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많이 다닌 탓에 어릴 때 어디 살았는지 물으면 대강 넘어가는 편이지만, 사실 고향은 강남 쪽이다.
90년대로 넘어가던 시기, 내가 살던 동네는 개발이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었으나, 조금만 벗어나면 꽤 잘 사는 동네가 있었다. 유치원도 다양했는데 엄마가 조리사로 일하시던 유치원은 좀 있는 집 자녀들이 다니는 곳이었다. 우리 형편에 어림도 없었으나 직원 할인을 굉장히 많이 해주었다고 들었다. 아마 유치원에서 직원을 급히 구하느라 유치원생 딸이 함께 출근하는 걸 허락해 준 듯하지만.
단독 건물에 고급스러운 외관, 실내에 놀이터까지 있는 유치원이 내겐 신세계였다. 선생님들도 전에 다니던 곳보다 차림새가 반짝거렸다. 음식도 처음 먹는 것이 많았고, 생일이나 기념일 행사도 특별했다.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크리스마스 장식들. 약속이나 한 듯 빨강과 초록, 금빛으로 가득한 장식들을 보며 돌아갈 우리 집과의 괴리를 느꼈지만 그래도 좋았다. 친구들과는 공감대가 없어 혼자였지만 전보다 낫다고 느꼈다. 산타 할아버지도 오셨다. TV에서 본 것처럼 흰 수염에 배가 불룩했고, 아이들을 한 명씩 불러 커다란 선물을 안겨주었다. 솔직히 할아버지 같진 않았지만 특별한 날인만큼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이 한창 선물 뜯는 데 열중할 무렵, 나는 크리스마스 간식을 준비하고 있을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다. 직원 자녀에 대한 특혜였는지 나는 교실을 아무 제지 없이 벗어났고, 엄마가 쓰레기를 버리고 있을까 싶어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빼고 밖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산타와 눈이 마주쳤다. 모자를 벗어 둔 머리는 검고, 담배를 물고 있었다. 산타가 아니라 한국 아저씨였다.
엄마를 찾지 못했지만 그냥 교실로 돌아왔다. 친구들은 금빛 포장지를 벗겨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내 악몽을 말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
다음 해는 훨씬 시시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새벽, 우리는 아직 어둑한 출근길을 걸었다. 노란 가로등 불빛 아래, 엄마는 입김을 내뿜으며 물었다.
"이번엔 산타 할아버지에게 뭘 받고 싶어?"
엄마는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잠시 고민했지만, 기대에 부응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내게도 잘된 일이었다. 전부터 TV에서만 보던 미미가 떠올랐다. 엄마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엄마, 인어공주 미미를 주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