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내려놓은 총, 마주 본 눈
7화의 엔딩(주 방위군의 무장 해제 요구)에서 이어지는 긴장감과, 무력을 빼앗긴 후 비로소 나누게 되는 두 남자의 깊은 속마음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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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op the gun! Now!”
(총 버려! 당장!)
군인들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렸다. 수십 개의 M16 소총 구멍이 옥상 위를 정조준하고 있었다. 그것은 폭도들의 조잡한 엽총이나 쇠파이프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공포였다.
“우... 우리는 폭도가 아니오! 우리 가게를 지키려고...”
김 씨 아저씨가 억울한 듯 소리쳤지만, 군인은 단호했다.
“마지막 경고다. 무기를 내려놓고 손을 머리 뒤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철컥-
일제히 조정간을 단발로 바꾸는 소리가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했다. 경찰이 도망간 3일 동안 우리를 지켜준 건 이 낡은 총 한 자루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다니.
하지만 선택권은 없었다.
“...내리죠. 다들 총 내립시다.”
준호가 먼저 38구경 권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욕설을 삼키며 엽총과 야구 방망이를 바닥에 던졌다.
군인들이 진입해 무기를 수거해 갔다. 그들은 한인들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위험물’을 제거하는 기계적인 손놀림뿐이었다.
무장이 해제된 옥상은 더 이상 요새가 아니었다.
벌거벗겨진 기분. 사람들은 허탈한 표정으로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국가는 질서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우리의 자존심을 밟고 지나갔다.
소란이 지나간 늦은 밤.
준호는 광장 구석, 자판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빈손이 어색해 자꾸만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담배 있어요?”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말릭이었다.
녀석도 긴장이 풀렸는지 한결 편안해 보였다. 준호는 구겨진 담뱃갑을 건넸다.
“너 담배도 피우냐? 고등학생 아니었어?”
“이 동네에선 10살만 넘어도 다 피워요.”
말릭은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깊게 연기를 빨아들였다. 하얀 연기가 밤하늘로 흩어졌다.
“아까... 군인들 표정 봤어요?”
말릭이 툭 던지듯 물었다.
“봤지. 우리를 벌레 보듯 하더구나.”
“익숙한 표정이에요. 백인 경찰들이 우리 동네 애들을 볼 때 딱 그 표정을 짓거든요. ‘너희는 잠재적 범죄자야. 사고 치기 전에 얌전히 있어.’”
준호는 말릭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19살. 한국이라면 교복 입고 독서실에 있을 나이. 하지만 이 소년의 눈에는 너무 많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사장님 가게...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준호는 피식 웃었다.
“네가 불지른 것도 아닌데 뭘.”
“...우리 형이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요.”
말릭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알아요? 단순히 로드니 킹 때문만이 아니에요. 배가 고파서요. 할 일이 없어서요. TV에선 멋진 차와 옷을 보여주는데, 우리 동네엔 쓰레기랑 마약뿐이니까.”
말릭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바로 옆 동네에 한국 사람들이 들어와서 가게를 열었어요. 사장님들은 우리를 무시했죠. 눈도 안 마주치고, 돈만 받으면 빨리 나가라는 듯이 손짓하고.”
준호는 뜨끔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흑인 손님이 들어오면 가방부터 쳐다봤다. 거스름돈을 줄 때 손이 닿지 않으려 조심했다. 말이 안 통한다는 핑계로 눈빛으로만 대화했다. ‘빨리 사고 나가.’
“우린... 무서워서 그랬어.”
준호가 변명하듯 말했다.
“너희가 무서워서. 훔쳐 갈까 봐. 때릴까 봐.”
“우리도 그래요.”
말릭이 준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우리도 당신들이 무서워요. 우리를 도둑 취급하는 그 눈빛이. 가진 것 없는 우리를 더 비참하게 만드는 그 시선이.”
탕- 하는 총소리보다 더 아픈 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이 혐오가 되었고, 혐오가 결국 불길이 되었다.
도시를 태운 건 가솔린이 아니라, 쌓이고 쌓인 ‘오해’였을지도 모른다.
준호는 남은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가게 다시 열면...”
준호가 운을 뗐다.
“그때는... 알바생으로 널 써야겠다. 너 힘도 세고, 깡도 좋으니까.”
“저 비싼데요. 최저 시급으론 안 해요.”
“웃기는 놈이네, 이거.”
준호가 킬킬거리자 말릭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재가 눈처럼 내리는 폐허 속에서, 30대 한인 가장과 10대 흑인 소년은 처음으로 ‘주인과 손님’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무장 해제는 총만 내려놓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세워뒀던 높은 벽을 허무는 것, 그것이 진짜 무장 해제였다.
그때, 지현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여보! 이것 좀 봐! 라디오에서...!”
그녀의 손에 들린 라디오에서 흥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믿기 힘든 광경입니다! 지금 타운 곳곳에서 주민들이 빗자루를 들고 거리로 나오고 있습니다! 흑인, 백인, 히스패닉... 모두가 함께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준호와 말릭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이 끝나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갈등의 해결은 언제나 '대화'에서 시작됩니다.
준호와 말릭의 대화는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핵심 장면입니다. "왜 우리는 서로를 미워했는가?"에 대한 답은 거창한 사회학적 분석이 아니라, "서로 무서웠다"는 솔직한 고백 속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