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의지와 실천으로 다시 쓰는 마음의 구조
26화.
심장은 왜 기름 낀 스펀지에 더 가까운가?
"트라우마와 그림자를 녹이는 ‘따뜻한 기름’에 대하여"
우리는 종종 마음을 하나의 덩어리로 말하곤 한다. “마음이 힘들다”,
“마음이 괴롭다”,
“마음이 지쳤다”라고 말할 때,
그 마음이 어디에서 올라온 것인지, 머리에서 부풀려진 감정인지, 아니면 심장 깊은 곳에서 오래된 상처가 꿈틀거리는 것인지 잘 구분하지 못한 채 한꺼번에 엮어버리곤 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마음에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층이 있다. 하나는 언어와 생각이 만든, 머릿속에서 증폭된 감정의 층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심장 깊숙한 곳의 끈적한 상처의 층이다.
앞선 화에서 우리는 첫 번째 층,
즉 머리에서 증폭된 감정을 살펴보았다. 파란 하늘 위에 떠 있는 작은 수증기 덩어리 같은 감정을 우리가 언어로 “먹구름”이라 이름 붙이는 순간, 그 하늘은 순식간에 폭풍을 예고하는 하늘이 되어버렸다.
“먹구름이네”라고 마음속에서 단어를 붙이는 즉시,
“곧 비가 쏟아질 거야”,
“우산이 없는데 어떡하지”,
“혹시 우박이라도 내리면 어쩌지”라는 미래에 대한 상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그 상상은 다시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낸다.
실제로는 눈앞에 떠 있는 건 그저 햇빛의 각도와 그림자에 따라 달리 보이는 한 조각의 구름에 불과하지만, 우리의 머리는 그 조각을 거대한 재앙의 전조처럼 확대해서 바라보고, 그 재앙을 대비하지 못한 지금의 나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 몰아넣는다.
이렇게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은 사고의 사슬이 만든 감정이다. 언어로 정의하고, 해석하고, 과장하고, 미래로 끌고 가면서 증폭된 감정들이다.
그래서 이 감정들은 잘 들여다보면 실제 상황보다 생각의 파도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종종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해석과 상상,
그리고 “혹시…”로 시작하는 가상의 재난인 경우가 매우 많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마음은 이와는 다르다. 머리 위에 잠시 머물다 지나가는 구름 같은 감정이 아니라, 심장 안에 박혀 있는 까만 기름 덩어리 같은 감정이다.
언어로 이름 붙이려 해도 잘 붙여지지 않고,
“이게 뭐지?”라고 수십 번 물어보아도 형태가 잡히지 않는, 오래된 통증 같은 검고 끈적한 기름과 같은 마음이다.
이 마음을 이해하려면, 심장을 하나의 스펀지라고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깨끗한 상아색이나 흰색의 스펀지, 구멍이 숱하게 뚫려 있는 그 표면과 내부를 떠올려보자.
원래 그 스펀지의 색은 따뜻한 빛을 머금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충분히 여백이 있는 구조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스펀지의 구멍마다 끈적끈적한 검은 기름이 조금씩, 그러나 깊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누군가 던진 한마디 말, 어린 시절에 겪었던 부당한 수치심,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슬픔, 설명할 수 없는 공포, 그리고 반복된 무시와 외면. 그런 것들이 한 덩이, 한 덩이 기름처럼 스펀지에 들러붙어 있다.
이것은 한 번의 사건으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심장에 박힌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작은 기름방울들이 떨어져 쌓이고 굳어버린 상태에 가깝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감정을 이름 붙이기 어렵다.
“트라우마”라고 부르자니 너무 거창한 것 같고, “열등감”이라고 부르자니 그 말 자체가 다시 나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냥 막연히 마음이 먹먹하고, 이유 없이 가슴이 답답할 뿐이다.
바로 이때 우리는 종종 머리에서 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심장에도 적용하려 한다. 구름을 해석하듯, 스펀지 안의 기름 덩어리를 언어로 정의해서 없애보려고 한다.
“이건 나약함이야”,
“이건 없어져야 할 감정이야”,
“이렇게 느끼는 건 틀린 거야”,
“난 이 정도 일에도 흔들리면 안 되는 사람이야” 같은 문장들로 이 검고 끈적한 기름 덩어리를 몰아붙이려 한다.
마치 스펀지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기름을 고무지우개로 마구 문지르듯, 억지로 지워보려 한다. “이 감정, 이제 그만 느껴야지”라는 결심으로 기름 덩어리를 향해 강하게 압력을 가한다.
