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는 백제나 고구려에 비해 뒤늦은 불교 국교화를 만회하고자 불교를 공인한 초창기 왕실 지원으로 큰 규모의 사찰들이 경주 도심에 창건되었다. 삼국통일 직전 신라의 도심에는 9개의 거대한 사찰들이 있었고 이 사찰들의 이름에 '황'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9개의 사찰들을 일컬어 '구황사'라고 불렀고 지금의 경주 구황동의 유래가 되었다. 구황사에는 황룡사, 분황사, 황복사 등이 있었다. 물론 구황사 모두 남아 있지 않거나 남아 있어도 그때 그 당시의 모습은 아니다. 황복사지는 흔적으로만 황량히 남아 있고 국보 37호인 황복사지 3층 석탑만이 위치를 지키고 있다.
황복사지 3층 석탑은 분명 관람의 즐거움을 선사해준다. 2층 기단에 3층 몸통은 신라 시대 전형적인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디테일한 변화를 주어 클리셰를 피하고 있다. 물론 변화의 정도가 크지 않아 다보탑이나 화엄사 4사자상 3층석탑만큼 파격적이진 않지만 일종의 모범생의 일탈이랄까. 황복사지 3층 석탑은 가볍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듬직한 골격과 체격 때문에 둔중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비슷한 시기 만들어졌던 석탑과 비교해 비교적 규모도 작으며 탑의 꼭대기에 머리장식만 남아 있어서 후덕한 인상이 더욱 뚜렷해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황복사지 3층 석탑의 명품 옥개석은 석탑의 이미지를 확연하게 바꾸어놓는다. 역계단형 옥개석의 끝은 살짝 하늘로 치켜세워져 있고 경사도는 그렇게 가파르지 않게 유연한 곡선을 처리하여 시원하다. 종합해보자면 황복사지 3층 석탑은 수더분하다고 말하고 싶다.
1942년 일제강점기 문화재 해체 수리 작업시 황복사지 3층 석탑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그속엔 각종 보물들과 석탑의 제작배경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 명문도 발견되었다. 이 명문에는 탑이 692년에 제작되었다는 정확한 연도와 신라의 효소왕이 아버지를 위해 만들었다는 목적도 뚜렷하게 기술되어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높이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