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화. 재가 눈처럼 내리던 아침
밤새 치열했던 방어전(6화)이 끝나고, 아드레날린이 빠져나간 뒤 찾아온 허탈함과 현실적인 결핍(식량, 미래에 대한 불안)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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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같던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하지만 아침은 오지 않았다.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밤새 타오른 도시가 뱉어낸 검은 연기가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마치 핵겨울이 찾아온 것처럼, LA의 하늘에서는 하얀 재가 눈처럼 펄펄 날려 떨어졌다.
“...눈이 오는 것 같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있던 말릭이 손바닥을 펴 떨어지는 재를 받으며 중얼거렸다.
준호는 그 옆에서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려했던 코리아타운의 거리는 폭격을 맞은 듯 처참했다. 유리창이 성한 건물이 없었고, 도로는 불타버린 자동차의 잔해로 막혀 있었다.
“여보, 이거라도 좀 먹어.”
지현이 다가와 준호에게 컵라면 하나를 건넸다.
뜨거운 물이 없어 미지근한 생수에 불린 라면이었다. 면발은 딱딱했고 국물은 밍밍했다.
“웃기지 않아?”
준호가 젓가락으로 덜 익은 면을 휘저으며 힘없이 웃었다.
“식료품점 주인이 10년을 살았는데... 정작 배가 고플 땐 내 가게에서 라면 하나 못 가져오고, 여기서 이걸 얻어먹고 있다는 게.”
목이 메었다. 면이 넘어가는 게 아니라 모래알을 삼키는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밤새 총을 들고 싸웠던 ‘아버지’들은 구석에 쪼그려 앉아 마른 빵조각을 씹거나, 쪽잠을 자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선 비장함이 사라지고, 지독한 피로와 생활의 걱정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내 가게는 무사할까? 보험금은 나올까? 당장 내일 애들 학교는?
총성이 멈추자 현실의 고지서들이 총알보다 더 무섭게 날아들고 있었다.
그때, 광장 중앙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라디오 소리가 커졌다.
누군가 볼륨을 높인 것이다.
[...지금 방송을 듣고 계신 한인 동포 여러분. 여기는 라디오코리아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 타운 곳곳에서 피해 상황과 실종자 제보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또렷했다.
곧이어 청취자의 전화 연결이 이어졌다.
[흐흑... 제 아들이... 어제 저녁에 친구를 만난다고 나갔는데 아직도 안 들어왔어요. 올림픽 가 근처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울음 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라면을 먹던 사람들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쪽잠을 자던 청년이 눈을 떴다. 모두가 스피커를 바라보았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제발 우리 가게 좀 봐주세요. 8가에 있는 세탁소인데...]
끊임없이 이어지는 구조 요청과 안부 확인.
경찰 통신망도, 911도 마비된 도시에서 이 낡은 라디오 주파수 하나만이 유일하게 살아있는 ‘신경망’이었다.
준호는 지현의 손을 꼭 잡았다.
지현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도 한국에 계신 부모님이 생각난 것이리라. 뉴스에 나오는 불타는 LA를 보며 얼마나 가슴을 졸이고 계실까.
“...우린 살 거야.”
준호가 지현의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살아서, 다시 가게 열자. 간판도 새로 달고, 에어컨도 새걸로 바꾸고.”
지현은 대답 없이 준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멀리서 땅을 울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대로변으로 향했다.
어젯밤의 트럭 소리와는 달랐다. 훨씬 더 무겁고, 규칙적인 기계음이었다.
“뭐야? 또 폭도들이야?”
경계를 서던 예비군들이 다시 총을 들고 일어섰다. 말릭도 난간에 매달려 먼 곳을 응시했다.
연기 속에서 거대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갑차였다.
미 국방색(Olive Drab)으로 칠해진 거대한 험비(Humvee)와 트럭들이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다. 차량 옆에는 M16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대열을 맞춰 걷고 있었다.
주 방위군(National Guard).
드디어 그들이 왔다.
사람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살았다! 군대가 왔어!”
“이제 폭동은 끝이야!”
준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국가가 기능을 하기 시작했구나. 이제 우린 안전하구나.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군인들을 맞이하러 뛰어나갔다.
하지만, 말릭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환호하는 사람들 틈에 끼지 않고 뒷걸음질 쳤다.
“아저씨.”
말릭이 준호의 옷자락을 잡았다.
“...저 사람들, 우릴 구하러 온 게 아니에요.”
“뭐? 무슨 소리야. 군대잖아. 질서를 잡으러 온 거라고.”
“아뇨. 제 눈엔... 그냥 또 다른 총을 든 사람들로 보여요.”
말릭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두 차량의 확성기에서 기계적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 제자리에 멈추시오. 손 머리 위로! 무기를 버려라! 반복한다. 무기를 버려라!]
군인들의 총구가 폭도들이 아닌, 옥상 위의 한인들과 마중 나간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다.
환호하던 사람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우리를 ‘피해자’로 보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총으로 무장한 또 하나의 ‘위험 집단’일 뿐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4.29 폭동 당시 주 방위군의 투입은 사태 진정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또 다른 긴장을 낳았습니다. 초기 진압 과정에서 군은 무장한 한인 상인들을 보호 대상이 아닌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여 무장 해제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공권력의 부재 끝에 찾아온 공권력. 하지만 그조차도 온전한 내 편이 아니라는 아이러니. 이 씁쓸한 현실을 7화의 엔딩으로 삼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