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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5 [소설] 눈의 여왕

The Snow Queen

by Ubermensch





옛날 옛적, 아름다운 도시의 다락방에 카이라는 소년과 게르다라는 소녀가 살았어요.

둘은 창문 밑의 작은 화단에 핀 장미를 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었답니다.

어느 날, 사악한 마법 거울이 깨져 산산조각 났고 그 파편이 카이의 눈과 심장에 박혔어요.

카이의 마음은 차가워지고, 아름다운 것은 추하게 보이고, 착한 것은 나쁘게 느껴지게 되었어요.

그는 사랑하는 게르다에게도 쌀쌀맞게 굴었어요.

그 해 겨울 차갑고 아름다운 눈의 여왕이 눈보라를 타고 나타나,

마음이 차가워진 카이를 자신의 얼음 궁전으로 데려갔어요.

게르다는 카이를 되찾기 위해 홀로 길을 떠났어요.

게르다는 순수한 마음과 굳은 용기로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마침내 눈의 여왕의 궁전이 있는 북극 땅에 도착해 카이를 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어요.

게르다의 진실하고 뜨거운 사랑의 눈물이 카이의 심장에 박혀 있던 마법 거울 조각을 녹여냈어요.

마법에서 풀려난 카이는 비로소 게르다를 기억하고 눈물을 흘렸어요.

둘은 기쁨을 나누며 얼음 궁전을 떠나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고향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 눈의 여왕







토슈즈는 길들이기가 몹시 까다롭고 불편한 신발이다. 발 사이즈에 맞는 새 슈즈의 생크(shank, 토슈즈의 밑창)를 손으로 부드럽게 구부려 유연성을 높인다. 망치로 두드리고, 비비고, 딱딱한 곳에 탁탁 내리친다. 슈즈 내부에는 솜이나, 토 패드를 넣어 발과의 마찰을 최대한 방지한다. 하지만 발레리나의 발은 거듭된 물집과 상처로 곳곳에 얼룩덜룩 흉이 지고, 그 모양은 점점 기형적 형태로 굳어져 간다. 연습실에서 새 토슈즈 길들이기 작업에 열중하던 클로이는 문득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만 유독 길게 튀어나온 자신의 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엘라를 향해 투덜거린다.


“내 두 번째 발가락의 길이는 일종의 장애라고 볼 수 있어.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어. 슈즈도 양쪽 사이즈를 다르게 해서 특수 제작을 해야 하잖아. 양쪽 슈즈를 다른 방식으로 길들이는 요령을 파악하기까지도 얼마나 오래 걸렸나 몰라.”


“그 정도로는 장애라고 볼 수 없지. 찡찡거리지 마.” 엘라가 차갑게 말했다.


“꼭 그렇게 냉정하게 말해야 해? 내 불쌍한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에는 항상 굳은살이 박혀 있어. 아파. 아프다구.”


발레 바(Barre)에 가늘고 매끈한 다리 한쪽을 올려두고 상체를 발끝을 향해 접은 채 몸을 풀고 있던 엘라의 코앞에, 클로이는 자신의 오른발을 쭉 내밀어 보였다. 어서 본인의 딱한 처지를 위로해 달라는 듯 투정을 이어가지만 엘라는 그 응석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둘은 세계 최고 발레 학교 중 하나인 1713년 설립된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학교 학생이다. 귀족 가문 출신인 클로이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전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유명세를 떨쳤고, 무용수로서의 화려한 생명이 끝나갈 무렵 이 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클로이도 자연스럽게 어릴 때부터 발레를 배웠다. 어머니만큼 눈부신 재능은 없었지만 그녀로부터 물려받은 아름다운 외모와 타고난 선, 뼈대, 그리고 섬세한 감정 표현력이 그녀가 가진 특기였다. 클로이의 어머니는 과거 자신의 찬란하던 시절을 클로이를 통해 재연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므로, 현직 유명 발레리나들을 개인 교습 선생님으로 삼아 혹독한 트레이닝을 시키며,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하나뿐인 딸에 대한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엘라는 사정이 달랐다. 발레라는 부유한 예술의 그림자의 근처에 가볼 일조차 없는 어느 구질구질한 보육원에서 자랐다. 팍팍하고 고단한 동네에 사는 보육원 아이들의 무채색 삶에 예술의 빛을 비추어주자는 어느 정부의 시혜적 정책에 따라, 엘라가 있던 시설에 크리스마스 맞이 호두까기 인형 발레 공연이 지원되었고, 어느 귀퉁이에서 발레 공연을 감상하던 엘라의 크고 검은 눈동자에는 일순간 황홀한 황금빛 욕망이 일렁였다. 공연이 끝나고 형식적으로 마련되었던 어린이를 위한 참여 발레 클래스에서, 우연히 엘라의 눈에 띄는 미모와 천재성에 감탄한 한 관계자의 적극적 지원 덕택에, 엘라의 회색빛 삶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빛깔의 색조가 입히게 되었다.


