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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Jan 07. 2020

[국보 4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 잘 안 보이는 곁에

   고달사는 신라 경덕왕 때 창건된 절이다. 신라 경덕왕은 통일 이후의 국왕으로 '신라'라는 문화적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룩시켰던 국왕이다. 경덕왕은 한국사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시대 중 한 시대를 풍미했다. 절 이름 뒤에 '지(址)'가 붙는 것은 '터'라는 뜻이다. 즉 그 절이 과거에 있었고 지금은 흔적만 조금 엿볼 수 있다는 뜻임으로 여주의 고달사지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폐사지이다.


여주 고달사지 (사진출처: 경기일보)


   고달사가 신라 경덕왕 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 분명 그 규모나 크기가 웅장했을 것이고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꽤나 높은 등급의 사찰로 있었을 것이다. 높은 등급의 사찰엔 명승들이 많이 모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국보 4호에 해당하는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고달사가 창건되고 한참 이후인 고려시대 초 광종 대에 돌아가신 어느 한 스님을 기리고자 만들어진 승탑이다.



   절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탑은 석가모니를 포함한 여러 부처님들에게 공양을 드리기 위한 탑이고, 승탑은 입적반열에 오른 승려를 기념하기 위한 탑이다. 아무리 뛰어난 승려라도 부처님보단 높을 수 없기 때문에 승탑은 층이 존재하지 않고 일반 탑에 비해 크기가 아담하고 소박하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의 주인은 현재 알 수가 없으나 고달사가 창건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고려 광종 대에 고달사가 커졌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불력(佛力 )이 상당히 높으신 승려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높이 4.3m로 우리나라 현존 승탑들 중 가장 크다. 그러니까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애초에 아담한 승탑을 기본으로 그중에서도 가장 웅장하니 미학적으로는 이상적이고 종교적으로는 고고하다. 승탑을 떠받치고 있는 큼지막한 용거북이는 아주 늠름하면서도 사납게 웃고 있다. 용거북이 옆으로는 용과 구름들이 격동하고 있어 심심할 수 있는 승탑에 운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사진출처: 세종신문


  승탑의 기본형식은 팔각형 모양으로, 팔각형 모양의 승탑을 팔각원당형 승탑이라고 한다. 팔각원당형 형식은 승탑이 처음 신라 후기 유행할 때 자리잡은 전형으로, 이 말은 여주 고달사지 승탑은 신라시대 형식을 기본으로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승탑의 몸통부분인 탑신부에는 사천왕상과 문비, 자물쇠, 광창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두꺼운 지붕돌은 밑에 용거북 및 연꽃 기단부와 대응하고 있어 승탑의 육중함을 배가시키고 있지만, 귀꽃이 장식으로 지나치게 둔해보일 수 있는 인상에 가벼움을 선사하고 있다.


   승탑을 '부도'라고도 부르지만 이는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사찰 곁간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죽어서도 사찰에서 불공을 닦겠다는 승려의 의지를 기념하는 이 조각상은 '승탑'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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