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현실의 청구서
9화의 따뜻했던 연대가 지나가고, 그 자리에 남은 차갑고 잔인한 경제적 현실을 마주하는 회차입니다. 감동은 짧고, 생활의 고통은 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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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는 끝났다.
빗자루 행렬이 지나간 다음 날, 도시는 다시 냉정한 계산기 앞으로 돌아왔다.
준호는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땀으로 끈적해진 수화기 너머로, 건물주 데니스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Mr. Park. 계약서 12조 B항을 읽어봤어?]
“계약서요? 그게 지금 무슨...”
[거기에 명시되어 있잖아. **‘소요 사태(Civil Commotion) 및 전쟁으로 인한 파손은 보상 범위에서 제외된다’**라고. 보험회사가 돈을 안 주는데 내가 땅 파서 보상해 줄 순 없잖아.]
준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10년입니다... 10년 동안 하루도 안 밀리고 꼬박꼬박 렌트비 냈고, 보험료도 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조항 타령입니까?”
[진정해. 억울하면 시청에 가서 따지라고. 폭동을 못 막은 건 경찰이니까. 나는 내 법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뿐이야.]
뚝.
전화가 끊어졌다.
준호는 멍하니 끊어진 수화기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탔다.
가게 재건축 비용, 집기 구매비, 당장 다음 달 생활비... 계산기를 두드릴 때마다 마이너스 숫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감동적인 청소도, 이웃들의 격려도, **‘돈’**이 되어 돌아오지는 않았다.
자본주의의 청구서는 감정을 모른다. 그저 지불할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만 물을 뿐이었다.
오후가 되자 상황은 더 절망적으로 변했다.
한인회가 마련한 피해 접수처와 은행 앞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대출 서류가 다 탔는데 어떡합니까!”
“매출 증빙이 없으면 지원금을 줄 수 없다니요!”
곳곳에서 고성이 오갔다. 은행원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정부가 약속한 긴급 지원금은 턱없이 부족했고, 그마저도 까다로운 서류 심사 때문에 그림의 떡이었다.
준호는 대기열 맨 뒤에 서 있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자신이 없었다.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구겨진 서류 한 장 들고 “나 좀 살려주시오”라고 읍소할 자신이.
터덜터덜 가게 터로 돌아오니, 말릭이 혼자서 남은 잔해를 정리하고 있었다.
준호는 말릭에게 다가갔다. 지갑을 열었다. 꼬깃꼬깃한 20달러 지폐 두 장이 전부였다.
“말릭.”
“네, 사장님.”
“이거 받고... 이제 오지 마라.”
준호가 돈을 내밀자 말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 정리 덜 끝났는데요.”
“정리해서 뭐 하냐. 다시 열 돈이 없는데.”
준호는 바닥에 침을 뱉듯 내뱉었다.
“보험금도 안 나온댄다. 은행 대출도 안 된대. 난 망했어. 그러니까 너한테 줄 시급도 없다고. 알아들어?”
준호는 일부러 더 모질게 말했다. 자신의 초라함을 이 어린 녀석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릭은 20달러 지폐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돈을 받지 않고 뒷걸음질 쳤다.
“...돈 때문에 온 거 아니에요.”
“시끄러워! 가란 말이야! 내 꼴 더 우습게 만들지 말고!”
준호가 소리를 빽 질렀다.
말릭은 상처받은 눈으로 준호를 잠시 쳐다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멀어지는 말릭의 등 뒤로 준호는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가장(家長)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쇳덩이처럼 짓눌러왔다.
지킬 힘이 없는 가장은 죄인이었다.
해가 질 무렵, 지현이 돌아왔다.
그녀의 손에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준호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현은 대답 대신 가게 터 한가운데에 있는 평평한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았다. 그리고 비닐봉지에서 소주 한 병과 종이컵, 멸치 몇 마리를 꺼냈다.
“한잔해.”
“...술이 넘어가냐.”
“마셔. 그리고 털어버려.”
지현이 종이컵에 소주를 콸콸 따랐다. 준호는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들이켰다. 식도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났다.
“데니스가 안 된대?”
“...어.”
“은행도?”
“...어.”
긴 침묵이 흘렀다.
지현은 자신의 가방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 준호 앞에 놓았다.
불에 그을린 작은 금속 상자였다. 가게 금고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아이들 돌반지와 결혼 예물이 든 패물함이었다.
“이거 팔자.”
“안 돼! 그게 어떤 건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더니.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야?”
지현의 눈은 매서웠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 대신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거 팔면, 천막 하나랑 기본 물건 뗄 돈은 돼. 가게 건물이 없으면 어때? 여기서 노점이라도 하면 되지.”
“지현아...”
“나 당신 믿고 미국 왔어. 당신이 무너지면 우리 가족 다 죽어. 데니스 그 나쁜 놈 보란 듯이 일어나야 할 거 아니야!”
지현이 준호의 멱살을 잡듯 강하게 흔들었다.
“우린 안 죽어. 절대 안 죽어.”
준호는 지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10년 전, 맨손으로 미국 땅을 밟았을 때처럼, 그녀는 다시 야생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준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다시 살아봐야겠다는, 뜨거운 생존 본능의 눈물이었다.
“...그래. 해보자. 천막이든 리어카든.”
준호는 패물함을 꽉 쥐었다.
잿더미 위에서, 부부는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재난 영화의 엔딩이 '구조'라면, 현실의 재난은 구조된 직후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4.29 폭동 이후 수많은 한인들이 파산했고, 화병을 얻었고, 가정이 해체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많은 이들이 맨주먹으로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 원동력은 거창한 희망이 아니라, "내 가족을 굶길 수 없다"는 치열한 생활력이었습니다.
10화에서는 남편 준호의 좌절과 아내 지현의 결단을 대비시켜, 한국 이민 1세대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을 강조하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