열 살의 천재소녀 엘라는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학교의 치열한 오디션을 뚫고 입학했다. 엘라가 2인 1실 기숙사 방에 들어왔을 때, 엘라처럼 치열한 오디션을 뚫는 대신, 특혜의 옷을 예쁘게 차려입은 클로이가 엘라를 보고 해맑게 인사했다. 둘은 마치 쌍둥이처럼 보일 정도로 놀라우리만치 닮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클로이는 엘라를 처음 본 순간 반해버렸다. 자신에겐 없는 무언가가 엘라에게는 있다는 사실을, 엘라를 보자마자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클로이는 어린 시절부터 발레로 성공한 어머니를 보며 그 세계를 동경했고, 사랑했고, 어머니처럼 최고가 되고 싶었다. 그런 클로이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는데, 교장인 어머니 덕분에 교내 매 공연마다 주인공 역할을 독차지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 어떤 작은 의혹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사실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다. 내가 정말 주인공이 맞을까, 남들도 그렇게 봐줄까. 하는 그 작은 물음은 클로이의 마음속에 늘 맴돌았다. 소리 내어 말하면 누군가 넌 아니야, 하고 대답할까 무서워 누구에게도 물어보진 못했다.


클로이가 보기에 엘라는 타고난 주인공처럼 보였다. 엘라의 포인(Pointe) 발등고의 완벽한 아치에서부터 비롯해, 우아하고 아름다운 폴 드 브라(port de bras, 팔의 움직임), 마치 하나의 조각상처럼 보이는 아라베스크(Arabesque, 한 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를 구부려 뒤로 뻗는 동작), 스폿을 놓치지 않고 눈 깜짝할 새 32회전을 이어 도는 푸에테(Fouetté, 한 다리로 회전하면서 다른 다리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동작) 턴을 넋 놓고 바라보던 클로이는 엘라를 향한 경외와 감탄으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건 질투와 결을 달리하는 감정이었다. 클로이는 엘라를 순수하게 동경했다.


주로 주인공 역을 맡으면서도 마음속에 작은 의혹을 숨긴 클로이와 달리, 엘라는 자신이 무대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학교 작품에서 배역이 정해질 때면 여주인공 역할은 늘 클로이에게 주어졌다. 공식적으로는 여러 평가 요소를 반영한 심사 결과라고 했다. 엘라는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클로이는 교장의 외동딸이었고, 자신은 이 귀족 학교의 유일한 학비 지원 장학생이었으므로 스스로 항의를 할 만한 주제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고 있었다.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엘라에게는 항상 여주인공을 돋보이게 해주는 서브 역할이 주어졌다. 둘은 오랜 기간 룸메이트로 지내며 대부분 함께였다. 주로 클로이가 엘라를 따라다녔다. 클로이를 포함한 모두가 느끼기에 그 둘은 자매 같은, 때로는 연인 같은,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처럼 여겨졌다. 단지, 엘라만 제외하고.


