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 Jan 07. 2020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 도심 속 국보

최근 신세대답지 못하거나 옛날 향수를 그리워하는 뜻으로 '탑골공원'이라는 신조어가 쓰이고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탑골공원'은 갈 곳 없는 어르신분들이 모여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곳이어 왔다. 그래서 삼일절이 아니면 이 공원을 찾기가 쉽지만은 않다. 이런 공간에 국보가 있다는 건 충격적일 것이다. 탑골공원 내부 깊숙이에 있는 외딴 탑 하나. 일명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바로 국보 2호다.



탑골공원은 원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었다. 원각사는 조선조 7대 임금인 세조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다. 숭유억불을 고수했던 성리학 국가 조선에서 왕명으로 절을 건축했다는 것도 놀랍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수많은 충신들까지 죽여가면서까지 왕위에 오른 세조는 아무래도 살상에 대한 응보를 두려워했던 것 같다. 세조는 불교에 크게 의지하며 개인의 구원을 빌었다. 그런 일환에서 세조가 불공을 쌓고자 건설했던 절이 원각사였고, 이때 원각사에 무려 10층이라는 석탑을 만들기도 했다. 10층은 한국석탑에서 가장 높은 높이다. 무려 12m에 해당하는 석탑을 만들 정도로 불공에 대한 세조의 교심(敎心)은 상당했다.


세조 이전까지 10층 높이의 석탑은 고려 후기 만들어졌던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유일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1층 홀에 큼지막하게 서있는 바로 그 석탑이다. 세조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앞선 10층 석탑의 전례를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두 석탑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한 양식을 띠고 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과 모체로 삼고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그 유사 양식을 다른 석탑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하학적이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고려 후기 원나라의 몽골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그렇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크게 3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1단계인 기단부는 '아(亞)'자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2단계인 3층은 같은 모양이으로 우람한 몸체를 구성하고 있고, 나머지 7층이 3단계로 네모형을 띠면서 높은 수직성을 형성한다. 마치 불교식 마천루의 모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탑 면면에는 각종 불교식 메타포들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유리관 안에서 있기 때문에 정밀하게 관찰할 수는 없다.


기단부


중층부
상층부

원각사는 연산군 때 연산군의 명령으로 철거되었고 빈 공터로 남아 있다가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던 해에 영국인이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때까지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남아 있었고, 이 탑 바로 앞에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다. 그러니까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3.1운동의 첫 총성을 울리던 그 역사적 순간을 목격한 유일한 문화재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원각사지 10층 석탑 상부 3층을 부수는 만행을 저질렀다. 훼손된 상부 3층은 1947년 미군정기에 복원되었다.



1924년 일제총독부의 조선문화재 등록사업 도중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지정될 때 원각사지 10층 석탑도 국보 2호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 광복된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국보 2호로 지정하였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모체 석탑이 아니면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하고 이국적이고 그러면서도 한국의 양식이 가미된 석탑이다. 서울 도심 속에서 무심코 서 있는, 유행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을 조롱하는 용어가 되어버린 탑골공원 안에 멋드러지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국보는 의외성까지 겸비한 보기 드문 국보다.

작가의 이전글 [국보 1호] 숭례문, 한반도의 대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