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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소설] 브라이튼의 붉은 머리를 가진 아이

크리스마스의 악몽

by 영업의신조이

Ep.13

브라이튼의 붉은 머리를 가진 아이



앨리스 엘런,

그녀는 런던에서 모든 것을 잃고 돌아왔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귀족 집안의 남편을 얻으며 성공한 듯 보였던 그녀의 삶은 아이 하나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남편의 냉정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았다.


“우리의 혈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겠어요. 미안해요.”


이혼 서류에 서명한 그날,

브라이튼에서 부모님의 부고가 함께 도착했다. 그녀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울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며칠을 텅 빈 공기 속에서 의미도, 존재도, 기억도 없이 그저 멍하게 떠다니는 듯했다. 의사는 약을 처방해 주었지만, 그 약은 오히려 그녀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에서 먹먹하고 무겁고 습한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 안개는 눈으로도, 손으로도 걷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겁게 젖어 있었고, 그 젖음의 무게가 세계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애써 숨을 내쉬면 공기가 아니라 물을 들이마시는 듯했고, 세상은 마치 서서히 가라앉는 어항 속 같았다.


벽난로는 더 이상 장작불의 온기를 품지 않았고, 전등은 빛 대신 그림자를 내뿜었다. 칠흑 같은 고요함은 소리가 아니라 눅눅한 무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종종 창가에 앉아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손금 사이로 느끼기 싫을 만큼 끔찍한 작은 물줄기들이 흐르는 듯했고, 그 물에 어릴 적 행복했던 웃음들마저 서서히 녹아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어둠은 그녀의 마지막 탈출구였던 눈물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눈가에 고인 눈물은 흘러내리기 전에 곧바로 증발해 버렸다. 그녀의 우울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니었다.

온 세상의 모든 감각이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젖어드는 과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물속을 걷는 사람 같다고 느꼈다.


“나는 지금도 숨을 쉬고 있지만, 이미 익사했는지도 몰라.”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매일을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

브라이튼 부모님의 낡은 집으로 돌아온 첫날밤이었다. 거리는 예전처럼 조용했다. 가로등 아래 눈송이가 차분히 쌓이고 있었다. 집 앞 골목 어귀, 낡은 종이 상자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안에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작게 떨고 있는 붉은빛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상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작은 생명을 품에 끌어안았다.

피부는 눈처럼 희고, 머리칼은 석류처럼 붉었다.


“루비.”

그녀는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날 이후, 집 안의 공기는 조금씩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루비는 조용한 아이였다.

말수가 적었고, 눈동자는 깊었다. 아침이면 햇살을 손끝으로 만지며 고개를 천천히 기울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의 목선이 미세하게 떨렸고, 왼쪽으로, 다시 오른쪽으로 고개를 천천히 움직였다. 의사는 그것을 ‘신경성 틱’이라 불렀지만, 앨런은 그저 세상의 무게를 그녀만의 리듬으로 견디는 것이라 여겼다.


루비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의사들이 말하는 “특수한 정신 상태”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집에 머물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고, 벽시계의 초침 소리를 친구 삼았으며,

그리고 앨런의 발소리만이 그녀의 세상의 전부였다.


루비의 하루는 오래된 시계처럼 규칙적이었다.

아침이면 창문을 열고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그녀는 그 냄새로 날씨를 구분했다. 바람 속의 소금기, 먼지의 양, 햇살이 대지를 굽는 냄새까지.

점심이면 작은 의자에 앉아, 앨런이 남긴 찻잔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식은 차의 빛이 맺혀 있었고, 그녀는 그 빛이 말라가는 속도로 하루의 길이를 짐작했다. 루비의 시간은 엄마 앨런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흘렀다.


저녁 무렵이면 벽난로 앞에 앉아 손끝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먼지가 공중에 흩어질 때마다 세상이 조용히 늙어간다고 믿었다. 말 한마디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루비는 빛과 공기와 물의 경계 위를 걷는 고귀한 생명 같았다.

그 정적은 죽음의 침묵이 아니라 삶이 가장 미세한 호흡으로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의 ‘사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루비는 놀라울 만큼 아름다워졌다. 빛이 닿을 때마다 목과 어깨선이 부드럽게 꺾였고, 그 곡선엔 생명의 온기가 깃들었다. 걷는 루비의 발끝은 언제나 정갈했다. 모래 위 새 한 마리가 남긴 발자국처럼 조심스러웠고, 공기 속 무게를 스스로 계산하듯 균형을 잃지 않았다.


사춘기의 어느 오후,

그녀는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고 있었다. 꾸벅, 꾸벅 고개를 떨구는 리듬은 졸음이 아니라 명상하는 모습처럼 우아하기까지 했다. 루비의 머리칼은 보석의 빛깔을 머금고 더욱 깊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봄의 알이 여름의 숨결 속에서 형체를 찾아가는 순간 같았다.


앨런은 종종 루비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녀는 자라나는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잃어버린 세계의 조각이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루비가 웃을 때마다 앨런의 마음 한가운데서 사라졌던 색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루비는 종종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 저 밖엔 뭐가 있어요?”

