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잿더미 위의 빗자루
8화의 깊은 대화 끝에 맞이한 아침. 총 대신 빗자루를 든 사람들의 행렬과, 잿더미 위에서 피어나는 연대의 현장을 그립니다. 실제 역사적 사실인 '평화 대행진'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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쓱- 싹-. 쓱- 싹-.
기이한 소리였다.
지난 3일간 이 도시를 지배했던 소리는 비명, 사이렌, 그리고 총성이었다.
하지만 5월 2일의 아침을 깨운 것은 수천, 수만 개의 솔이 아스팔트를 긁는 소리였다.
준호는 눈을 비비며 광장 밖으로 나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숨을 멈췄다.
도로 위로 끝도 없는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손에는 빗자루를,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든 사람들.
머리가 희끗한 노인부터 고사리손의 아이들까지. 한인들만이 아니었다. 백인도, 히스패닉도, 그리고 흑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묵묵히 거리의 유리 파편을 쓸어 담고, 불에 탄 잔해를 치우고 있었다.
“...여보, 저것 좀 봐.”
지현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에는 팻말을 든 흑인 목사가 신도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팻말에는 서툰 한글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합니다. We must live together.]
준호의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았다.
총을 들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묵직한 전율이었다.
준호와 지현, 그리고 말릭은 인파에 섞여 자신들의 가게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도착한 그곳은 처참했다.
지붕은 무너져 내렸고, 검게 그을린 벽체만이 앙상한 뼈대처럼 남아 있었다. 가게 안의 냉장고는 녹아내려 고철 덩어리가 되었고, 바닥은 썩은 음식물과 잿가루가 뒤섞여 악취를 풍겼다.
“아...”
지현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TV 뉴스로 보는 것과, 내 삶의 터전이 사라진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달랐다. 10년의 세월이, 아이들의 학비가, 노후의 꿈이 모두 검은 재가 되어 있었다.
준호는 아무 말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바스락- 하고 타버린 과자 봉지들이 밟혔다. 그는 무너진 진열대 기둥을 들어 올리려 했다.
“으으윽...!”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젖 먹던 힘까지 냈지만, 불에 탄 목재와 철근은 너무 무거웠다. 준호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힘을 썼다. 손바닥이 까지고 피가 맺혔다.
“제기랄... 제기랄!”
준호가 울분을 토하며 기둥을 발로 찼다.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무너진 삶을 혼자 힘으로 다시 세울 수는 없었다. 그 무력감에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턱.
누군가의 검은 손이 준호가 잡고 있던 기둥 반대편을 잡았다.
말릭이었다.
“하나, 둘, 셋 하면 들어요.”
말릭이 짧게 말했다.
준호가 멍하니 쳐다보자, 말릭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끄으응-!
혼자서는 꿈쩍도 안 하던 철근 기둥이 바닥에서 들렸다.
그때 등 뒤에서 또 다른 손길들이 더해졌다. 지나가던 자원봉사자 청년들, 그리고 옆집 세탁소 사장 부부였다.
“같이 듭시다! 영차!”
서로의 힘이 합쳐지자 거대한 잔해가 밖으로 옮겨졌다.
텅 빈 가게 바닥이 드러났다.
준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함께 짐을 나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땀을 닦으며 준호에게 물을 건넸다.
“힘내세요, 사장님. 다 치우고 나면, 또 방법이 있겠죠.”
이름 모를 백인 청년이 서툰 한국말로 “화이팅”을 외치고 지나갔다.
말릭은 빗자루를 가져와 바닥의 재를 쓸기 시작했다.
쓱- 싹-.
준호도 빗자루를 들었다.
지현도 눈물을 닦고 대걸레를 들었다.
쓱- 싹-.
바닥을 쓰는 소리가 가게 안을 채웠다.
그 소리는 마치 상처 입은 도시를 어루만지는 소리 같았다. 닦아내고, 쓸어내고, 다시 깨끗하게 만드는 행위.
치운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거리 곳곳에서 즉석 급식소가 열렸다.
교회와 성당, 한인회에서 마련한 주먹밥과 빵이었다.
준호 일행도 도로변 연석(Curb)에 걸터앉아 점심을 먹었다.
먼지 묻은 손으로 집어 먹는 김밥 한 줄. 그런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맛있다...”
말릭이 김밥을 우물거리며 감탄했다.
“한국 음식 매워서 싫다며?”
“지금은 배고프니까 다 맛있네요.”
말릭의 대답에 준호와 지현이 피식 웃었다.
도로 건너편을 보니, 방위군 장갑차 위에 앉은 군인들도 시민들이 나눠준 빵을 먹고 있었다. 총구는 이제 바닥을 향해 있었고, 군인들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아직 건물은 폐허였고, 보상은 막막했으며, 갈등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 거리 위에서 사람들은 밥을 나누어 먹고 있었다.
준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연기가 걷힌 캘리포니아의 하늘은 야속할 만큼 푸르고 투명했다.
“여보.”
준호가 지현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겠지?”
지현이 준호의 손을 꽉 맞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은 묵묵히 바닥을 쓸고 있는 말릭과 수많은 이웃들을 향해 있었다.
“응. 혼자가 아니잖아.”
빗자루질 소리가 멈추지 않는 오후였다.
도시는 그렇게 조금씩, 아주 천천히 제 색깔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폭동이 끝난 직후, LA 시민 3만여 명이 모여 거리를 청소했던 실제 사건은 절망 속에서도 빛났던 인류애를 보여줍니다. 총을 든 '루프 코리안'의 이미지가 강렬했지만, 빗자루를 든 한인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극복의 상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