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기 전에(전)
동화에서 보면 토끼와 거북이 가 경주할 때 좀 빠르다고 잠을 자버린 토끼가 지고 느릿느릿하지만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 거북이가 이기는 것으로 결미를 낸다. 그 동화처럼 정말 삶도 그러할까? 적어도 아직 내겐 글쎄요? 다.
'다만 말이 없음.'이란 평가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생활기록부에 토씨하나 안 틀리고 거의 매번 적히던 과거사가 서서히 뒤바뀌는 때가 있었다. 결혼 후 아이들을 셋이나 낳아 길러도 어느 하나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수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끙끙대었다. 그러다가 살아 있음의 몸부림과 생존에의 욕구가 쌀자루 옆구리 터지듯 말로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 마흔 이쪽저쪽이었다.
다혈질에다 부지런한 시댁 식구들에 비해 느릿느릿 생각만 많은 나는 번번 일 앞에서 곤욕을 치렀다. 게다가 집안의 가장이신 아버님께선 자신의 뜻을 언제나 우선으로 하셨고. 어머님께선 알뜰하게 장만한 살림살이 곳간 열쇠를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고 애쓰셨다.
사소하게는 직접 농사지은 무나 배추 한 장도 허락을 받아야 내어 올 수 있었다. 그러니 돈 들어갈 일은 꿈도 못 꾸었다. 그 모든 것이 일은 묵묵히 하지만 외골수인 남편 탓이라 여겨질 때면 울화가 치밀어서 한바탕 소란스레 실랑이도 많이 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타고난 것일까? 남편은 심하게 표현하면 짠 소금이었다.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에게 더 가혹했다. 농사를 짓거나 사소한 수입이 생기면 꼭꼭 묶어서 아버님과 어머님 손에 다 드리고도 외려 내겐 큰소리만 쳤다. 아이들이 점점 자라고 있어 먹을 것과 입을 것에 신경 써야 할 때에도 말이다.
IMF파동 여파로 몇 년간 사료값이 폭등한 데다 환율까지 높아져서 목장을 하는 시골 살이도 만만찮았다. 온 가족이 합심하여 빈자리 없이 농사를 짓고 특작으로 참외를 키워서 간신히 터널을 통과했다. 어느 때부턴가 가정경제가 풀리는 중에도 여전히 나와 내 아이들의 생활에 필요한 경비는 쥐어짜야 겨우 한두 방울 나오는 기름 같았다.
막내가 두 돌을 갓 넘길 때까지 몇 년간 집과 우사 사이 빈 땅에다 참외 농사를 지었다. 그나마 근근이 기본생활비를 충당하던 것마저 어느 순간부터 시아버지께서 관리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갈수록 태산이었다. 남편은 아이들과 지낼 최소한의 경비도 아버님께 받아쓰게 하곤 그마저 말하기 싫을 땐 모르쇠 했다.
내겐 새로운 용기가 필요했다. 손이 더디고 힘이 적은 나로선 일자리를 찾으려면 뭔가 배워야 했다. 처음엔 미용기술을 생각했다. 그러다 목표를 세운 것이 아씨 때 시설에서 일했던 사회복지사 자격이었다. 집 가까운 학교는 매일 가야 하는 불편함이 따라서 대신 일주일에 한 번가는 대학원 문을 두드렸다. 아이들을 키우며 방송통신대를 졸업한 것이 드디어 빛을 발할 순간이었다. 그때쯤 원서비가 없었는데 전화유선 보증금이 환불되어 해결했다. 입학금은 친정올케에게 빌렸다.
문제는 일주일에 하루는 들일에서 벗어나야 할 명분이 필요했다. 내가 먼저 배워서 학원비 들이지 않고 아이들을 키워보겠노라고 시아버지께 허락을 받았다. 단 몇 년간이지만 참외소득으로 모아 둔둔으로는 부족했기에 장학금을 노렸다. 남편은 일주일에 만원 한 장을 교통비로 주었다. 집에서 자전거로 출발해 삼십 분쯤 가서 버스로 갈아타고 다녔다. 그러다가 버스대신 동급생의 차를 얻어 탔다. 그때부터 그 돈은 일주일 반찬값이 되었다.
한마디로 아이들 학원비로 자격증을 노린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작전이었다. 그때가 마흔 줄에 막 들어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