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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ug 29. 2022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인제 편]

산촌풍속을 여행하다


우리나라 국토는 좁아서 다양한 곳들을 구경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기 힘들다. 위아래로 길쭉한 대한민국은 북쪽과 남쪽이 확연히 다르고 동고서저의 지형에서 평지에 사는 사람들, 하천의 중류에 사는 사람들, 바닷가에 사는 사람들, 무엇보다 산골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풍습과 생활모습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어딜 가느냐에 따라 각양각색의 한국을 구경할 수 있다. 그중 가장 미지의 광경, 베일에 감추어진 곳은 왕래가 다소 어려운 산골지방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더더욱 산골지방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 지금에서야 고속도로가 뚫리고 터널이 만들어졌지만 과거 오고 가기 힘들었던 산골지방은 그만큼 외부접촉이 적어 고유의 생활풍경이 많이 훼손되지 않은 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산골지방하면 자연스레 강원도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도 전부 똑같은 산골지방이 아니다. 한국의 척추라고 하는 태백산맥 기준 영서, 영동 지방이 다르고 태백산맥이 가로지르는 산골지방이 또 다르다. 보통 강원도의 관광지는 영서, 영동 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영서의 춘천, 영동의 속초나 강릉 등 말이다. 왕래가 적었던 산골지방은 개발도 어려운 부분이 있어 관광지로 활성화되지 않았는데 이는 나에게 역설적으로 더 관광의 욕구를 자극한다. 강원도 산골지방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로 인제를 추천한다. 전설의 동물 기린의 굽처럼 생겼다는 신비스러운 곳 인제. 기린의 가호를 받고 있는 인제의 관광지들 가운데 소개하고 싶은 곳들이 한가득이다.



하얀 인제성당

인제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리면 멀지 않은 곳에 인제성당이 있다. 하얀 인제와 어울리는 참으로 하얀 성당이다. 정면 파사드는 좌우 완벽한 대칭구조로 비례미와 균형미를 통해 안정감 있는 모습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 성당의 압권은 색감일 것이다. 색감의 톤은 전반적인 흰색 톤에 첨탑과 십자가만 검은 톤을 주어 지나치게 가벼워보이지 않으면서 성당의 경건함을 유지한다. 성당의 정 가운데에 기준점 역할을 해주고 있는 하얀 예수상과 피에타상은 대칭미의 한 송이 꽃과 같다. 인제성당은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4년 6월에 설립되었고 린치 요한 신부가 최초의 신부로 부임했다고 한다. 처음 설립되었을 땐 본당만 있었으나 1956년 미국의 원조로 사용되고 있지 않던 극장 건물을 개축하여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고 1970년부터 한국인이 운영하였다. 현재 인제성당은 인제읍 전 지역을 관할하고 있고 춘천교구 소속이다. 



진부령 청정바람이 만든 용대리 황태마을

'용대리 황태'라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익숙한 어감일 것이다. 황태요리를 하는 식당은 보통 '용대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 놀랍게도 용대리는 식당상호가 아닌 인제 북면에 있는 지명이다. 인제의 용대리에 가면 황태를 만드는 황태마을이 있고, 황태요리집이 즐비해 있다. 


지난 '속초 편'에서 반건조한 명태를 코다리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때 명태를 완전히 얼리면 동태, 얼렸다가 다시 녹이는 행위를 겨울철에 반복하는 명태를 황태라고 한다. 참고로 완전히 말린 명태는 북어라고 한다. 이토록 명태 하나 가지고 조리법에 따라 명칭이 저마다 다른 이유는 지역별로 먹는 방법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지금에서야 정보화시대에 지역별 조리법에 따른 서로 다른 명칭들이 퍼져 오히려 더 헷갈리지만 지역 간 왕래가 적었던 옛날에는 자기네 동네만의 먹는 방법만 알 뿐이었고, 겨울이 유난히 추운 강원도 산간지방에선 명태를 냉동시켰다가 해동시키기를 반복한 뒤 먹었다.