하지만 기름은 지우개로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숙이 문질러져서 스펀지의 구멍 안으로 더 단단하게 박혀버린다.
물로 씻어내려 해도 마찬가지다. 물 바가지로 강하게 물세례를 쏟아붓듯,
“그냥 잊어버리자”,
“신경 쓰지 말자”,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그 물이 기름과 섞이면서 더 넓은 부분을 오염시킨다.
겉으로는 조금 옅어진 것처럼 보여도, 스펀지의 안쪽 뿌리는 더 끈적끈적하게 굳어버린다.
이때 우리가 자주 놓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이 끈적한 기름 덩어리는 단순한 나쁜 감정이 아니라, 상처받은 내면 아이가 웅크리고 있는 자리라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의 두려움, 거절당했을 때의 수치심, 비교 속에서 길들여진 열등감, 사랑받고 싶었지만 제때 받지 못했던 결핍, “괜찮아”라는 말 뒤에 억눌러야 했던 분노. 이 모든 것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스펀지 속에서 “나, 여기 있어”라고 밀도 높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덩어리를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은 사실 내 안의 아이를 한 번 더 지우는 일이 된다. 이미 한 번, 아니 여러 번 버려지고 외면된 존재에게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 사라져야 해”라고 또다시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럴수록 그 아이는 더 깊은 구멍 안으로 숨어버리고, 더 강하게 굳어져 간다. 겉으로는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특정한 상황이나 사람, 어떤 기척 하나가 스펀지를 건드리는 순간, 그 기름 덩어리는 다시 한꺼번에 올라와 우리를 검게 삼켜버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기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여기서 필요한 것은 제거의 노력이 아니라, 따뜻한 인정이다.
지우기가 아니라, 알아봐 주기다.
세상의 누구보다도 우리가, 내면의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 주는 눈이다.
잘난 부분만 바라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초라하고 추한 부분, 루저 같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까지도 함께 봐주는 시선이 필요하다.
그 욕구는 다른 사람을 향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내면 아이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누군가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줬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는 내 안의 끈적한 기름 덩어리를 향해 그와 같은 시선을 돌려야 한다.
“왜 너는 아직도 여기 있니?”라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네가 거기에 있었구나, 오래도록”이라고 말해주는 것이다.
“너 때문에 내가 힘들어”가 아니라,
“네가 그렇게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많이 아팠구나”라고 건네는 것이다.
해결하려 들기 전에 먼저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일.
이해시키려 들기 전에 먼저 이해해 보려는 시도.
이 모든 것이 심장이라는 스펀지를 향한 관심의 첫걸음이 된다.
이 관심은 매우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명상을 하다가 번개처럼 떠오르는 통찰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작은 순간들처럼 말이다.
어떤 상황에서 가슴이 쿡 내려앉을 때,
“아, 또 이 기름 덩어리가 건드려졌구나”라고 알아차리는 일.
그 순간 스스로를 탓하는 대신, 가만히 손을 심장 위에 얹어보는 일.
그저 몸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한동안 조용히 지켜보는 시간.
“이 감정은 사라져야 할 오염이 아니라, 한때 사랑받고 싶었지만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나의 한 조각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 덩어리를 바라보는 연습.
그러면 다음 단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기름 덩어리 위에 ‘다른 종류의 기름’을 천천히 부어주는 것이다.
거친 솔로 긁어내는 대신, 부드러운 오일을 바르고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비슷하다.
유리창에 꽉 들러붙은 스티커를 떼어낼 때, 우리는 한 번에 잡아 뜯으려 들면 흔적이 더 지저분하게 남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스티커 제거제를 뿌리고 잠시 기다렸다가, 표면이 말랑해졌을 때 살살 긁어내야 깨끗하게 떨어져 나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심장의 상처도 그러하다.
“이제 그만 잊어버려야지”, “언제까지 여기에 매여 있을 거야”라고 몰아붙이기보다,
사랑이라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기름을 조금씩, 여러 번, 반복해서 적셔주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사랑의 기름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에게 조용히 말을 걸어주는 일,
“그때 너는 정말 많이 무서웠겠구나”,
“그때는 네가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구나”,
“그때 아무도 네 편이 되어주지 않았지, 미안해”라고 속으로 말해주는 일이다.
