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쓰는 사람으로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by 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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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무렵 부모님이 이혼했다.


여름의 끝, 가을의 문턱 그 중간 어느 날. 그리 나쁜 하루는 아니었다. 무더운 여름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면 시끄러운 매미 소리에 열대야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는데 이제 제법 시원해진 날씨 덕에 오랜만에 잠을 깊이 잘 생각으로 기분 좋게 집에 들어온 참이었다. 모처럼 일찍 귀가한 아빠와 함께 온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했다. 계획한 꿀잠을 위해 샤워를 마친 뒤 욕실에서 막 나왔을 때 안방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안방 문을 조심스레 열어 보니 집에 오면 늘 하얀색 민소매 티에 사각팬티만 입고 있던 아빠가 멋들어진 정장으로 갈아입고 큰 보스턴백과 보자기에 옷가지를 쑤셔 넣으며 화를 내고 있었다. 엄마는 그저 아무 말 없이 그런 아빠를 지켜볼 뿐.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고 상황 파악을 할 세 없이 아빠는 그날 저녁 그렇게 집을 나가 버렸다. 아빠의 회색 자동차가 세워져 있어야 할 자리는 금세 다른 자동차가 주차되었지만, 그날 밤 나는 혹시나 다시 올지도 모르는 아빠의 회색 자동차를 기다리며 밤새 내 방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아빠의 차는 그 뒤로 다시는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나는 종종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겪는 이별,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려져 겪는 이별 둘 중 어느 것이 더 슬플까?


그날부터 우리 집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당시에 귀했던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살던 우리는 곧 빌라로 이사를 가야 했고 얼마 뒤 옥탑방으로 그리고 작은 지하방으로 여기저기 이사를 해야 했다.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홀로 두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갑작스럽게 생업에 뛰어들어야 했고 그렇게 우리 두 남매는 아빠와 엄마를 한꺼번에 잃어야 했다. 의지 할 곳이라고는 하얀색 강아지 한 마리와 어린 두 남매 서로의 온기뿐.


통통통 뛸 때마다 발끝에 꽃잎이 떠다니던 여자아이는 이제 뛰지 않는다. 힘이 없는 다리는 휘청거리고 작은 발은 땅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나는 이제 더는 고개 들어 앞을 보지 않는다. 앞을 보는 것보다 발끝을 보고 있는 것이 더 편하다. 거울에 비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찾을 수 없다. 나는 도대체 무슨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도 잊어버린 거 같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싫어하는지도 이젠 모르겠다. 자고 일어나 학교를 가고 집에 오고를 반복하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서 때가 되면 무슨 맛인지도 모를 밥을 챙겨 먹는다. 할 줄 아는 게 무엇인지도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아빠가 떠난 날부터 꿈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행복해지는 것’이라 말한다. 정작 그것을 물어본 사람은 사실 그것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걸 안다. 내 주변에 있는 또래 아이들이 친구인 건지 아닌 건지도 잘 모르겠다. 그들은 때로 필요할 때만 나를 찾기 때문이다. 점점 주변에 관심을 끄기 시작했다. 나는 모두에게 필요 없는 사람, 버려진 사람, 하찮은 존재. 당연히 이렇게 어른이 되고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살다가 때가 되면 모두가 죽는다고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그렇게 살았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느덧 우리는 서울의 이름 모를 산 아래 낡은 빌라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쯤 막 사춘기에 들어선 나는 통학길에 언제부터 그 자리를 지켰을지 모를 아주 낡은 책방을 발견했다.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무심히 그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뭐에 끌리듯 내 손은 책방의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밀기 시작했다. 드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겹게 열리는 유리가 끼워져 있는 갈색 알루미늄 여닫이문. 그 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쿰쿰한 책 냄새가 내 얼굴을 덮쳤다.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이의 책장에 위태위태 쌓여있던 수많은 책. 그 가운데 하얀색 책상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정갈한 인상의 여주인. 그 책방의 주인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 시절 나에게 관심을 두는 몇 안 되는 어른 중 한 명이었다. 종종 만화책을 빌리러 그곳에 들리던 나는 어느새 그 여주인과 시시콜콜한 일상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그쯤 그녀에게서 책을 추천받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을 때면 해가 지는지 뜨는지도 모를 만큼 혼자만의 세상에 빠져 살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 속 세상에 갇혀 살던 나는 책을 통해 실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다. 드디어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걷기 시작했다. 마음을 나누는 진정한 친구들을 사귀고 또래 소녀들과 어울리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미래를 고민하고 비로소 작지만 소중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독서는 단순히 지식을 얻는 것을 넘어, 삶의 변화를 불러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책은 지혜와 깨달음을 주고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게 했다. 내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주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깊고 넓게 열어주는 인생 최고의 조언자이자 길잡이였으며 마음의 병을 고쳐 주는 최고의 의사였다.


첫사랑에 실패했을 때, 첫 아이를 유산했을 때, 산후 우울증이 왔을 때, 아무것도 없는 프랑스로 이주했을 때. 남편과 이혼의 문턱까지 갔을 때 인생의 파도가 잔잔해질 때는 책과 잠시 멀어지고 인생의 파도가 거세게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약상자에서 감기약을 꺼내 먹듯 책장에서 다시 책을 꺼내 들었다.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요가를 즐겨했는데 요가와 명상을 하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지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쓰기는 명상과 비슷하다. 명상은 마음의 평온과 내면의 균형을 찾아주고 내 삶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깨닫게 도와준다. 나의 글쓰기는 파도치는 내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마음 가는 대로 글을 썼다. 손이 가는 데로 낙서하거나 그때그때 떠 오르는 단어나 문장을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했고 더 나아가 블로그를 만들어 프랑스 생활에 대한 것을 정리해 올리기 시작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지, 아이와 온종일 씨름하며 거울 한번 보기 힘든 삶 속에서 그것은 나의 유일한 소통의 창이자 탈출구였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나는 한 가지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글쓰기는 나를 위한 것이 맞다. 하지만 그 글을 타인과 공유하기 시작했을 때는 또 다른 힘이 생긴다. 그것은 타인과의 감정 교류이다. 어린 소녀가 독서를 통해 내 삶을 살아갈 의지와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아플 때마다 책 속에서 위로를 받던 것처럼 글쓴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글은 그 글을 읽는 사람들과 글쓴이를 소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상호작용은 간혹 서로의 인생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나는 요즘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람다움이 문학에 있어 좋다. 문학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당신의 외모는 어떤지 돈이 많은지 가난한지, 어떤 집에 사는지, 어떤 차를 타는지. 우리는 글로써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서로를 응원하고 위로한다. 강자가 약자를 밟고 올라서고 감정을 숨기고 가면을 쓴 삶을 살아야만 하는 약육강식의 세상 속에서 글은 홀로 사람다움을 지키고 있다. 그 사람다운 순수함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고 위로하며 인생의 거센 파도와 싸울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제 그 잔인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있고 싶어졌다. 낡은 책방의 여주인처럼 작은 친절을 베풀고 수많은 절망의 시기에 나를 건져 올려준 수십 명의 문학 작가들처럼 이름 모를 당신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마음의 위안이 되어 주고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릴 적 나와 어릴 적의 당신을 지금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싸 안아 주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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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