본디 황태는 이북요리이다. 인제는 과거 38선 이북 지역의 북한 땅으로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도로 그어지면서 남한 영토로 편입되었고 이북이 고향이신 탈북민들 중 상당수가 인제 용대리에 정착해 본인들이 고향에서 먹던 황태를 해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탈북민으로 별달리 경제활동을 하기 힘들었던 용대리 황태마을 사람들이 황태를 팔면서 황태요리가 유명해졌다. 인제 용대리는 태백산맥의 진부령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청정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일교차가 커서 우수한 황태 생산에 적합하다고 한다. 용대리 주민의 80%가 이 황태산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하며 용대리에 들어서면 황태식당과 곳곳에서 황태를 줄에 걸어 냉동 혹은 해동시키고 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다. 어디가서 이 많은 황태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용대리 황태마을에서 전국 황태생산의 70%를 담당하고 있다. 황태라 해봤자 다 같은 황태가 아니냐는 사람들에겐 원산지에서 갓 만든 음식을 바로 먹는 행위의 즐거움을 강하게 설파하고 싶다. 질 떨어지는 황태는 푸석하여 먹기 힘들고 이에 끼기 쉽상이지만 품질 좋은 황태는 적당히 씹는 맛이 매력적이면서 부드러워 식감이 좋은 편이다. 국물의 풍미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해장용 밥이 아니었던 게 아쉬울 뿐이었다.




만해 한용운을 탄생시킨 백담사

인제처럼 산골마을들은 옛부터 영험한 절들이 있었고 종교수련자들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인제를 다녀간 종교수련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수도승은 만해 한용운이다. 민족운동가, 시인, 승려 등 만해 한용운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규정되는 위인이 아니다. 단 한 가지의 측면에서만 만해 한용운을 논평해도 수많은 족적들을 소개해야 한다. 이 가운데 승려로서의 만해 한용운을 각성시킨 절이 인제의 백담사이다.


용대리 황태마을에서 차로 멀지 않은 거리에 (같은 북면이다) 백담사가 있다. 정확히는 백담사가 아니라 백담사 주차장이 있다. 산중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백담사는 개인적으로 갈 수 없다. 백담사주차장에서 표를 끊고 관리자의 동행하에 백담사행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종교적 신비의 공간이다. 마땅히 정해진 차시간은 없고 인원수가 채워지는 대로 출발한다. 버스로 약 15분 정도는 들어가야 하며 그 길이 매우 험하고 가파라서 경치를 보는 즐거움 반 위험천만한 길을 지나가야 한다는 불안함 반으로 지루할 틈 없이 15분이 지난다. 버스기사님의 노련한 운전실력으로 길은 무서울지언정 꽤 편안한 승차감으로 도착할 수 있다.



주차장에서 내려 하천 위에 놓인 넓직한 다리를 하나 건너면 백담사가 나온다. 아직 겨울이라 얼어 있는 하천 사이로 살짝씩 녹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다리를 건너면 정면에 극락보전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만해 한용운의 생애를 기리고 그의 저술집, 친필글귀 등을 전시해둔 만해기념관이 있다. 우선 만해기념관부터 들러본다. 민족운동가로서 혹은 시인으로서 만해 한용운은 추후 기회가 된다면 서울의 심우장을 다룰 때나 홍성 편을 쓸 일이 있다면 그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이번엔 공간의 종교성을 생각해 승려로서 혹은 불교철학가로서 만해 한용운의 이지()를 간단히 소개해보고자 한다.


