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문을 열다
〈나비의 숲 : 크리스마스의 악몽〉
1. 귀환
12월 24일.
서울에서 세 시간을 달려온 이설,
오래된 시골 마을의 끝자락에 있는 ‘하늬숲’ 앞에 멈췄다.
십 년 전, 그녀의 가족이 모두 사라졌던 곳이었다.
사건 기록엔 ‘가스 폭발 사고’라 되어 있었지만,
설은 안다.
그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아직도 이 숲 어딘가에서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차문을 닫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하얀 눈송이가 어둠 속 나무들 사이로 녹아들며,
마치 수천 마리의 나비처럼 날갯짓했다.
그녀는 속삭였다.
“돌아왔어,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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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숲의 초대
숲 속의 별장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은 그대로였다. 크리스마스 트리, 식탁 위의 케이크, 불에 타지 않은 벽난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공간.
그녀는 벽난로 옆에서 낡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 안에는 유치원 시절에 쓰던 그림일기가 있었다.
> “오늘은 아빠가 나비를 잡았어요.
아빠는 나비의 날개를 하나씩 떼면서 웃었어요.”
이설의 손이 떨렸다.
기억이 흐릿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웃음소리와,
거꾸로 매달린 나비 표본들을 떠올렸다.
그날 밤, 그녀는 나비의 날갯짓 소리에 잠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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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림 속의 나비
거실의 거울에 이상한 얼룩이 번지고 있었다.
이설은 무심코 거울을 닦다가,
얼룩 속에 어린 자신이 웃고 있는 얼굴을 보았다.
그 뒤편, 그림자처럼 서 있는 한 남자.
손에는 파란 나비가 쥐어져 있었다.
“설아. 아직도 그걸 기억하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귓속에 울렸다.
“기억해야 해.
그래야 우리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잖니.”
그녀는 거울을 부쉈다.
그러자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서 반짝이며 날개처럼 흩날렸다.
그 조각마다 한 마리씩의 나비가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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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눈 속의 성가대
새벽이 되자, 집 밖에서 어린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성가대의 캐럴 같았다.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이설이 문을 열었을 때,
눈 덮인 마당엔 하얀 나비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중 하나를 손에 올렸다.
그러자 아이들의 노래가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나비들이 입을 열었다.
> “엄마… 차가워… 그날 눈이 너무 추웠어요…”
“설아, 왜 문을 잠갔니…?”
이설은 비명을 지르며 손을 털었다.
눈 위로 떨어진 나비들은 사람의 얼굴로 녹아내리며,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는 깨달았다.
이 숲의 나비들은,
그날 죽지 못한 가족들의 ‘조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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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나비의 탄생
벽에 걸린 트리 장식 하나가 떨어졌다.
그 안에는 썩은 살점이 붙은 나비의 번데기가 있었다.
번데기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 “설아, 우릴 태워버리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불이 다 삼켜주니까.
나비는 불 속에서만 날 수 있단다.”
이설은 벽난로에 불을 붙였다.
그러자 집 안의 모든 나비가 동시에 날았다.
날개마다 불이 붙어, 불꽃처럼 춤추었다.
그녀는 울면서 웃었다.
“그래요, 아버지. 이번엔 내가 태워요.”
그 순간, 집이 폭발하듯 붉게 타올랐다.
숲 전체가 거대한 나비의 형체로 변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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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에필로그 — 눈이 멎은 자리
다음 날 아침,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숲은 이미 모두 재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숯덩이 사이에서 단 하나의 생명이 발견되었다.
한 마리의 파란 나비.
그리고 그 밑에는 타다 남은 쪽지가 있었다.
> “이번엔, 나비들이 잠들었어요.
이 숲엔 더 이상 아무도 울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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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숲 : 크리스마스의 악몽〉은
크리스마스의 “가족의 온기”라는 상징을 뒤집어,
억압된 기억과 죄책감이 만들어낸 ‘기억의 지옥’을 그린 심리 호러입니다.
나비 : 죄와 기억의 조각, 혹은 인간의 영혼을 상징.
숲 : 무의식, 트라우마의 공간.
크리스마스 : 구원과 부활의 이미지가 왜곡되어,
‘영원히 반복되는 속죄’의 날로 바뀜.
이설은 결국 자신의 손으로 숲을 불태우며,
기억의 봉인을 해제하고 동시에 자기 소멸을 완성합니다.
그녀는 죽음으로써 나비들을 해방시키고,
자신 또한 하나의 나비로 돌아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