장에서 곧바로 실상사 경내로 들어올 수 있는데 사찰의 규모가 협소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실상사의 석등은 여느 훌륭한 명작 석등 못지 않다. 이 석등만큼은 통일신라 시대 홍척스님이 개창했을 당시의 석등이다. 높이 5m의 큼지막한 실상사 석등은 모범적인 비례미를 띠고 있어서 감상자의 시선을 참으로 편안하게 해준다. 하대석-간주석-상대석의 구조와 조각무늬가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특히 간주석은 단순한 일직선의 기둥이 아닌 3단으로 나눈 뒤 앙증맞은 무늬들로 장식되어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옥개석(지붕돌)의 귀퉁이다. 옥개석의 각 귀퉁이를 연꽃 모양으로 치켜올려 훌륭한 악센트를 가미했다. 실상사 석등의 연꽃 귀퉁이는 화려한 보주와 어울리며 석등의 치솟는 상승감을 자아내준다.
실상사에서 만족하긴 이르다. 실상사에서 차를 타고 10분만 험하고 가파른 길을 오르면 실상사의 부속암자 백장암이 있다. 실상사가 불타버렸을 때 승려들이 백장암에서 기거했고 무엇보다 이곳엔 국보 10호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이 있다.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의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 9세기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상사로부터 약 5km 가량 북쪽으로 가다보면 백장암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이 암자에는 국보 10호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이 있다.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은 3층이라는 양식에서 알 수 있듯이 통일신라 전형의 양식이다. 통일신라 연간엔 90% 이상이 3층 양식으로 만들어졌고, 전국에 있는 3층 석탑들도 대부분 통일신라 혹은 고려 초기로 소급되고 있다. 통일신라는 중대와 하대로 나뉘는데, 중대에선 고전적 미술양식이 완성되었다면 하대에서는 완성된 고전양식에 틀을 깨는 새로운 형식들이 시도되었다. 석탑을 만드는 조석예술에서는 3층이라는 기본양식을 고전적 방법으로 두고 이를 바탕으로 파격을 가하는 이형탑들이 만들어졌다.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도 9세기 하대에 조각된 석탑으로 완벽한 이형탑은 아니지만 3층양식이란 토대로 디테일 면에서는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이형적 요소들이 시도되었다. 우선 일반적인 석탑은 층이 높아질 수록 좁아지는 체감률이라는 게 있는데, 이 탑은 체감률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거의 일직선으로 곧은 맵시를 보인다. 또한 받침돌을 최소화하여 몸통부를 자신감 있게 드러내고 있으며, 각 탑신면에는 각종 불상들을 조각해넣어 장식성을 가미하였다. 받침돌을 최소화하는 방식에서 자칫 안정감이 부족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탑신의 1층 높이를 의도적으로 높여 보완하였다. 이 또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석탑양식이다.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은 탑의 상륜부도 그대로 전해진다. 대부분의 석탑들은 상륜부가 훼손되기 마련인데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은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사적 가치를 인정받고도 있다. 체감률이 거의 제로에 수렴하는 곧은 직선에 또 곧바로 상승하는 상륜부는 탑의 수직성을 제대로 살리고 있다.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은 그대로도 멋지긴 하지만 예술이라 함은 나무와 함께 숲도 바라볼 줄 알야아한다. 동양예술에선 특히 더 그렇다. 동양의 건축이나 전통적 설치예술은 혼자 돋보이는 방식을 병적으로 기피하고 조화로움, 즉 "얼마나 어울리는가"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둔다. 따라서 탑이라는 것은 본디 그 탑이 공존하고 있는 사찰 전체 속에서 파악하고 더 나아가 주변 자연과의 배치까지 파악해야 한다. 다만 목조건축이 대부분이었던 한국 사찰들은 화재로 남아있지 않고 석탑만 덩그러니 놓여 있기에 맥락 파악에 다소 제한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도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은 우리의 귀중한 작품인 것이다.