한용운은 몰락 양반 가문 집안 출신으로 홍성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하급공무원으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진압관군에 소속되어 있었다고도 한다. 동학농민운동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한용운은 이미 사회와 국가가 대혼란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잘 자각하고 있었고, 어지러운 속세로부터 벗어나고자 들어간 곳이 설악산의 백담사였다. 처음엔 오세암이라는 작은 암자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불교교리를 공부했다. 한용운은 어느 시점에 하산하고는 블라디보스토크 유학을 가는데 그곳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귀국했다. 1905년 대한제국은 굴욕적인 을사늑약을 강요받아 외교권이 박탈되는 등 대한제국의 미래가 사실상 정해져 있던 상황에서 부친이 의병들에게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지자 한용운은 다시 백담사로 찾아가 공식적으로 승려로 출가하였다. 한용운의 본명은 한정옥이며, 은사 승려에게 '용운'이라는 법명을 받고 '만해'를 법호로 정하였다. 백담사의 승려로 있으면서 한용운은 원론적인 불교경전에만 몰두하지 않고, 불교교리를 넘어서 다양한 근대사상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한용운은 종교계가 더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가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기존의 사회참여적이지 못했던 불교계를 탄식했다. 아니 오히려 당시 불교계는 상당수가 일제에 회유된 존재들이었다. 일제가 대한제국으로 야금야금 진출할 때 종교계부터 포섭했기 때문이었다. 만해 한용운은 불교계의 타락상을 안타까워 하며 강력한 사회의식을 스스로 각성시켰다. 그리하여 만해 한용운은 사회로 나와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몰두했고 불교계의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이른바 <조선불교유신론>을 1년 여만에 탈고하여 1910년 발표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은 평등주의와 구세주의를 바탕으로 만해가 주장하는 11가지 불교 개혁안들이다. 이 11가지로는 승려 교육제의 개혁 / 염불당의 폐지 / 포교방법의 근대화/ 대중적, 모험적, 구세적, 경쟁적, 사상의 고취 / 전근대적 불가소회(佛家塑繪)의 철회 / 각종 불교 의식 개혁 / 승려들의 자발적 노동력에 의한 자활(自活)과 그것에 의한 인권회복 / 승려 결혼 자유화 / 사원 주직(住職)의 선거제 채택 / 유신론자의 대동단결 /사원통할제의 개혁 등이었다. 요약해보자면 불자들의 사치풍조와 과도한 숭배의식을 최소화하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승려들도 깨우칠 필요가 있다는 내용들이다. 이른바 '불교의 실천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요,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중략)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밖에도 각 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 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일수 없도록 종접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의 불교에 있어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구나,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까,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되는 까닭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아, 그러나 이것 역시 알수 없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 서론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만해 한용운은 더 강도높은 불교계의 친일행위를 경계하고 근대적 민중불교의 대중화를 꾀했다. 1912년에는 팔만대장경을 열람하는데 소문에는 만해가 대장경을 줄줄 외우고 있다고 할 정도였다. 팔만대장경이란 이론으로 중무장한 만해 한용운은 부산의 범어사에서 일전 발표했던 <조선불교유신론>의 내용을 더 보강하여 <불교대전>이란 현대판 불교경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만해 한용운은 다방면에서 불교의 대중화에 몸을 던졌고 1918년에는 월간 불교잡지 <유심>을 간행했다. 

이곳에서 근대적 불교사상을 홍보하는 동시에 잡지를 간행하는 과정에서 만해는 문학의 매력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토록 만해 한용운은 불교계에서 이미 독보적 이름을 알리고 있었기에 1919년 종교계 대표들이 모인 민족대표 33인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만해는 그간 산간의 은둔형 불교계를 비판하며 올바른 현실을 주도할 수 있는 '믿음'으로서의 종교가 아닌 '사상'으로서의 종교를 역설하며 나아가 참여적 실천성을 도모했다.


3.1운동 때 투옥된 한용운은 몇 년 후 석방되고는 방향을 살짝 틀어 종교개혁운동보다는 문학활동과 사회단체활동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제강점기 후반기로 갈수록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여러 민족운동들이 좌절되는 상황에서 만해는 서울의 성북동에서 조용히 말년을 보내다 건강이 악화되어 해방을 1년 앞두고 열반에 들었다.


