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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예사

삶의 미제

by DEN

옛날, 옛날이라고는 하지만, 까마득할 정도로는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일이다. 변방 지역의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다. 그 마을에는 한 명의 곡예사가 있었다. 그것이 그 마을에서는 신기한 일이었는데, 그 마을은 본디 곡예사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핏줄에는 아슬하게 줄을 타는 능력이, 그들의 영혼에는 생명을 건 불안함을 유희로 바꾸는 신비로움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마을에 곡예사가 한 명 밖에 남지 않게 된 내력은 이러하다. 논의를 거시적인 차원이 아니라 그들의 세대로 한정한다면 ‘남지 않았다’는 표현보다는 ‘생기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것은 후술할 내용을 통해 알 수 있으리라.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마을은 원래 곡예사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모든 주민은 줄을 탔다. 그들은 그 업을 통해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줄을 탄다는 행위가 단순히 밥벌이 수단에 그쳤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곡예는 인생의 지향이자,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삶의 동기요, 스스로를 깨달아가는 영혼의 양식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곡예는 우리에게 인간성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줄을 탄다는 행위에 그런 거창한 말이 적용되는 것이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세상에 복잡다단성이란, 너무나 어려운 문제여서 아무리 발전된 학문이나 고도의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조금의 짐작조차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이해해 주기를 희망한다.

그런 곡예사 마을의 사람들이 줄 아래로 내려온 것은 그들의 생활이 윤택해지면서였다. 그 마을에 풍년이 들어 많은 부를 쌓은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고 집을 포함하여 좋은 건물도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단순 생활뿐만 아니라 오락 거리도 늘어났다. 윷놀이, 투호, 제기차기, 고스톱 등 다른 마을에 유흥 거리들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하나둘씩 줄을 떠났고 단단한 땅 위에서, 튼튼한 집 안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3세대 정도가 지나자, 이 마을에는 줄을 타는 사람이 없어졌다. 곡예를 아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저 하나의 옛이야기, 역사에만 남아 있는 과거의 유산, 글이나 책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사라져 버린 구습에 불과했다. 이 마을의 전통과 정체성, 고유성을 보여주는 흔적은 모두 생기를 잃었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방치된 줄과 나무 기둥만이 덩그러니 지나가 버린 영광스런 시절들을 슬프게 회상할 뿐이었다.

마을을 예술로 비유하자면, 한참 동안을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던 어느 날, 잊힌 이 마을의 전통을 약동시킬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그 젊은이는 태어날 때부터 옛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운명이라고 불러야 할지, 잊힌 본성이 다시 세계로 나오기 위해 감추었던 자취를 차츰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그건 이 이야기의 전개에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하여튼, 그는 자연스레 곡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할아버지가 옛 어른들이 줄을 탔다는 이야기를 전할 때면, 마을에 있는 향토 문화 기록의 자료를 탐독할 때면, 애물단지로 전락한 줄과 나무 기둥을 바라볼 때면, 그의 마음에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흥분과 감동, 생동감이 느껴졌다. 그 마음은 자연스레, ‘언젠가 한 번쯤은 저 줄을 타봐야지!’라는 구체적인 목표로 발전했고, 그의 삶에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희망찬 미래에 대한 달콤한 향이 은은하게 깃들었다.

그는 점차 그 계획을 실천해 가기 시작했다. 여러 자료를 찾은 끝에, 점차 곡예를 연습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이 마을은 곡예사 마을이었기에 필요한 도구는 모두 있었다. 연습용 줄과 나무 기둥,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매트 등 필요한 모든 물건은 마을 창고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구해 자신의 집 앞 마당에서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그는 옛날 곡예가 펼쳐졌던 공연장을 찾았다. 방치되었던 줄을 다시 기둥 사이로 끼우고, 사다리를 타고 위로 올라가 줄을 타기 시작했다. 이는, 곡예사 마을이라는 이 마을의 본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생경한 장면이었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서 그 장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신선한 구경거리에 그들은 박수를 치고 환호하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런 긍정적인 관심은 잠깐에 그칠 뿐이었다. 새롭고 신선한 것이 줄 수 있는 흥미의 힘이 다했는지, 마을 사람들은 금세 냉소적인 반응을 비추길 시작했다. 자신의 본성을 잊은 자들에게 곡예란, 자신과는 별 관계가 없는 것, 어떤 실리나 유흥을 주지 못한다면 굳이 다룰 필요가 없는 케케묵은 골동품에 불과했다. 역사의 뒤안길로 묻힌 골동품은 잠깐의 흥미는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런 주변의 반응과는 반대로, 그 젊은이는 줄을 타면서 자신과 삶, 인생을 알아갔다. 줄을 타는 동안 느껴지는 불안, 그 불안에서 나오는 흥분과 즐거움은 그의 영혼을 자극했다. 곡예를 하는 시간이면, 그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줄을 탄다는 행위,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고유한 자기 자신의 발현이자, 이유 없는 의미와 본성의 창조요, 무한하고도 추상적인 관념의 포착이었다. 그렇게 그는 계속 줄을 타며, 살았다.

하루는, 그의 친구가 줄을 타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거기서 불안하게 그러지 말고, 내려와.”

“안돼, 나는 줄을 타야 해.”

“여기 이렇게 평평하고 안전한 곳을 놔두고 왜 위험하게 그 위로 올라가 있는 거야?”

“이곳만이 진정한 삶의 의미가 탄생하는 곳이니까.”

“의미?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데? 돈이 돼? 아니면 어떤 명성이라도 생겨? 사람들은 다 너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어. 재미가 있어? 이런 위험 없이도 재밌는 건 많아, 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줄을 타야 하는 건데?”

“아니, 이건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야. 줄을 타는 데에는 이유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하는 거야.”

“이유가 없는데 왜 하는 거야?”

“이유가 없기 때문에 하는 거야. 그리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이유가 없는 게 아니야. 그것을 어떤 단어로, 문장으로, 언어로,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이유로 표현할 수 없을 뿐이야. 그렇기에 가장 본질적인 이유고, 이것을 계속해야 할 이유야.”

“자꾸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보기만 해도 불안해 보여. 그냥 땅에 내려와서 대충 살아. 이 마을에는 이제 너 말고 줄을 타는 사람이 없어. 왜 없겠어? 사는데 굳이 곡예가 없어도 되기 때문이겠지.”

“그래, 그렇게 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진정한 삶이 아니겠지.”

“진정한 삶은 뭔데? 이유도 없이, 불안불안하게 줄을 타는 게 진정한 삶이야?”

“안주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성을 회복하는 삶. 그것이 비록 위험을 가져다준다고 해도.”

“허, 위대한 철학자 납셨네~ 그래 뭐 평생 그렇게 줄이나 타면서 살아라.”

그 젊은이는 계속 외롭게 줄을 탔다. 괜찮았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아무도 자신을 바라봐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해도, 이 행위가 돈과 명예, 재미와 어떤 유익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의 곡예란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이었고,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그는 그날도 여지없이 줄을 타고 있었다. 그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숨을 가쁘게 쉬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주위를 둘러쌌다. 몇몇 사람이 그를 들것에 싣고 병원으로 끌고 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민들은 ‘저럴 줄 알았다’, ‘그렇게 왜 미련하게’ 등의 조롱과 동정이 섞인 반응을 뱉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회복하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무덤에는 묘비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묘비에는 짧은 문구가 쓰여 있었는데, 그건 그의 방에서 발견한 노트에 적힌 글을 바탕으로 각색한 문장이었다.

‘태초의 인간은 곡예사의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는 본연의 인간으로 살았기에 죽음의 숙명을 맞이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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