남원 여행을 떠나기 전 이것저것 자료를 찾던 중 황산대첩이 일어난 곳이 남원이었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산대첩이야 알고 있었고 지리산 언저리에서 싸웠다고만 알고 있지 그곳이 남원이었다니. 도저히 안 가볼 수가 없어서 황산대첩의 전적지와 그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둔 황산대첩비지를 찾았다. (계백과 김유신이 싸웠다는 황산벌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다.) 황산대첩은 고려시대 말 이성계가 왜구들을 평정한 고려시대 왜구와의 최종전이었다. 왕이 되기 전 군인 시절의 이성계에게는 전설적인 전투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가 1380년 일어난 황산대첩이다. 고려 말 일본 왜구들의 횡포와 노략질이 매우 극심했다. 매년 아니 거의 매월 왜구들이 한반도를 노략질했고, 해안가만 피해를 본 게 아니라 왜구들은 한반도 내륙으로도 깊숙이 들어와서 약탈을 일삼았다. 왜구들의 약탈은 점점 과감해져서 심지어 세금운반선인 조운선을 공략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고려인들보다 왜구들이 한반도 지리에 더 빠삭했다.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침입이 1380년이었다. 무려 500여 척이라는 유례없는 대규모 왜구 선박들이 고려로 쳐들어왔습니다. 당시 남북조로 나뉘었던 일본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던 남조는 규슈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고 여기서 쫓겨난 사무라이 세력들이 왜구들과 결탁해서 작정하고 고려로 넘어온 것이었다. 500척의 왜선이 서천이랑 군산 사이 진포라는 곳에 정박을 하고 왜구들은 내륙으로 약탈을 하러 떠났는데, 고려의 최무선 장군이 화포를 사용해서 500척을 전부 부숴버렸다. 우리나라 최초로 화포가 사용된 진포대첩이었다. 이러니 왜구들이 일본으로 돌아갈 배가 없어져버렸다. 왜구들은 기왕 이렇게 된 거 고려 곳곳을 유린하겠다며 한반도 남부 지방을 탈탈 털다가 지리산까지 내려왔다. 고려는 9명의 최고원수들이 이끄는 1만의 병력을 보내는데 경남 함양에서 대패배를 해버리자 최영의 추천에 따라 이성계가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성계도 이성계지만 이성계가 보유하고 있던 군벌이 고려에서 가장 강한 기병대였다. 이성계는 남원의 황산에 왜구들이 집결해있다는 정보에 남원에 도착했다. 이성계는 우선 보병들이 왜구들과 정면에서 싸우게 하고 그 사이 이성계는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크게 돌아 왜구들의 후면을 공격했다. 왜구들은 황급히 황산의 높은 곳으로 도망쳤다. 고지대를 선점한 왜구들은 아래에 있는 고려군에게 화살을 퍼부으며 견고한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산의 길이 너무 험하고 가파른 절벽길이라 병사들이 진군이 힘들다고 하자 이성계는 본인이 직접 나서서 가파른 길을 올라가 길을 뚫었다. 다시 한번 격전이 치러지는 가운데 이성계는 두 번이나 낙마하고 왼쪽다리에 화살을 맞을 정도로 난전이 펼쳐졌다. 이성계가 병사들에게 “겁이 나면 도망가라. 나는 적과 싸우다 죽겠다”라며 전투의지를 다졌다. 마침 왜구 적장 아지발도가 눈에 띄었다. 신궁이었던 이성계는 화살을 쏴 정확하게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뜨렸고 아지발도가 떨어진 투구를 주우려는 찰나에 이성계의 의동생 이지란이 한번더 활을 쏴서 아지발도를 사살했다. 적장을 잃은 왜구들은 도망치다가 반 이상이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었다. 살아 도망친 왜구의 수는 고작 70명이었고, 황산대첩 이후로 한동안 왜구들은 한반도를 침략하지 못했다.
