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빛나는 사금파리1

소름 돋다.

by 하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의 세포마다 소름이 돋았다.

그런 느낌은 난생처음이었다. 나 스스로도 놀라서 이게 웬일인가 싶었다. 그 말을 하신 분은 요양병원에서 지내고 계신 할머니셨다. 그 어르신에게 필요한 시중을 든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그저 고맙단 인사였을 수도 있는데 그 인사말을 들은 지 한참 뒤에도 그 방 앞을 지날 때면 나도 몰래 닭살이 돋곤 했다.


결혼을 한 후에 남편이 하는 목장에 파동이 오자 나는 몇 년 동안 참외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시원찮은 일꾼이라 소득이래야 겨우 반찬값을 댈 정도였다. 그런 중에도 남편의 도움으로 방송대를 졸업한 뒤였다. 그러고도 마땅한 일을 갖지 못한 채 지내던 중에 자격증을 따게 되면 혹시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참외 일하는 틈새 시간을 이용하고 또 나이 들어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겠노라고 집에서 가까운 곳을 찾다 보니 매일 집을 나서야 하는 전문대학이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하려니 학비도 문제지만 운전도 할 줄 모른 채 매일 집을 나서야 한다는 것은 큰 부담감이었다. 이를 지켜보던 남편이 한마디 했다.

''학사 학위 들고서 다시 전문학교가 뭐고?''

그 말을 조언 삼아 다시 찾기 시작했다. 한 주일에 한두 번으로 가능한 곳은 대학원뿐이었다. 무려 7년 만에 턱걸이로 겨우 딴 졸업장이 그렇게 중요하게 쓰이나 보다 싶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면접장에도 가보지 못하고 떨어졌다. 그다음 학기에 다시 원서를 넣었다. 면접 보시던 교수님들께서 질문할 때마다 내가 가진 미흡한 조건과 상황에 대해 언급하시는데 적절한 답을 드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하고픈 말을 해보라고 했을 때에야 내 뜻을 말할 기회가 왔다.

'만약 학점이 낮아서 떨어진다면 방송대를 한 번 더 다니고 오겠다, 그런 아쉬운 점수만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참외 농사를 지으며 아이를 셋 낳아 기르노라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제야 입학원서 서류를 넘기시던 학장님을 보면서 소개서도 보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입학은 했으나 학비와 경비가 늘 부담스러웠다. 애초에 반 장학금이었으나 때론 학업우수 장학금받기도 했지만 하는 수 없이 졸업 전에 취업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여기저기 원서를 내고 면접을 봤으나 번번 떨어졌다.

그러다가 간신히 붙은 곳이 노인전문 요양원 생활 지도사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시설에서 일하는 요양보호사였다.

그런데 그런 우여곡절 끝에 집을 나서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내야 하는 단체 생활을 하게 되었다.

혼자서 아무리 용을 써도 느끼기 힘든 소름 돋음이 할머니의 인사말에 반응한 것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