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서니 봄은 어느새 여름 향기를 묻어오고 있다. 붉은 영산홍 꽃잎이 색이 바래고 있으며 민들레도 일찍 핀 꽃은 하얗게 홀씨로 변하고 있다.
며칠 전에 옮겨 심은 꽃모종에 물을 주고 돌아서니 무화과나무가 잎과 동시에 열매가 줄기에 맺어 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라 하나 실은 잎 사이사이 동글하게 자라기 시작하는 열매 속 먹을 수 있는 붉은 부분이 꽃이란다. 한마디로 숨어서 피어나 사람이나 곤충에게 가장 귀한 부분을 기꺼이 내어주는 셈이다.
처음 무화과를 본 것은 이십 대 초반 가톨릭 단체 사무실에서 일할 때였다. 건물 바로 앞은 성모님을 모신 작은 성모당도 갖춰져 있었다. 그 앞으로 애법 굵은 히말라야시다 나무가 서 있고 담 아래로는 화단이 있었다. 그 화단에는 무화과나무가 몇 그루 심겨 있었는데 초여름부터 애법 널찍한 잎 모양새를 자랑하며 틈틈 열매를 맺고는 했다. 하지만 한창 열매가 익어서 터지면 사람보다 먼저 새와 벌레들의 맛난 먹잇감이 되곤 했다. 어쩌다 멀쩡한 열매로 맛을 보긴 했으나 그저 독특하게 생긴 큰 잎사귀를 보는 것으로도 큰 즐거움이었다.
그 후 무화과란 가끔 맛보는 마른 과일 정도로 잊히고 있었다.
그런 무화과나무를 몇 년 전에 아버님께서 묘목을 사다 심은 곳이 바로 우리 집윗채 처마 밑 화단이었다. 집을 짓고난 뒤에 처음 심은 것은 꽃나무도 과실수도 아닌 애매한 명자나무였다. 그러구러 이십여 년쯤 지나니 점점 더 볼품이 없어져 갔으나 남편과 나는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턴가 아버님께서 봄만 되면 유실수를 심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뒷밭 둑에 감나무와 밤나무가 자리를 잡더니 해가 갈수록 점점 가짓수가 늘어갔다. 그러다가 급기야처마 밑 명자나무를 캐어내고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거였다. 어린 묘목에다 거름을 좀 넣었다 해도 척박한 장소이다 보니 잘 자라지 않아서 한동안 뭐가 심겨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작년에야 잎과 동시에 동그란 열매가 달리는 걸 보고서야 무화과인 줄 알았다.
어쩌다 한 번씩 우리 집 윗채를 보면 당황할 때가 있다. 처음 지을 때 가족들 손으로 외벽을 연한 미색으로 칠했다. 그리고 지붕 기와를 덮고 나니 딱 이십 대 때 일하던 가톨릭 단체 사무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다. 게다가 이제는 무화과나무까지 자라서 창문을 가릴 정도가 되니 더욱 그러하다.
몇 년 전 마을 안에서 벽화가 그려지고 있을 때 우리 집 벽체도 어찌해볼까 싶긴 했었다. 하지만 여유기 없어서 포기하고야 말았다.
다시 봄이 되고 마당에서 놀 시간이 많아지니 다른 집에 비해 다소 맹송 한 벽체에 자꾸 눈이 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내 무화과나무 잎이 커지고 얼매가 익어 가면 늦은 가을까지는 날마다 살아 숨 쉬는 벽이 되리라.
이제야 떠오른 생각이 만약 겨울 한철이라도 볼 그림을 굳이 그려야 한다면 무화과 그림은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