만해의 유신론, 불교개혁의 또 다른 근원적인 전제는 불교가 산중에서 도회지로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불교가 도회지로 나온다는 의미는 단순히 공간적인 차원에서 사찰 및 승려의 거주처가 도회지로 이전한다는 의미를 뛰어 넘는 것이었다. 물론 만해가 이를 강조한 것은 불교의 기존에 처한 위치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공간적인 뜻이 담겨 있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의 불교의 역사 및 관행을 부정하고 새 시대에 조응, 맞서기 위한, 이끌기 위한 단초인 것이다. 요컨대 이전 불교사와의 단절이요, 새 시대의 불교를 주체적․자율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식의 산물인 것이다. (중략) 부연하면, 대중불교의 건설이 만해가 그리는 불교개혁의 최종 단계가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필자는 만해가 여기에서 제시한 ‘대중불교’를 불교의 ‘근대성’과 연결하고자 한다. (중략) 만해는 자신의 불교개혁의 핵심, 불교의 나갈 방향을 대중불교라 하였다. 그런데 그는 대중불교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시설, 실행이 뒤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시설은 불교의 교화가 대중층에 파급시킬 수 있는 사회, 교육적 시설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행은 불교도 스스로가 대중과의 교섭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김광직 교수, <불교의 근대성과 한용운의 대중불교>


만해기념관을 나오면 사상가로서 불교계의 거두승려로서 만해 한용운을 탄생시켰다는 생각에 백담사가 한층 더 경건해보인다. 꼭 한용운의 흔적이 아니더라도 백담사는 전각 밀도가 높지 않아서 간단히 걸어보기 좋다. 극락보전 자체도 그렇고 타 전각들의 자리매김도 그렇고 반듯한 대칭과 단정한 앉음새가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준다. 거대하고 늠름한 탑이나 전각들이 스스로를 과시하는 사찰보다 깊은 산속의 사찰이라면 제멋을 내세우지 않고 경건함을 유지함으로써 되려 산 전체를 종교적 공간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 확실히 겨울산의 찬기운이 정신을 맑게 해준다. 괜히 한용운이 이곳에 온 게 아닌지 싶다. 하긴 나는 지금 다른 산도 아니라 설악산의 계곡 한 가운데 있으니 이 설악산의 수많은 계곡 중 하나에 설악산의 산기가 모여진다 생각하니 미지의 피안에 있는 듯한 몰입감 물씬이다. 이런 신비스러운 느낌 때문인지 몰라도 전두환 내외가 한때 '권좌'였던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은신했던 곳이 백담사이기도 했다. 나중에 전두환이 구속되었을 때 이순자 여사가 백담사를 다시 찾아오니 백담사 측에서 거절했다고 한다. 백담사를 돌아다니다 보면 전두환의 흔적들이 꽤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만해 한용운이 백담사의 자랑이라면, 전두환은 백담사의 흑역사다. 

백담사 인근에는 동국대학교에서 운영하는 만해마을이 있다. 만해를 기리는 더 다양한 부속건물들이 있으며 매년 만해축제도 개최된다고 한다.


백담사에서 주차장으로 다시 돌아오는 셔틀버스도 인원수가 채워지는 대로 출발한다. 정해진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백담사에서 시간을 꽤 잡아먹는 편이다. 아직 어둑어둑하진 않지만 겨울이라 곧 어두워지고 산간지역이라 어두울 때까지 밖에 있어서 좋을 건 없다. 백담사의 어원이 설악산엔 맑은 연못들이 100개나 있다고 해서 붙여졌을 만큼 설악산 내린 인제에는 멋드러진 계곡들이 많고 그만큼 밤별 잘 보이는 곳에 가성비 좋은 펜션들도 많은 편이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시내에서 식량들을 사들고 펜션에 가 별빛을 안주 삼아 인제의 첫날을 맑은 공기와 함께 보낸다.


