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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an 07. 2020

[국보 1호] 숭례문, 한반도의 대문

국보(國寶). 나라의 보물. 국보지정제도에 대해 잘 몰라도 '국보'라는 말만 들으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준다. 거기에 대장격이라고 할 수 있는 1호. 사실 국보 넘버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만화영화에 나오듯 숫자가 작을수록 더 가치 있는 문화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국보 넘버링은 단순히 등록된 순서에 의거한다. 따라서 국보 1호는 처음으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라는 것이지 대한민국 문화재 중 가장 우수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럼에도 '국보 1호'가 주는 무게감은 어마무시하다. 무언가 민족을 대표할만한 문화재 중에서 대장이어야만 할 거 같다. 이미 전국민이 알듯 국보 1호는 숭례문이다. 숱한 빌딩 숲 사이에서 푸근하게 자리잡고 있는 숭례문은 한때 한양이라는 국가 수도의 수문장 역할을 하던 대문이었다.


사진출처: 문화유산채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을 결정하고 정도전은 수도 이전 프로젝트의 총괄책임자로 임명했다. 정도전은 새로운 수도가 될 곳에 4개의 문을 세우고 그 4개의 문을 성벽으로 연결해 도성을 축조했다. 이때 4개의 문은 각각 동서남북 방위를 향하게 했는데, 그 중 남쪽에 해당하는 문이 숭례문이었다. '남대문'이라는 용어는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정기를 훼손시키려는 목적에서 '숭례문'이라는 용어를 폐기하고 대신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으나, 실제로는 조선시대 당시에도 지금처럼 '숭례문'과 '남대문'을 혼용해서 썼다.  전통적인 동양권에서는 항상 남쪽의 문이 정문으로 사용되었다. 경복궁의 남쪽문인 광화문이 경복궁의 대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4대문 중 남쪽 방위를 맡고 있는 숭례문은 4개의 문들 중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이었던 정문이었다. 도로 높이가 훨씬 더 낮았을 당시를 고려해보면 조선시대 숭례문은 오늘날의 숭례문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규모였다.



4개의 문 중 남대문인 숭례문과 동대문인 흥인지문만이 복층 지붕구조를 하고 있다. 북한산에 있는 숙정문과 지금은 훼손되어버린 서대문 돈의문은 1층 지붕이었다. 성문 전체적인 규모를 비교해보면 숭례문이 흥인지문보다 조금 더 크다. 정문인만큼 4개의 문 중 가장 크게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지붕과 지붕 사이는 높이는 짧은 대신 옆으로 넓게 퍼져 있어 흥인지문에 비해 훨씬 안정감을 주면서도 육중하고 장엄한 느낌을 자아낸다. 숭례문의 2층 지붕 양 꼭지점을 취두라고 하는데, 숭례문의 취두에는 용이 한 마리씩 조각되어 있다. 취두 밑으로 내려가는 곡선에는 다양한 잡상들이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장식성을 더하고 있다.


사진출처: 문화유산채널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의 현판과 달리 세로로 걸려 있다. 이유는 남대문이 바라보고 있는 남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관악산이 나오는데, 관악산이 품고 있는 화기가 한양을 집어삼킬 정도라고 해서 관악산의 화기를 잡고자 현판을 세로로 건 것이다. 단순히 미신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고, 6.25전쟁 때 서울이 불타고, 그리고 2008년에는 서울 대신 숭례문의 전소사건을 생각해보면 소름 돋는 풍설이다. 현판의 글씨는 태종 이방원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친형 양녕대군이 썼다는 기록이 제일 많으나 다른 사람들이 썼다는 기록들도 있기 때문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도로를 건설한다는 목적으로 한양도성 대부분을 헐어버렸다. 4개의 문도 모두 헐어버릴 생각이었으나 북대문은 산속에 있기 때문에 아웃 오브 안중이었고, 남대문과 동대문은 각각 임진왜란 당시 일본장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출입했던 역사적 문이라는 이유로 남겨두고 서대문만 철거시켜버렸다. 일제 총독부는 1934년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했고, 해방 이후 6.25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1962년 남대문을 국보 1호로 지정했다. 


일제강점기 이전 국권이 피탈되던 과정에서 숭례문 앞에서 대한제국군 시위대 2개 대대가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이기도 했다. 이 전투를 남대문 전투라고 한다. 숭례문은 조선을 상징하던 대문이었던만큼 외세에 의해 수치스러운 일들도 겪었다. 그러나 국보1호로 지정된 이후 숭례문은 서울은 물론 한국 전체를 상징하는 일러스트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는 있어 숭례문의 독보성이 다소 약해지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숭례문은 항상 그 자리에서 묵묵히 한국의 대문 역할을 해주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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