“그건… 세상이지.”

“저는 그 세상을 보면 안 되는 거예요?”


앨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넘기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루비는 기이할 만큼 맑은 눈빛으로 엄마에게 미소 지었다.


루비는 담장을 자주 넘으려 했다.

그때마다 무릎에 작은 상처가 남았다. 앨런은 가슴이 아팠지만, 그것이 아이를 지키는 방법이라 믿었다.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녀는 루비에게 흰색 반창고를 붙이고 그 위에 작은 리본을 묶어주었다.


“루비야, 이건 아프지 말라고 하는 엄마의 주문이야.”

루비는 고개를 기울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왼쪽, 오른쪽.

그 단순한 움직임은 마치 ‘사랑한다’는 신호 같았다.


앤드류 해밀턴은 그녀 집 근처 언덕에서 살았다.

앨런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오랫동안 그녀를 사랑해 온 남자였다. 앨런이 런던으로 떠난 뒤에도

그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집 앞에 조용히 초를 켜두곤 했다.


이제 그의 머리엔 흰 서리가 내려앉았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자상했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앤드류는 그녀를 다시 초대했다.


“같이 저녁 먹자. 오랜만이잖아, 앨런.”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딸 루비를 혼자 두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비가 먼저 말했다.

“다녀오세요, 엄마. 오늘은 꼭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그 말엔 묘한 힘이 있었다.

앨런은 이상하게도 그날만큼은 아이의 눈을 제대로 마주 볼 수 없었다. 루비의 시선은 대문을 지나 담장 너머를 향해 있었다. 머리칼은 달빛 아래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루비는 엄마를 배웅하는 모습이 유난히 결의에 차 보였다.


앤드류의 집은 오랜만에 따뜻한 온기로 가득했다. 창문마다 크리스마스 향초가 타올랐고 계피와 버터 향이 공기를 채웠다. 식탁에는 작은 칠면조 훈제 요리, 레드와인, 각종 샐러드, 그리고 앨런이 어릴 적 좋아하던 애플파이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넌 여전히 똑같구나.”

앤드류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오랜만이라 스스로도 낯설었다.

와인잔이 절반쯤 비었을 때 그녀가 말했다.

“내 루비는 지금쯤 자고 있겠지.”

“루비?”

“내 딸이야.”


앤드류는 놀란 듯 잠시 멈췄지만 곧 미소 지었다.


“그 애도 행복할 거야. 너와 함께하니까.”


그 말에 앨런은 알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마치 루비의 존재가 이 거실 어딘가에 스며 있는 듯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이상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탁, 탁, 탁...

부엌 쪽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

그녀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한편,

쓰레기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낯익은 무언가가 있었다. 흰 반창고 조각, 그리고 붉은 리본 하나.


손끝이 떨렸다. 심장이 폭발하듯 요동쳤다.

“아니… 이게… 왜 여기 있어…?”


숨이 끊어질 듯 몰아쉬었다.

그녀는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루비… 루비!”


절규와 울음이 동시에 터졌다. 그녀는 쓰레기통을 모두 엎고 깨진 접시와 병 조각을 던지며 울부짖었다.


“그 애는… 집에 있어야 해! 내 딸이야!”


앤드류가 달려와 그녀를 붙잡았다.

“앨런, 진정해!”


“그 애야! 그 애가 나를 부르고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공기를 찢었고 방 안의 모든 사물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벽지가 일렁였고, 천장이 흔들렸다.

빛은 파편처럼 부서져 공중에 흩날렸다. 귀에는 소리 아닌 진동이 밀려왔다. 와인잔이 깨지는 소리, 자신의 숨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는 루비의 쿡쿡 웃음…

모든 것이 한꺼번에 섞였다.

세상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버터 냄새와 철 냄새, 계피 향과 피의 향이 찰나에 뒤섞였다. 그것이 목구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녀는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숨이 아니라, 꿈의 잔해를 마시는 것처럼. 모든 감각이 무너졌다.


부엌 문턱에 매달리다시피 쓰러져 있던 그녀는

울음을 멈춘 얼굴로 천천히 눈을 떴다. 그 순간, 시야 한가운데에서 깃털 하나가 붉게 타올랐다.


그녀는 그 소리를 따라 다른 창문으로 달려갔다.

바람에 커튼이 흔들렸다. 그 아래, 창턱 위에 작은 붉은 깃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눈처럼 가벼운, 피처럼 선명한 색.


그녀는 깃털을 움켜쥐었다.

“루비…”


그 목소리는 울음도, 기도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소리였다.


다음 날 아침, 브라이튼의 바다는 잠잠했다.

집 안은 차가웠다. 창가에 놓인 작은 의자 위엔 접힌 종이 상자 하나가 있었다. 그 안엔 부서진 달걀껍데기 조각과 붉은 닭 깃털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루비의 깃털을 쥔 채, 눈을 감고.

바람이 들어와 깃털을 살짝 들어 올렸다.

깃털은 잠시 빛을 머금었다가 조용히 사라졌다.


세상은 여전히 젖어 있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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