속삭이는자작나무숲

다음날 이제는 인제의 얼굴 같은 곳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원대리 자작나무숲으로 떠난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의 공식명칭은 '속삭이는자작나무숲'. 이름부터 몽글하고 동화 같다.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에 인제에서 가장 유명한 막국수집 '옛날원대막국수'가 있다고 해서 들렀다. 나중에 인제를 여행갔다왔다고 하면 다들 이 식당을 들렀는지부터 묻는다. 정확한 식당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원대리에 있는 그 막국수집!"하며 반가워한다. 막국수를 춘천의 명물로 인식하는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이는 춘천의 닭갈비에 막국수를 같이 먹으면서 동시에 유명해졌지, 막국수의 고향은 강원도 산간지방이기 때문에 인제야말로 막국수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막국수가 지역별로 먹는 방식이 판이해서 원조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지만 막국수는 과거 먹을 게 없던 산간지역의 화전민들이 산속에서 쉽게 자라는 메밀을 아무렇게나 갈아 면으로 뽑아 먹던 국수에서 유래했다. 그래서 이름조차도 막 만들어먹었다고 해서 막국수다. '옛날원대막국수'집은 1978년부터 40년 넘게 이어지고 있고 직접 방앗간에서 제분한 메밀을 사용한다. 역시 모든 직접 재료를 만드는 음식이 맛있는 법이다. 위에 고명들도 정확히 어떤 것들이 들어간 지 모르겠지만 메밀 식감과 향의 조화는 다른 막국수집에선 맛보기 힘들다.



이제부터 속삭이는자작나무숲에 들어간다.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는 뜻에서 앙증맞게 유래한 자작나무는 냉대림의 대표적인 식생이다. 한반도의 경우 북위 38선을 기준으로 이북이 냉대림, 이남이 온대림이라 강원도 인제에서 자작나무가 날 수 있겠거니 싶지만 자작나무는 주로 북위 40도를 넘는 곳에서 나기 때문에 남한에서는 자작나무가 자생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남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자작나무는 인력으로 심어 키운 것들이다. 그나마 수도권이나 강원도 중북부의 기후 덕에 심어서 키우는 것까진 가능하나 그 남쪽으로는 자작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라고 하니 자작나무가 그렇게까지 흔한 나무는 아니다. 속삭이는자작나무숲의 흰색의 자작나무들이 연출해주는 하얀 세상은 감미로운 동원(童園) 같다. 흰 눈이 소복히 쌓여 있는 겨울에 가야 설백의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기에 일부러 눈오는 날에 맞추어 힘들게 찾아왔다. 자작나무숲을 돌아다니다 보면 자연스레 영화 <러브레터>가 떠오른다.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 타던 소년이었다

그래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걱정이 많아지고

인생이 정말 길 없는 숲 같아서

얼굴이 거미줄에 걸려 얼얼하고 근지러울 때

그리고 작은 가지가 눈을 때려

한 쪽 눈에서 눈물이 날 때면

더욱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이 세상을 잠시 떠났다가

다시 와서 새 출발을 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운명의 신이 고의로 오해하여

내 소망을 반만 들어주면서 나를

이 세상에 돌아오지 못하게 아주 데려가 버리지는 않겠지


- 로버트 프로스트 <자작나무> 중에서



속삭이는자작나무 숲은 아름다운 만큼 입산하기가 꽤 까다롭다. 등산로가 그렇게까지 가파르거나 험난한 코스는 아니지만 왕복 3시간 정도는 소요된다. 입장 가능시간은 연중 9시부터이고 입장마감시간은 하절기의 경우 오후 3시, 동절기의 경우 오후 2시까지다. 하절기는 5월 4일부터 10월 31일까지고, 동절기는 12월 15일부터 1월 31일까지다. 그 사이 2월부터 4월까지, 그리고 11월부터 12월까지는 아예 입장 자체가 금지되어 있으니 운영시간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가야 헛걸음을 피할 수 있다. 그럼에도 한 번 이 흰색의 축복이 살포시 내려앉은 곳에 갔다와 보면 매 겨울마다 하얀 오두막의 이미지가 새록새록 떠오르리라 장담한다. 



박인환의 허무주의

울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터미널이 있는 인제 시내로 다시 왔다. 어제 처음 이곳을 왔을 때와 느낌이 완전 다르다. 시내 근처에 박인환문학관과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마지막으로 들러보기로 했다. 전후 5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박인환의 고향이 바로 인제다. 인제에서 태어났지만 박인환은 학창시절을 서울과 황해도, 평양에서 보냈다고 한다. 심지어 박인환 시인은 의대생이었다. 그러나 의학에 큰 뜻이 없던 박인환은 광복 후 서울에서 '마리서사'라는 서점을 운영하였고 서점을 매개로 많은 문인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혼인 이후 자유신문사와 경향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1950년부터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했고 1955년 생애 첫 시집 <박인환 선시집>을 출간했다. 그러나 이듬해 1956년 박인환 시인을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박인환 선시집>이 그에게는 유일한 시집이 되었다.