이것은 과거를 미화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책임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다. 더 이상 “왜 나는 이렇게밖에 못 했지?”라는 자기 비난의 책임이 아니라,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라는 돌봄의 책임으로 방향을 틀어주는 것이다.
이 방향 전환이 일어나기 전까지 우리는 스스로를 벌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방향이 바뀌는 순간, 심장 안의 스펀지는 아주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다른 느낌을 품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변화가 잘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기름 덩어리는 여전히 무겁고, 여전히 끈적하고, 여전히 어둡고 깊숙이 자리해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기름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서서히 화학반응을 일으킨다. 검은 기름이 조금씩 가장자리부터 부드러워지고, 덩어리의 모서리가 흐릿해지고, 어느 날 문득 생각해 보면 예전만큼 숨이 막히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전히 슬프고 여전히 아플 수는 있지만, 그 슬픔과 아픔이 예전처럼 나를 송두리째 집어삼키지는 못하는 어느 지점을 통과하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는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다. 어떤 상처는 평생 흔적을 남긴다. 유리창에서 스티커를 떼어내도 가까이 다가가면 미세한 자국이 남아 있듯, 우리 심장의 스펀지에도 그런 흔적은 남을 수 있다.
하지만 그 흔적이 있다고 해서 더 이상 그 마음이 우리를 지배해야 할 이유는 없다.
흉터가 있다고 해서 그 부위가 영원히 통증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 흉터는 내가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기억하게 해주는 표지이자,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증언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할 일은 상처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다. 예전에는 그 상처가 나를 끌고 다녔다면, 이제는 내가 그 상처를 바라봐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전에는 트라우마의 스펀지 속에 내가 가두어져 있었다면, 이제는 그 스펀지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괜찮아, 나는 여전히 여기 있다”라고 말해줄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것이다.
상처의 주인이 아니라, 상처를 돌보는 보호자가 되는 것. 이것이 심장과 화해하는 첫걸음이다.
결국 심장은 구름이 아니라 스펀지에 더 가깝다. 머리에서 만들어지는 감정은 구름처럼 떠다니며 언어에 의해 모양이 바뀌고, 미래에 대한 상상 속에서 폭풍이 될 수도 있고, 다시 맑은 하늘로 흩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 감정은 우리가 생각을 조절하고 언어를 다루는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다.
“이건 지금의 작은 수증기일 뿐이다”,
“나는 지금 구름 전체가 아니라, 그 안의 한 방울을 보고 있을 뿐이다”라고 재정의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심장 깊숙한 스펀지에 박힌 기름 덩어리는 이런 방식으로는 녹지 않는다. 언어로 재정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언어는 여기서 한 발 물러나 조용히 자리를 내어줘야 한다. 대신 필요한 것은 시간, 온도, 그리고 반복되는 부드러운 관심일 것이다.
스티커를 한 번에 뜯어내려다 유리창에 스티커 잔여물이 흉측하게 남아 칼로 긁어내는 행위를 하기보다, 스티커 제거제를 뿌리고 기다리고 살살 문질러 깔끔하게 제거해 나가는 것처럼,
오래 굳은 기름때를 강한 세제로 긁어내기보다 천천히 부드러운 세정제를 올려두었다가 다시 닦아내는 것처럼, 심장에 쌓인 트라우마와 그림자, 끈적한 검은 감정들은 ‘사라져야 할 오염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돌봄을 받지 못했던 내면 아이의 흔적인 것이다.
우리가 그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변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너, 거기 있었구나.
나는 이제 너를 지우려 하지 않을 거야.
너를 있는 그대로 알아보고,
네가 얼마나 아팠는지 들어보고,
바라만 봐도 내가 이렇게 힘이 드는데…
어린 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너를 따뜻하게 안아줄게.
그러니 너도 언젠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내 쪽으로 한 걸음만 다가와 주면 좋겠어.”
우리 심장은 그렇게 조금씩, 다시 숨을 내쉬고 들이마신다.
끈적한 검은 기름 덩어리는 사랑의 기름과 만나 서서히 녹아내리고, 스펀지 사이사이에는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한 여백이 생겨난다.
그 여백이 우리가 다시 살아갈 자리이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자리이며, 끝내는 “나는 나를 버리지 않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리다.
오늘의 결론은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머리에서 증폭된 감정은 구름을 다시 보듯 줄이고,
심장에서 굳어버린 감정은 스펀지를 안듯 부드럽게 안아야 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우리는 조금씩 배워나간다.
“나의 마음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것”
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