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모들에게
사실을 소재로 글을 쓰면 주변 사람들은 누구 얘기인 지 자연히 알게 된다.
미리 글을 보여주고 허락을 얻거나, 구성을 크게 바꾸는 것으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염치를 노력해 왔는데
Q는 특별한 경우다.
Q는 자신에 대해, 자신과 부모에 대해 써달라고 했다. 말맛을 살리고 싶어 들은대로 적는다.
1
- 아버지 병간호 때문에 휴직을 했다고 들었어요. 부모님 입장에서 얼마나 다행스럽고 힘이 될까 싶네요.
Q(이하 생략)
아유, 그게요, 사실은 저 때문에 하는 거예요. 저는 사랑받은 딸도 아니었고 아버지를 좋아할 수 있었던 자식도 아니었어요. 사정을 들으시면 지금 웃는 모습이 어두워지실텐데 벌써 미안하네요.
- 아뇨. 진실이 낫죠.
어떤 진실이라도요?
-그럼요. 경험해 왔어요. 진실은, 추악한 진실이더라도 결국은 자유로 밀어줘요.
어둡더라도 나중에는 어둡지 않은 쪽으로 와 있게 되었어요. 어느새 다른 국면을 만들어 준달까요, 진실은 힘이 있어요.
저는... 상담소 가면 최초의 기억을 물어보잖아요. 그런데 그 얘기부터 상담사가 우셨어요.
선생님을 울리고 싶진 않으니 그나마 말씀드릴 수 있는 것부터 얘기할께요.
하얀 싸라기가 까만 허공 위로 날리는 겨울밤이었어요. 열시 좀 넘어서 네, 티비에서 뉴스가 끝나고 나서였어요.
저는 어린 몸으로 대문 앞에 내처져 있었어요. 속옷 차림이었죠.
차가운 공기가 처음엔 청명했지만 목이 따갑기 시작했어요. 겨울 바람은 할퀴듯 스치더군요.
땅을 얇게 덮은 눈이 제 발에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발가락을 땅땅히 죄어오던 걸 기억해요.
물은 단단하게 얼어요. 그때 알았어요. 네, 맨발이었어요.
가로등 불빛 아래 제 백양 메리야스가 파랗게 비치거나
그림자처럼 까만 고양이가 하얀 소금같은 눈을 사뿐히 밟고 뛰어오르던 모습도 기억해요.
나무 대문을 보면서 했던 결심도 기억이 나구요. 기다리자, 언젠가 들여주시겠지.
나중에 들으니 세 살 때였대요. 시대 분위기가 그랬어요, 80년대는 야만적이었죠.
뭔가 잘못해서 내쫓았는데 어디 가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빨갛게 떨었다고, 어머니는 절 보며 어이없으셨다고 해요.
스무살이 되어 독립을 할 때까지 고단한 세월이었습니다.
부모님은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출신 차이만큼 반목하셨어요. 어떻게 결혼하고 딸을 둘이나 낳았는 지 신기해요.
아버지는 아들을 찾느라, 엄마는 자기 감정 그대로를 느껴주고 희생을 벌충해 줄 자식을 찾느라,
제게 관심을 둘 여력이 없으셨어요. 저나 제 동생이나 엄마가 바라는 딸이 되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죠.
저는 더 다정하고 감정적이었어야, 동생은 더 공부잘하고 유능해야 엄마가 바라는 포만감을 드릴 수 있었어요.
손이 안 가는 아이라고 칭찬을 들은 적은 있어요.
남편 살아있을 적에-Q의 남편은 산재로 사망- 제가 경제적 낙차를 잘 견딘다고 들었는데 어린 시절 덕분이구요.
엄마가 자주 집에 없었어요. 가출하시면 일이년 뒤에나 뵈었죠.
전 진지하게 고아원을 각오했었고 언제 헤어질 지 모르는 동생에게 잘해주려고 했어요.
네살 때부터 친척집 여기저기 더부살이하면서 지붕 있고 굶지만 않으면 산다는 걸 몸으로 배웠어요.