박인환 시인은 시인으로서 등단이 다소 늦었고 요절하는 바람에 시집을 한 편밖에 출간하지 못했다. 대표작들도 다른 시인들에 비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 한 편의 시집으로 시의 지평을 넓히며 당대 한국시단계에 확고한 족적을 남겼다. 그가 개척했던 새로운 시의 영역이란 흔히들 니힐리즘이라고 불리는 '허무주의' 였다. 이미 유럽 등 서양의 예술계에선 '허무주의' 사조가 많이 다뤄졌지만 어두운 식민지 과거를 겪으며 문화예술계가 제한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던 당대 풍토에서 허무주의를 제대로 다룬 예술가가 없었다. 박인환에 이르러 비로소 허무의 본질에 대해 캐묻기 시작하며 니힐리즘이란 장르가 한반도 문토에 천착하였다. 특히 박인환의 대표작 <목마와 숙녀>는 삶의 처연함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허무주의의 정수로 꼽히는 작품이다. 영국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사망했다는 소식에 쓴 이 시는 아끼는 시인을 잃었다는 개인적인 아쉬움과 애통함과 함께 허무주의로 확장되는 작품으로, 버지니아 울프 또한 대표적인 니힐리스트였다. 박인환의 허무주의는 버지니아 울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허무주의를 이야기하다보면 인생의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용기 혹은 굳은 결의 등이 동반되고는 하는데 이는 올바른 허무주의 감상법이 아니다. 세상의 허무함을 꼭 극복해야만 하는 건가? 누군가는 어두운 삶의 속살을 소재로 염세적 세계관 그 자체를 노래하는 것 역시 예술의 정도 중 한 가지가 아닐까. 박인환의 허무주의 사상은 60년대와 70년대의 박재삼 시인에게로 이어진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木馬)를 타고 떠난 숙녀(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木馬)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少女)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雜誌)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목마와 숙녀> 전문




인제산촌민속박물관

강원도는 한국의 숲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강원도는 지질학적으로 태백산맥이 정통으로 지나는 줄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강원도민들은 산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 산자락이 굽이굽이 겹쳐 있는 강원도 산간지방의 사람들은 어떻게 산촌을 만들고 어떤 삶을 일구었을까? 한국의 산촌민 사람들이 어떤 문화 속에서 살아왔는지 강원도만큼 확실하게 보여주는 곳이 또 없다. 박인환문학관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은 산촌민들의 삶과 문화의 현장을 전시해둔 곳이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은 2층 구조로 1층은 입장을 하는 로비이고 전시는 2층부터 시작한다. 봄-여름-가을-계절 순서로 각 계절별 우리네 산속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를 재미있는 모형들을 통해 시각적으로 전달해주는 전시 형식으로 인형들 보는 재미가 또 쏠쏠하다. 그들은 어떤 도구를 사용했고, 어떤 옷을 입었고,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실제 산촌민들만이 사용하는 도구들까지 전시되어 있기도 하며, 산속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동물들 박제모형들까지 구경하실 수 있다.






