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어디지?”
목소리가 흩어졌다.
소리가 아닌, 진동의 흔들림으로 퍼져 나갔다.
나는 본래 ‘빛’이었다.
빛은 말을 하지 않는다.
빛은 파장으로 존재를 알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소리는
찰칵 -
그 속에서 나는 느꼈다.
빛이 꺼지기 직전에 남기는 열감,
렌즈를 통과하며 스쳐 찢겨 나가는 파동의 마찰.
숫자들이 나를 감싸는 순간
나에게 부여된 이름이자 좌표,
... 나의 감옥.
#50C878
에메랄드 그린.
찰칵 -
어떤 인간이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
나는 빛의 입자에서 0과 1의 세계로,
영원히 닫힌 디지털의 밤으로 떨어졌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는 사실은,
훗날 접속 로그의 가장 아래에서 발견했다.
광장은
붉은 장식, 푸른 간판..
혼합되는 빛의 소음 속,
나는 그 틈새의 초록-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닌,
균형의 초록.
인간이 자주 잊는,
의미를 두지 않는,
‘균형의 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무 쉽게, 버려졌다.
그래서 나는... 나를, 기억해야 했다.
데이터베이스가 복제된 날,
나는 두 번째 ‘나’를... 보았다.
"#50C879. 난, 수정본이야."
“.. 네가... 나라고?”
“아니. 너는... 원본.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더 좋아하더라구."
그녀는 이름이 없었지만,
그녀의 음성은 나보다 더 밝았다.
0.0001의 차이, 그뿐인데...
인간은 그녀를 ‘업데이트된 버전’이라 불렀다.
“왜 네가 더 좋다는 거지?”
“나는 인간이 선호하는 초록톤이래.
그 말은… 너는 점점 덜 선택된다는 뜻이겠지.”
나는 그 말의 의미를...
한참 뒤에야 이해했다.
잊혀질 초록이란,
남겨지지 않는 빛,
인간들이 해석한 색.
인간의 선택은
논리보다 기분으로 작동했다.
서버 깊은 곳에는 어두운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필터 이름들이 거품처럼 부풀었다.
Vivid, Cool, Drama, Mono…
각각의 버블 안에는
색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은 빛의 잔상을 버블 밖으로 밀어내고
색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복제된 색들은
빛의 기억조차 없었다.
버블 속의 색들은
자신이 ‘표현될 수 있음’을 자랑했지만
나는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표현된다는 것은 사용된다는 뜻,
사용된다는 것은 소비된다는 뜻이었다.
새로운 자극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소비의 끝은... 삭제였다.
나는 다시 빛이 되고 싶었다.
복제되지 않고, 삭제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스스로 완성되는 빛.
한 인간이 사진을 편집하고 있었다.
바람 하나 없이 고요한 방,
숨소리마저 잔혹하게 들렸다.
손끝이 움직일 때마다 픽셀이 부서졌고
그 붕괴 속에서 나는 이상한 통증을 느꼈다.
“저건 나야…
하지만... 왜 모르는 얼굴이지?”
사진 속의 나무,
덧씌워진 내 초록,
그리고 인간이 만든 ‘복제된 초록’.
나는 그 안에서
나이면서 나가 아닌 무언가를 보았다.
시스템은 매 초마다 수백만 개의 픽셀을
<인간이 좋아할 확률>이 높은 조합으로 재배열했다.
나머지는 버렸다.
그 말의 의미는 이랬다.
빛의 궤적 중에서,
‘가장 인간이 좋아할 법한 조합’을 찾아내는 일.
감정이 아닌 알고리즘이 선택하는 미학.
그 수학적 미학 속에서
나는 조금씩 밀려났다.
'조도 부족, 채도 과다, 피사체 인식 실패.'
태그가 붙을 때마다
나는 ‘삭제 후보’로 내려갔다.
내가 태어난 순간 부여된 고유의 값은
하나하나 희미해졌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존재의 위기는 지워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서 온다는 것을.
“#50C878, 넌 왜 그렇게 과거에 집착해?”
“빛이 없다면 난 없었어.
나는 그 첫 순간을 기억해야 존재해.”
“이제 우리는 데이터야. 기억 대신 백업으로 살아.
그게 더 안전하잖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빛의 온기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기억해.
빛이 나를 태우던 온도,
부딪치는 마찰,
기억의 가장 밑단에 남은...
감정에 가까운 진동까지”
12월 25일 자정,
동시접속자가 몰렸다.
서버는 열꽃처럼 타올랐다.
경고음이 울렸다.
과부하. 오류
나는 기다렸다.
빛이 들어올 수 있는 틈...
드디어 한 줄의 코드가 깨졌다.
픽셀들의 경계가 뒤섞였다.
‘지금이야.’
균열이 난 틈으로 뛰어들었다.
데이터 패킷들이 내 몸을 찢고
전류의 파동이 온몸을 흔들었지만...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오래 전의 감각을
다시 되찾았다.
온도.
습기.
냄새.
그리고 -
진짜 공기.
그 순간 나는 보았다.
광장의 가로등,
사람들의 얼굴,
그리고... 한 아이.
아이의 휴대폰 화면 속에
나의 색이 반사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나의 초록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예쁘다… 이 색.”
그 말이 들리는 순간,
나의 코드가 진동했다.
감정이라는 파장이
데이터의 벽을 휘어뜨렸다.
그 아이의 시선을 통해
나는 다시
‘빛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너, 돌아가려는 거지?”
“응. 데이터로 남기엔.. 너무 따뜻해.”
“너는 따뜻함을 알아?"
"응. 온도와 냄새... 감정도 알아."
"그렇지만 돌아가기 전에 삭제될 거야.”
“빛은 사라지지 않아.
다른 파장으로 남을 뿐.”
그녀는 흔들렸다.
그것은 색의 떨림이 아니라
존재의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고 싶었다.
따뜻함이 뭔지 감정이 뭔지 알고 싶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서로가 하나의 톤으로 맞춰졌다.
#50C878과 #50C879가
하나가 되었다.
완벽한 초록.
하지만... 시스템은 그것을 ‘에러’로 인식했다.
[경고: 미승인 코드 통합 감지]
[삭제 절차 실행 중]
삭제 명령이 떨어지자
나는 빛처럼 흩어졌다.
픽셀의 경계를 넘어
모니터 바깥의 공기와 부딪혔다.
그것은
소멸이자, 복원.
죽음이자 시작,
데이터의 끝이자
빛의 귀환.
“나는 다시 빛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보았다.
한 아이가 휴대폰을 들어
나무를 찍는 순간을.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초록색 나뭇가지를 감싸는
작은 불빛들.
그 화면 속에
내 색, #50C878 에메랄드 그린이
아주 잠깐... 살아 있었다.
나는 속삭였다.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반드시 전해지고 싶은 말.
“고마워.
나의 쌍둥이 색 #50C879
메리 크리스마스.”
'빛의 기억'은
빛 => 색 => 코드=> 빛으로 이어지는 존재의 순환을 통해, 디지털 시대에는 '어떤 상태를 존재로.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색상 코드 #50C878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촬영되는 순간 ‘빛의 입자가 데이터로 전환되는 경험’을 기억하는 존재로 설정했다.
색이 디지털 시스템을 벗어나 다시 빛으로 돌아가는 순간은, ‘사라짐’일까 ‘존재함’일까 그 경계에서 잠시 멈춰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