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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an 07. 2020

[국보 3호] 북한산진흥왕순수비, 서울을 굽어보는 비봉

  서울의 등산객들이라면 친숙할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가 국보 3호다. 진흥왕은 신라의 24대 국왕으로 6세기경 신라를 전성기로 이끈 군주다. 삼국시대 당시 전성기라 함은 한강을 차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신라의 전성기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 중 가장 후발주자로, 이 뜻은 가장 늦게 한강을 차지했다는 뜻이다. 통일 전 신라의 영토를 가장 넓게 확보한 진흥왕은 말년에 전국을 순회하며 정복지마다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웠다. 왕이 직접 전국을 순회하는 행위를 '순수(巡狩)'라고 하고, 왕이 순수하며 세운 기념비를 '순수비'라고 한다.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며 세운 순수비가 4개, 진흥왕이 순수하지 않고 왕명으로만 세워진 적성비가 1개로 진흥왕 대 만들어진 기념비는 도합 5개다. 이중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말그대로 북한산에 진흥왕이 세운 순수비로 기념비들 중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 지리적 위치로 유추해볼 수 있듯이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쾌거를 기념하기 위한 승리의 상징이며 삼국의 전성기란 한강의 차지라는 등가공식을 고려했을 때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물리치고 전성기를 이룩했다는 거룩한 증거이기도 하다.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가 퍼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제왕은 왕위를 계승하고 스스로 삼가며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백성과 토지를 널리 획득하니 이웃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친을 요청하는 사신이 왔다. 이에 관경을 순수하며 민심을 살펴서 백성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하며 충성과 신의를 갖추고 재주를 다해 나라에 충절한 공을 세운 자가 있다면 벼슬을 올려주고 공훈을 표창코자 한다. 이때 왕의 수레를 따른 이는 법장 혜인 등이 있다.



글씨체는 서체 5종 중 가장 정석에 가깝다는 해서체이며, 유홍준 교수는 "질박하면서도 굳센 느낌을 준다"고 평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탁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삼국시대 이래 사람들 기억 속에 잊혀져 있었다. 북한산이 무지막지할 정도로 높은 산은 아니나 가파른 절벽 위에 있어서 마음 잡고 가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에 마모되던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조선후기 최초의 고고학자라고 할 수 있는 추사 김정희가 1816년 31살 때 이 비석을 연구해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북한산의 여러 등산코스 중 서울 은평구 진관사에서 시작하는 비봉코스를 타야 볼 수 있다.  어렵게 어렵게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면 해발고도 560m의 비봉 아주 좁은 정상 우뚝 서 있는 국보 3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사실 복제품이다. 유홍준 교수의 말마따나 사적(史跡)으로서 장소적 의미를 갖추고 있고 등산객들에게 비봉코스의 완등지점이 되어주고 있다. 진품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서 관리 중이다. 그러나 북한산 등산객들에게 혹은 역사를 발로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비록 복제품이라도 비봉에 꼭 올라서 순수비를 감상하라고 추천하고 싶다. 아니 순수비 자체보다는 순수비가 비봉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서울을 감상해야 한다. 항상 고구려와 백제에게 밀리기만 하다가 꿈에서만 그리던 한강을 차지한 진흥왕의 강한 자신감을 가장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스팟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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