지저분하고 피곤한 것보다 치사하고 모멸스러운 것이 내심에 더 더러운 흉터로 남는 걸 알게 되었구요.
학교에 가서 다른 아이들 보면서 제가 가지고 태어난 이야기가 얼마나 예외적일 수 있는 지 알았습니다만,
제가 완결할 수 있으니 좋은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책이 없었으면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 말고 다른 모델을 만날 수가 없었을 거예요.
예수는 창녀라고 무시하지 않았고, 부처는 중생에게 부처가 아니라 스스로를 섬기고 발견하라고 하셨죠.
공부한 책에는 권력자가 아니라 법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적혀 있었구요.
책은 제가 고민할 때마다 피부에 밀착해서 도움이 되어 주었어요. 어떤 고민도 책에 답이 있었어요.
아, 알아요. 저는 책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지만 모두에게 그렇지도, 그럴 필요도 없죠.
제 수단이 책이었던 것이고, 해서 아이에게까지 독서를 권하지는 않습니다.
아빠랑 언제부터 친해졌냐구요?
사별하고서는 한국을 하루도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간판이나 도로나 모든 풍경이 먼저 간 남편을 생각나게 했죠.
이민을 계획하고 싱가포르에서 몇달 아등바등했어요.
그런데 우편함에 딱 아버지 글씨같은, 연필을 눌러 쓴 오자 투성이 편지가 도착했어요.
남국의 커다란 초록색 이파리를 보다가 이면지에 적은 구깃구깃한 편지를 열었는데 전생의 기록을 보는 것처럼 생생하고 반가웠습니다. 두어 문장, 잘 지내라는 말이었어요.
아버지다운 행동이었습니다. 저에게 좋은 아버지는 아니셨지만 모질지 못하셨거든요.
엄마에게 벌 받던 그 겨울밤 절 집으로 들여준 사람은 아버지였어요.
이민을 접고 들어온 결심엔 그 편지도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한국이 그립겠구나, 아버지가 쓴 '대안민궄'이라는 글자를 보며 느꼈어요.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2
십년 전쯤, 엄마가 입원하시면서 저는 아빠와 병실 앞에서 크게 싸웠어요.
아버지는 돈돈 하시면서 퇴원만 종용하셨고, 저는 천벌 운운하며 아버지를 내쫓았죠.
병원비요? 네, 그게 문제가 되었어요. 아니 돈이 문제를 보여주었어요.
저는 휴직하고 동생과 엄마를 함께 간병했어요. 병원비는 제가 감당했구요.
동생도 엄마도 돈에 대해선 말을 아예 안해요. 그냥 제가 내고, 그런 식이었어요.
그런데 동생이 아버지에게 계산서만 따로 들고 가서 병원비를 타낸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동생은 제가 어머니 응급 수술 대비해서 병원에 맡겨둔 현금까지 가져갔는데, 모두 엄마와 한 일이었구요.
사실 저는 돈보다도 다른 문제가 괴로워서 상담소를 갔어요.
제가 간병할 때는 동생이 자기 아이들과 제 아이를 봐주기로 했었는데
말도 없이 아이에게 가방을 들려서 아버지도 안 계신 친정에 애만 두고 갔어요.
아이가 빈 집에서 저에게 전화를 했고, 네... 저는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아이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서 함께 택시를 타고 도움받았던 상담소로 갔어요.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요.
그때 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대기실에 딱 사십분만 기다려달라고 하고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꼽아 내미는데,
아이가 상담실 들어가는 절 따라서 고개가 움직이는 거예요. 미안했어요. 아이에게 죄스러웠어요.
상담사는 처음으로 제 말을 가로막고 질문을 하셨어요.
"이번에도 어머니가 먼저 연 끊자고 그러시네요? Q씨 잘못인가요?."
"......"
"왜 견디시는 거죠?"