여러 유명 브랜드 장인들이 클로이를 위해 수작업으로 만들어 준 각종 발레의상이 클로이의 집에 수백 벌은 전시되어 있었다. 다채로운 소재의 레오타드와 시폰 스커트, 쇼츠, 웜업 의상, 화려한 무대의상, 튜튜 등 반짝이고 하늘하늘한 형형색색 온갖 종류의 발레의상이 클로이의 백화점 쇼윈도 같은 옷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클로이의 전용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있었다. 반면 엘라에게는 학교에서 기본적으로 보급되는 5부, 반소매, 캐미솔 형태의, 소매 기장만 다른 세 가지 버전의 검정 레오타드가 가진 발레의상의 전부였다. 두 소녀는 얼굴도 체형도 비슷해서, 클로이는 엘라를 집으로 초대해 자기가 가진 것 중 원하는 게 있으면 전부 선물로 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엄청난 친구잖아. 엘라, 네가 이걸 입으면 엄청나게 예쁠 거야. 우리 엄마는 내 몸이 열 개쯤 되는 줄 아나 봐. 쓸데없이 자꾸 주문을 해. 몰래 갖다 버려도 모를 만큼 굉장히 쌓여있다니까. 너 원하는 거 다 가져가. 난 너무 많은 게 필요 없어. 나한텐 너만 있으면 돼, 엄청나게 소중한 내 친구 엘라.” 클로이는 엄청나게라는 표현을 불필요하게 반복하며 목선의 꼬임 무늬가 독특한 레오타드를 엘라의 비쩍 마른 몸에 대어 보며 말했다.


엘라는 클로이의 말이 기쁜지 어쩐지 확실히 분간이 되지 않는 표정을 지으며, 클로이가 쇼핑백에 잔뜩 담아준 각종 발레 용품들을 한 아름 품에 안아 든 채로, 짧게 고마워. 하고 말했다.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도 했다. 클로이는 엘라와 무언가를 나누었다는 생각에 그저 기뻐했다.


어느 날 자정 무렵, 두 소녀는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연습을 마치고 학교 옥상에 몰래 숨어들었다. 눈에 띄지 않는 귀퉁이 건조물 아래, 소녀들의 눈동자처럼 새까만 밤하늘과 대조되어 빛나는 별이 잘 보이는 곳에서, 둘은 기대어 앉아 캔맥주를 마시며 담배를 나눠 피웠다.


“우리는 엄청나게 유명한 발레리나가 될 거야.” 클로이가 말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엘라가 한숨처럼 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우리 백조의 호수 무대에 같이 서자. 너는 카리스마가 있잖아. 블랙 의상이 엘라 너에게 특히 잘 어울려. 그러니까 흑조 오딜 역할이 너한테 딱이지. 나는 백조 오데트 할게. 우리가 듀엣으로 춤추면 정말 멋지겠다. 그치!”


“….”


엘라의 시큰둥하고 차가운 반응에 익숙한 클로이는 엘라의 침묵에 아랑곳하지 않고 종알거렸다.


“나는 너랑 항상 같은 무대에 서서 춤추고 싶어. 우리 둘 중 하나가 차라리 남자였으면 좋겠다. 그럼 우리가 여주인공 역을 두고 경쟁하지 않고, 파트너로 파드되(pas de deux, 여성과 남성이 함께 추는 2인무)를 매번 함께 출 수 있잖아”


“우리가 진짜 경쟁을 한 적이 있을까.” 엘라가 전혀 궁금하지 않다는 듯 물었다.