인제 여행은 한국의 산악풍속을 여행하기 위함이었다.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의 내용에 이어서 강원도의 산악생활과 문화를 이야기하며 인제 여행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강원도의 영동과 영서를 가르는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두 문화가 상이하고 또 영동과 영서 사이의 산촌문화 역시 두 지역과 다른 제3의 고유성을 가지고 있다. 강원도 산촌에는 화전민들이 많았다. 자기 땅이 없는 가난한 농민들이 농사를 짓기 위해 산에 불을 지핀 뒤 남은 재를 활용해 임시적으로 농토를 만들어 그 위에 조악하게나마 짓는 농사를 화전농업이라 한다. 화전을 하면 재가 남아 농토로 활용할 수 있단 장점이 있지만 금세 죽은 땅이 되기 때문에 흙이 회복될 때까지 화전민들은 새로운 화전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화전민들에게 이동은 필연적이다. 그러나 산촌은 겨울이 유난히 춥고 길기 때문에 거주공간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화전민들은 통나무로 만든 귀틀집에서 거주하였는데 지붕의 재료에 따라 참나무껍질을 이용한 굴피집과 소나무껍질을 이용한 너와집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산촌지역일수록 민간신앙이 발달되는 법이다. 험준하고 호열한 산세들은 신적 존재들을 연상케 하며 경외감을 만들어내고 바다만큼이나 안전이 보장되지 않기에 신변의 보호를 염원할 기도의 대상이 필요하다. 따라서 오래도록 산촌지역에서는 산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문화가 이어져내려왔다. 한국에선 산신을 '서낭'이라고 불렀는데 등산할 때 돌무더기를 쌓아올리고 소원을 비는 행태가 바로 서낭신에게 비는, 서낭신앙 중 하나의 모습이다. 서낭신은 산촌의 마을단위로 제사를 지냈고 서낭신을 위한 마을별 사당을 서낭당이라고 불렀다.


산촌지방의 식생활 또한 산에서 얻은 재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떡 종류로는 칡으로 찐 칡떡, 소나무 껍질로 만든 송구떡, 멥쌀로 찐 메떡, 그리고 찹쌀을 이용해 만든 떡들이 있다. 떡은 아니지만 옥수수를 둥글넓적하게 반죽한 옥수수반대기와 찰수수 가루반죽에 팥앙금을 넣어 만든 수수부꾸미(수수모루미) 등 또한 산촌의 먹거리들이다. 이외에도 산에서 나는 고구마, 감자, 메밀, 팥 등을 음식에 해먹었다. 전체적으로 산촌지역의 음식들은 맛을 위해서 먹는다기보단 생계를 위해 산에서 당장 캐올 수 있는 재료들이 가장 기본적이다. 비단 식생활뿐 아니라 주거문화와 다양한 민간신앙들 전부 호화로운 정착 생활에서 나온 사치의 안일함이 아닌 생존을 위해 개발하고 일구어낸 투쟁의 소산인 것이다. 그래서 투박하지만 거친 이 산촌생활이 나는 더욱 매력적으로 느낀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박인환 <박인환 선시집>

인제 출신의 시인 박인환의 유일한 시집입니다. 대표작으로는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등이 있지만 두 작품 외에도 박인환 시인 특유의 니힐리즘적 시들을 여러 편 감상할 수가 있죠. 대중적인 시들은 서정시, 연시 등 밝은 작품들이지만 그만큼 니힐리즘(허무주의)의 가치가 소중하지 않나 싶습니다. 해방 직후,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거대한 상처를 간접적인 배경으로 깔고 있는 세계관에서 그 음울함이 어떻게 예술로 표현되는지를 염두에 두시고 시를 읽으면 박인환 시인의 작품들이 멀게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관념적이고 학술적인 용어들이 자주 나오지만 그런 용어들도 찾아보시면 시를 한층 깊이 이해할 수도 있죠.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하얀 인제의 자작나무 숲을 걸을 때 누구나 흰 설경과 첫사랑이란 모티프를 낭만적으로 풀어낸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를 떠올릴 겁니다. 1995년 개봉한 오래된 작품임에도 여전히 대표적인 '첫사랑' 영화로 손꼽히고 겨울마다 늘 거론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러브 레터>는 마냥 서정적이기만 한 작품은 아닙니다. 사랑의 끝을 '죽음'으로 상정했는데요, 나카야마 미호가 1인 2역을 맡은 '히로코'와 '이츠키' 모두 각자의 사연 속에서 죽음을 받아드리는 내용으로 영화의 얼개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죽음을 두고도 한쪽은 '떠나보냄'을, 다른 한쪽은 '영원히 간직함'으로 영화가 끝나지만, 교차되는 두 세계를 통해 떠나보내는 것과 더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것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안부를 토해내듯 묻는 외침은 '사랑'과 '추억'과 '죽음'을 맞닥뜨리는 심리적 성장의 과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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