"엄마가 아프시고,"
"예전에 어머니는 자식 때문에 이혼 못하는 불행한 여자였고, 지금은 이혼 못한 채 병자가 되었으니까
Q씨는 어머니에게 늘 잘해줘야 한다는 거군요.
Q씨는 결혼도 자기 힘으로 했고 사별한 후에도 어머니에게 심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의지할 수 있었던 적이 없구요.
어머니에게 고맙다는 소리 한번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지만
Q씨는 해왔던 대로 백송이 장미에 반짝이 니트 선물에, 그랜드캐년이네 유럽 일주 패키지를 드렸구요.
이제 어머니는 맏딸 돈으로 병원 있으면서 둘째딸과 병원비 계산서로 남편에게 사기를 치고 있군요.
이 끝은 어디일까요? 어머니가 이혼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동생은 언니를 뭘로 보는 걸까요."
"저희 엄마가, 제가 바라는 애정을 주실 수 없는 분인 것 압니다."
"네."
"제가 제 욕심을 못 놓겠어요. 저는 언제까지나, 사랑을 받고 싶은 딸이죠. 사랑을 기다려요.
언젠가 엄마에게 사과라도 들을 지 모른다고 상상을 해요. 그러지 않을 수가 없어요.
너무 필요한 거예요, 애착이. 그런데 제가 엄마를 외면할 수 있을까요?"
"떠나세요. 그게 딸이 되는 길입니다."
"......"
"자식을 떠나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버릴 뿐이예요.
이번에도 어머니가 돈자루 빼앗고 Q씨를 버리기 전에 떠나세요. 자식이 되세요."
"밖에 제 아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엄마를 떠나면서 감히 제 아이를 볼 수 있을까요."
"볼 수 있죠. Q씨는 다른 사람입니다.
유전자 물려줬다고 함부로 대하고 죄책감까지 느끼게 할 자격은 없습니다. 부모가 낳았으니 책임을 져야죠.
어떤 부모들은 남의 말은 두려워해도 자식 눈치는 보지 않죠. 자식이 마음아파하는 것이나 부모를 어떻게 평가할 지 두려워하지 않아요.
부모로 살고 있지 않은 거예요. 부모로 살게 해 주세요."
3
아버지는 피검사 때 유달리 초조해하세요. 주사가 그렇잖아요, 긴장이 되니까요.
제가 혈관 풀어드린다고 손 주물러드리면 수줍은 표정으로 가만히 계세요.
나이가 드시니까 손등 피부가 나무 껍질처럼 얇고 곧 떨어질 낙엽처럼 버석버석해요.
엊그제는 손 주무르는 데 그러시더라구요.
"넌 엄마를 용서 못하나보다."
아버지는 한글도 잘 모르시고 제가 전공한 과목 이름도 잘 모르시고 산재가 병 이름인 줄 아시는 분이예요.
그런데 제 마음을 아시더라구요.
엄마와 절연한 후에 아버지가 다가와 주셨어요.
용기를 끌어올린 목소리로 전화하시고는, 제가 받으면 부끄러워하면서 빨리 끊으셨죠.
서울 떠나 통영으로 이사하던 날, 밤에 아이와 짜장면 먹고 들어오는데 집 앞에 와 계셨어요.
손에는 전화로 물어보셨던 주소가 적혀 있더라고요. 영문 아파트 이름을 잘못 적어서 한참 헤매셨다고.
아버지는 절 사랑하려고 노력해주셨어요. 그 사랑이 아버지 방식이어도 진심은 전해져요.
그게 얼마나 반갑고 좋았는 지, 너무 감지덕지해서 지난 서운한 일들이 기억도 나지 않아요.
그래서 아버지 곁을 지키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시간을 절대 놓치지 못하겠어요.
바라는 거요?
아버지가 오래 사시는 거요. 좀 아프셔도. 아빠도 사실은 오래 살고 싶지 않으실까요.
엄마요?
다시 와서 제게 희망을 주시고 또 절 버리시겠지요. 제게 실망했다고 하시겠지요.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아요. 이대로 마치는 편이 최선인가도 싶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