“이번 작품 눈의 여왕도 그렇잖아. 내가 맡은 게르다가 주인공이라고는 하지만 네 역할인 눈의 여왕이 화려한 고난도 기술이 많고, 극의 흐름을 장악하니까 사실상 주인공이나 다름없지. 난 너처럼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 슬퍼. 우리 이번 작품 심사로 크리스마스 호두까기 인형 공연의 주인공 클라라역을 정하게 된다잖아. 뽑히면 엄청난 특혜가 있다던데. 나는 엄마한테 아직도 매번 지적을 받아. 아무리 연습을 해도 너만큼 못해. 실력이 잘 안 느는 것 같아. 울적해.” 클로이가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넌 표현력이 뛰어나. 네 모든 표정과 몸짓에서 감정이 흘러다니는 게 보여. 그게 네가 타고난 재능이야. 그래서 네가 게르다로 뽑힌 거야. 게르다는 얼어붙은 카이를 구하기 위해 사랑과 용기, 희생을 보여줘야 하잖아. 넌 그걸 가졌고 무엇보다 활용할 줄 아는 애야. 너무 기죽지 마.” 엘라가 모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이래서 네가 좋다니까. 사실은 네가 날 아끼고 좋아하는 걸 다 알고 있지.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 지금 우리가 서있는 무대는 너무 작아. 더 크고 멋지고 엄청나게 화려하게 빛나는 무대에서 같이 날아다니자.” 엘라의 위로에 급격히 밝아진 클로이가 말했다.


들뜬 클로이는 엘라의 손목을 잡아 난간 위로 끌어당겼다. 엘라는 눈살을 찌푸리며 바닥에 담배를 비벼 끄고서는, 위험하게 왜 그래. 하면서도 클로이를 따라 난간 위로 올라섰다. 파리의 반짝이는 야경이 마치 그림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클로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항상 이렇게 아름다운 동화 속 세상 같겠지, 엘라는 생각했다.


엘라는 저 먼 곳 어딘가에 일찌감치 자신을 버렸던, 살아 존재하는지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가족들의 알 수 없는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지저분한 시설에서 불우함의 정도가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과 우글우글 모여 지내던 어린 날 자신의 모습도 떠올렸다. 클로이가 말한 크고 멋지고 엄청나게 화려한 무대에서 춤출 수 있을까? 클로이와 함께? 지금 이 학교에서는 장학금을 받고 있지만, 졸업하고 나면, 그다음은? 생활비, 레슨비, 참가비, 의상비는…. 엘라가 야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엘라의 두 뺨에 클로이의 차가운 손길이 와락 닿았다. 그 순간 엘라에 입술에 몰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클로이의 숨결에 섞인 희미한 알코올 냄새와 담배 냄새, 그리고 그녀의 짙고 달콤하고 부유한 향수 냄새가 섞인, 엘라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냄새가 차가운 밤공기와 한데 어우러져 그녀의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엘라는 가만히 정지한 채 클로이가 맞댄 입술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촉감과 그녀로부터 뿜어 나오는 세계의 냄새를 깊게 음미했다. 엘라가 잠시 눈을 감았다 떠보니 눈앞에 클로이의 까맣고 커다란 눈이 보였다. 거울을 보는 듯 자신과 닮은 클로이의 얼굴이, 그러나 엘라와는 전혀 다른 세계 속 그녀의 얼굴이.


“엘라, 나는 네가 정말 좋아. 우리는 아마 어떤 출생의 비밀이 있는 쌍둥이일지도 몰라. 서로 엄청나게 닮았잖아. 텔레파시도 잘 통하고. 아, 너랑 이렇게 계속 쭉 함께하고 싶다.” 클로이가 엘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섭섭해.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야. 넌 안 그래?” 클로이가 보챘다.


“흥, 방금 답이 들렸어. 텔레파시로. 너도 나를 사랑하지만 대답하기 부끄럽다고? 알겠어.” 클로이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래. 이제 들어가서 자자. 아침 일찍부터 공연 준비해야 하잖아.” 엘라가 말했다.


“역시 넌 눈의 여왕이야. 아휴 추워. 눈보라가 막 휘몰아치는 것 같네. 넌 너무나도 냉정해. 그래도 난 널 사랑해 엘라. 오, 나의 여왕님.” 클로이가 과장스레 말하며 엘라의 창백하고 차가운 뺨에 한번 더 입을 맞췄다.