황산대첩비지는 전적지에 승리를 기념하는 탑비 하나 있는 정도라 볼만한 것이 그렇게 많은 곳은 아니다. 그리고 황산대첩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황산대첩비가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어 광복이 되고 나서야 복원됐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조상이 일본인의 조상을 혼쭐낸 승전비를 가만 냅뒀을리 만무했을 것이다. 황산대첩비지를 가면 파비각이라고 있다. 일제 때 훼손되었던 비석의 파편들을 모아다가 보관해둔 곳이다. 황산대첩비지 옆에는 '어휘각'이라고 있는데, 황산대첩 승리 후 이성계 장군이 황산대첩의 승리는 한 명의 공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힘써 이룬 승리라고 바위에 새겨두었는데 일제가 이를 또 훼손시켜버려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남원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곳은 서도역 폐역이다. 다른 폐역들과 달리 목재로만 세워진 서도역 폐역은 고풍적인 인상 덕에 많은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로 유명해졌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뿐 아니라 1980~1996년까지 연재되었던 최명희 소설가의 대하소설 <혼불>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남원의 몰락 양반가를 다룬 소설로 큰 히트를 쳤으며 서도역 인근에는 혼불문학마을도 조성되어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남원 시내로 돌아왔는데, 아직 버스 시간까지 남아 있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던 중 날이 저물었으니 광한루의 야경이 떠올랐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보니 광한루 야경만큼은 보고 가야할 듯 싶어 이번에는 바로 광한루로 마주할 수 있는 동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광한루를 영접하는 순간 광한루 야경은 내 탁월한 선택이었구나 스스로에게 칭찬했다. 나는 본디 야경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자체의 멋을 가리고 인위적으로 예쁨을 강요하는 듯해서다. 하지만 광한루의 야경은 내 여행신념을 무너뜨릴 정도로 동화적이고 낭만적이다. 몽룡이와 춘향이가 하하호호 밤몰래 노닐던 소리와 방자와 향단이가 서로에게 눈길을 보내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광한루 구경이 더욱 풍부해진다. 호수 물에 비춘 광한루와 달의 반사상이 소설 속 세계처럼 보이고 저 호수에는 춘향이와 몽룡이가 정말로 있을 것만 같다. 아니 있었으면 하는 괜한 순수한 생각을 해본다.
남원에 오면 남원뿐 아니라 <춘향전>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춘향전은 시대를 막론하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작품이었다. 그만큼 단순한 애정소설을 뛰어넘어 여러 층위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작품이다. 그간 <춘향전>을 모티프로 각색한 여러 대중작품들이 나왔지만 더 많고 다양한 작품들이 나오길 바란다. <춘향전>은 우리나라의 소중한 컨텐츠 리소스이고 <춘향전>의 잠재성만큼 우리나라 컨텐츠 기획력의 잠재성도 무궁무진하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김병종 <김병종 화집Ⅰ-바보예수> & <김병종 화집Ⅱ -생명의 노래>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김병종 화백의 모든 작품들을 구경하실 순 없습니다. 남원 여행을 통해 김병종 화백의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고 다른 작품들도 궁금하신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김병종 화백의 작품들을 모은 화집이 1권과 2권으로 나누어 출판되어 있습니다. 소재별로 1권은 '바보예수'라는, 2권은 '생명의 노래'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병종 화백의 예수 그림은 오로지 화백 당신만이 그릴 수 있는, 어느 누구도 그릴 수 없는 대체불가한 작품들입니다. 자연을 그린 그림들 또한 독특해서 자연에 대한 한 예술가의 철학적 접근론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술관에서 어느 정도 김병종 화백의 그림세계에 빠지고 난 다음 화집을 보면 시야도 넓어지고 안목도 달라질 겁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가장 한국적인 영화를 만들어오던 임권택 감독님의 <춘향뎐>입니다. 조승우 배우의 데뷔작이기도 하죠. 단순히 춘향전의 내용을 답습하고 재현하는 영화는 아닙니다. 현대의 대학생들이 판소리 공연에 구경을 가고, 창가의 춘향가 노래에 맞추어 춘향전의 세계로 들어가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춘향전을 다룬 영화 중에 가장 예술적인 영화랍니다.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한국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작으로 초청되었죠. 일부 영화평론가들은 <춘향뎐>을 임권택 감독 필모 중 최고작으로 뽑기도 합니다. 정성일 영화평론가님은 “세대에서 세대를 건너온 소리마당이 여기서 비로소 영화라는 서구 근대와 처음으로 조화를 얻어내고 화해한다”고 평했으며, 허문영 영화평론가님은 “마침내 한국적 영화미학이라는 미지의 영토를 발견했다”고 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