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거리의 사람들

12화(완결). 불타지 않는 것들

by SW

대장정의 마침표입니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단단하게 남은 희망을 이야기하며 작품을 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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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코를 찌르던 매캐한 그을음 냄새는 옅어지고, 그 자리에 건조하고 뜨거운 캘리포니아의 흙내음이 채워졌다.
​천막 가게 앞, 준호는 쭈그리고 앉아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를 고치고 있었다.
망치질 소리가 경쾌했다.
​캉, 캉, 캉.
​“사장님, 이거 어디다 둘까요?”
​말릭이 땀을 뻘뻘 흘리며 사과 상자를 들고 왔다.
그의 표정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후드티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땅만 보고 걷던 소년은, 이제 야구 모자를 뒤로 눌러쓰고 손님들과 눈을 맞추며 웃을 줄 아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거기 앞쪽에 둬. 제일 잘 보이게.”
“Okay.”
​말릭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자를 내려놓았다.
지난 몇 주간 많은 것이 변했다.
천막은 이웃들의 도움으로 제법 튼튼한 가건물 형태를 갖췄고, 바닥에는 시멘트를 새로 발랐다. 전소되었던 건물 잔해 틈바구니에서는 이름 모를 잡초들이 푸르게 싹을 틔우고 있었다.
​죽은 것 같았던 땅에서도 생명은 기어코 올라오고 있었다.
​점심시간, 지현이 비빔국수를 한 대야 가득 비벼 왔다.
매콤달콤한 냄새가 천막 안을 가득 채웠다.
​“먹고 해! 다들 이리 와.”
​세 사람은 플라스틱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후루룩, 면치기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준호는 입가에 묻은 양념을 닦으며 말릭을 쳐다보았다.
​“말릭.”
“네?”
“너, 대학 가라.”
​갑작스러운 말에 말릭이 국수를 먹다 사레가 들렸다.
​“콜록! 갑자기 무슨...”
“너 머리 좋잖아. 계산도 빠르고. 여기서 박스만 나르기엔 아깝다.”
​준호는 진심이었다. 이 폭동이, 이 지옥 같은 시간이 이 아이의 미래까지 태워버리게 둘 수는 없었다.
​“학비는... 내가 어떻게든 보태줄 테니까.”
“여보?”
​지현이 놀란 눈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가게 ‘장학생’ 하나 키우는 셈 치지 뭐. 나중에 성공해서 갚으면 되잖아.”
​말릭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테이블 위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피부색도, 언어도, 살아온 배경도 달랐다.
하지만 불타는 거리 위에서 그들은 ‘식구(食口)’가 되었다.
밥을 같이 먹고, 서로의 미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 그거면 충분했다.
​해 질 무렵, 준호는 가게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하나 물었다.
저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이 보였다.
4월 29일, 그날의 노을은 공포였지만, 오늘 6월의 노을은 그저 아름다웠다.
​그때, 낡은 세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호킨스 경관이었다. 폭동 초기에 코리아타운을 버리고 도망쳤던 바로 그 경찰관.
​준호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호킨스는 멋쩍은 표정으로 모자를 벗었다.
​“...가게 다시 열었군요.”
“그렇게 됐습니다.”
​준호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호킨스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뒷좌석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입간판이었다.
​“순찰하다가... 저쪽 골목 쓰레기더미에서 찾았습니다. 당신 거 맞죠?”
​그것은 불에 그을린 [JUNHO’S MARKET] 간판 조각이었다.
절반은 타버렸지만, ‘JUNHO’라는 이름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날, 미안했습니다. 위에서 명령이 내려와서 어쩔 수 없었다는 건 핑계겠죠.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호킨스가 간판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숙였다.
준호는 그을린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가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했다.
원망도, 분노도 이제는 지나간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두고 가시오.”
​준호가 짧게 말했다.
호킨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경례를 붙이고 떠났다.
​준호는 타버린 간판을 들어 천막 기둥에 기대어 놓았다.
그 옆에는 말릭이 새로 깎아 만든 투박한 나무 간판이 걸려 있었다.
[우리네 식료품 (Woori Market)]
​과거의 상처(준호네 마켓)와 새로운 희망(우리네 마켓)이 나란히 서 있었다.
상처를 지우지 않고, 그 옆에 새로운 희망을 덧대어 사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방식이었다.
​딸랑-
​가짜로 달아놓은 종소리가 울렸다. 손님이 들어왔다.
히스패닉 할머니가 손자 손을 잡고 들어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Hola! Welcome!”
​준호와 지현, 그리고 말릭이 동시에 외쳤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화음처럼 어우러졌다.
​도시는 불탔지만, 사람은 불타지 않았다.
건물은 무너졌지만, 삶은 무너지지 않았다.
​준호는 활짝 웃으며 손님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등 뒤로 LA의 밤이,
더 이상 붉지 않은, 푸르고 평온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완결)



​[작가 노트 (Epilogue)]
​1992년 4월 29일.
그날의 폭동(Sa-I-Gu)은 미주 한인 역사상 가장 큰 비극이었지만, 동시에 한인들이 '정치적 각성'을 하고 타 인종과 '연대'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거대한 전환점이었습니다.
​잿더미 속에서 우리는 잃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했고, 우리라는 울타리를 넓혔습니다.
​이 작은 이야기가 오늘날 또 다른 갈등 속에 있는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불타는 거리의 사람들>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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