눈의 여왕 공연 당일 아침이 밝았다. 연습실에서는 학생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이 학교 학생들은 졸업 후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 입단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므로 이번 작품의 공연은 모두에게 중요했다. 발레단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 예정인 올해 크리스마스 시즌 호두까기 인형 작품의 여주인공 클라라 역이 이번 공연 심사를 통해 결정된다. 기존 교내 자체 작품에서는 어머니의 영향력으로 클로이가 주연을 맡은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외부 심사 위원들이 참여하기 때문에 클라라가 누가 될지 여부는 순수한 실력으로 판가름 날 것이었다. 공연을 앞두고 초조함에 방방거리는 클로이와 달리 엘라는 동요의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이미 눈의 여왕이 된 채 어딘지 모를 한 곳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슈즈가 없어졌어!” 얼굴이 하얗게 질린 클로이가 캐비닛을 뒤엎으며 비명을 질렀다.


분명 리허설 때만 해도 이번 공연을 대비해 딱 적당하게 길들여 놓은 토슈즈를 캐비닛에 넣어 두었는데, 메이크업을 받고 돌아와 보니 사라져 있었다. 클로이의 어머니는 급하게 사람을 시켜 클로이의 발 사이즈에 맞는 새 토슈즈를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공연시간에 임박해 가까스로 새 슈즈를 구해 무대에 오를 수는 있었지만 클로이의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 길이에 맞추어 토슈즈를 섬세하게 길들일 시간적 여유는 충분하지 않았다.


클로이는 딱딱한 새 토슈즈의 리본을 발목에 질끈 동여매고 곧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무대에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카이 역의 발레리노와 파드되(pas de deux, 여성과 남성이 함께 추는 2인무)를 선보이며 어느 정도 평정심을 되찾아 가는 듯했다. 이때 눈의 여왕 엘라가 카이를 유혹하는 강렬하고 매혹적인 춤을 추며 등장했다. 어느 순간 문득, 엘라와 클로이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게르다의 카이를 앗아가고 있는 여왕의 불타는 눈동자를 마주한 그 찰나의 순간, 클로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 토슈즈, 내 사랑하는 친구, 눈의 여왕. 커다란 얼음 조각이 클로이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눈의 여왕의 화려하고 강렬한 독무는 순식간에 무대를 장악해 관중을 포함한 모두를 홀려버렸다. 여왕의 강력한 권위를 과시하는 듯 큰 도약을 하고 우아한 다리를 찢어 날아오르는 그랑 줴떼(Grand Jeté), 한 축으로 서서 현란하고 매혹적으로 휘도는 푸에테(Fouetté), 고결한 백조처럼 꼿꼿하게 지탱해 선 아라베스크(Arabesque), 무대를 완전히 압도해버린 여왕은 카이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눈에 마법의 유리 조각을 박아버렸다. 그녀를 제외한 아무 것도 시야에 담을 수 없도록, 미동조차 할 수 없도록 순식간에 모두를 꽁꽁 얼려버렸다.


이후 클로이는 멍하게 마비되어 어떻게 춤을 추고 있는지 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녀만의 독보적 특기였던 섬세한 감정선 연기도 나오지 않았다. 여왕의 저주에 걸려버린 듯, 뻣뻣하게 굳어져 마치 영혼이 갇힌 인형처럼 보였다. 미처 길들이지 못한 새 토슈즈는 클로이의 발을 짓이겼고, 오른쪽 두 번째 발가락에서는 물집이 터져 찢어졌지만 클로이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카이 역의 발레리노가 클로이를 리프트 하는 순간, 그녀는 타이밍을 놓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클로이는 연약한 눈송이처럼 흩날려 무대 바닥에 그대로 내리 꽂혔다. 하얗게 깔린 인공 눈 위로 그녀가 흘린 붉은 피가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 해 엘라는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녀의 완벽한 공연에 감탄한 여러 후원자들이 생겼다. 엘라는 순조롭게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에 입단해 수석 무용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클로이가 쇼핑백에 담아주는 발레의상을 얻어 입지 않게 되었다. 전처럼 무대용 메이크업을 어설프게 스스로 하지 않게 되었다. 비용을 걱정하지 않고 본인에게 어울리는 의상을 직접 골라 맞춰 입고, 클로이처럼 전용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고용했다. 그녀의 무대에는 늘 환호와 찬사가 뒤따랐고, 그녀는 어느 작품에서나 유일한 여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언젠가 둘이 함께였던 밤 학교 옥상에서 클로이가 말했던 더 크고 멋지고 엄청나게 화려하게 빛나는 무대에 엘라 홀로 빛났다. 클로이는 없었다.



그날 사고로 클로이는 의식 불명에 빠졌다.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들이 상주하고, 최첨단 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온갖 검진과 치료를 시도했다. 의료계 권위자들은 클로이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원인을 알 수 없이 클로이는 오랫 동안 깨어나지 않았다. 엘라는 클로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클로이의 창백하고 고요한 얼굴은 마치 죽은 듯도 하고, 꿈을 꾸고 있는 듯도 했다.



‘클로이, 오랜만에 텔레파시 해볼래?’


‘안녕, 엘라.’


‘이제 일어날 때도 됐잖아.’


‘돌아가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나 이제 주인공이 됐어.’


너는 원래 주인공이었어, 엘라.’


‘주인공은 늘 너였잖아, 클로이.’


‘그래서 그랬어?’


‘그래서 그랬어.’


‘그랬구나.’


‘미안해. 용서하지 마.’


‘글쎄.’


‘클로이, 내가 블랙이 잘 어울려서 흑조 역을 해야 한댔지.’


‘응.’


‘나는 너와 달리 블랙 의상밖에 없었어.’


‘미안해.’


‘그래.’


‘궁금한 게 있어. 엘라.’


'말해.'


‘나를 한순간도 사랑한 적이 없어?’


‘응.’


‘그랬구나.’


‘미안해.’


‘그래도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해 엘라.’


‘….’


‘좋아 보인다. 다행이야.’



그 다음 해 크리스마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발레 극장인 러시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Bolshoi Theatre)에서 엘라는 두 번째 눈의 여왕 공연을 앞두고 있다.


볼쇼이 극장은 화려한 무대와 수준 높은 공연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클로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꿈에 그리던 곳이라며 방방 뛰며 좋아할 모습이 문득 떠올라 엘라는 잠시 멈칫했다.


클로이의 사고가 있었던 작년 공연에서의 배역과 달리, 이번에 엘라는 눈의 여왕이 아닌 여주인공 게르다 역할을 맡았다. 언제나 그랬듯 엘라의 기술과 춤은 완벽했고, 지켜보던 관객의 감탄과 찬사가 쏟아졌다.


현악기의 음색이 서서히 고조되며, 마치 게르다의 뜨거운 눈물이 카이의 얼어붙은 심장에 스며들어가는 듯 애절하고 간절한 선율이 흘렀다. 게르다가 마침내 눈의 여왕으로부터 그를 되찾으며 시련을 이겨낸 구원의 기쁨, 그리고 희망찬 미래를 상징하는 장면에서 카이 역의 발레리노가 엘라를 리프트 한 그 순간, 공중에 뜬 엘라는 허공에서 자신과 같은 얼굴을 한 클로이의 크고 검은 눈동자를 마주쳤다. 그 찰나 엘라의 눈동자에 거울 파편이 박힌 듯, 날카로운 섬광이 일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 지난 후, 한 치의 오차도 없던, 어딘가 서늘했던 엘라의 게르다에 미세한 온기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영원한 사랑의 서약이 깃든.



‘그래도 난 여전히 너를 사랑해 엘라.’



그날 볼쇼이 극장 안에는 흰 눈이 붉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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