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뜻을 안다는 나이, 마흔에 직장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남편의 사업 실패로 우리는 10억 넘은 빚을 떠안았다. 용감하게 내가 먹여 살릴 거니 걱정하지 말라며 절망에 빠진 남편에게 큰소리쳤다.
결혼 전, 규모가 작은 회사에서 10년을 근무했다. 그 이력은 마흔의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정 안되면 식당에서 설거지라도 하면 되지 싶어 아이 손을 잡고 동네 식당가를 돌아다녔다. 마침 사람을 구한다는 식당 앞을 기웃거렸다. 주인인 듯한 남자에게 일할 수 있느냐 물었더니 내 몰골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다른 일 찾아보라며 거절했다. 왜 안되냐고 되물으니 설거지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주부인데 설거지가 대수냐 싶었지만 나도 자신 없었다. 스스로 길게 할 일이 아니라 판단했다.
주변 사람에게 내가 일자리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지인 찬스로, 지금은 언감생심이지만, 학교 도서관에 운 좋게 취업했다. 운이 좋다는 말이 거부감이 들지만 나에게는 그랬다. 그 학교에 내일부터 출근해야 할 사서가 다른 일자리를 구해 출근할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당장 도서관 문을 열 사람이 필요한 학교의 직원이 지인을 통해 연락을 해왔다. 경력이나 자격증 유무를 떠나 내일부터 근무할 수 있는 조건이 최우선이었다.
이력서에 독서지도사 자격증과 아이 학교에서 도서 명예교사로 3년간 봉사한 것을 적었다. 면접관은 봉사한 일에 부분을 높게 평가해 주었다. 요즘은 도서관에 사서가 근무하지만, 그때는 국어 교사나 학부모, 도서부 학생이 도서관을 운영했다. 마침 취업을 원하던 시기에 도서관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생겼고, 덩달아 사서의 역할이 커졌다.
아이의 학교에도 사서가 따로 없고 학부모가 그 자리를 대신 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서너 번 도서관에 나가 도서 정리와 새로 들어온 책의 장비 작업, 도서관 시스템 운영 등을 선배 학부모에게 배웠다. 지금 생각하면 주먹구구지만 도서관을 정리하고 운영하는데 열정적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아이를 위해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책을 좋아한지라 도서관 일이 재미있었다. 찢어진 책을 보수하고, 아이들이 던져놓은 책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도서관 시스템운영에 관심을 가진 것이 내 이력이 되었다.
내 일이 생기니 우리 가정에 일어난 불상사를 해결할 의지가 생겼다. 더 이른 나이였거나 더 늦었다면 재기할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폈다. 물론 내 생각이다, 아들은 몇 년간 엄마를 고생시켰다고 아빠를 무척 싫어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사서 일이 20년이 되어간다. 중간에 공부를 시작해 정사서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공부를 해보니 처음 근무한 학교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방학 중이라 업무를 인계해 줄 사람이 없어 도서부 학생들에게 이것저것 물어서 겨우겨우 도서관을 운영했다. 그나마 이용하는 학생이 적어 다행이었다.
전공과 무관치 않지만, 문외한인 내가 사서로 일할 수 있던 것은 순전히 운이라고 생각한다. 더 늦지 않은 나이에 남편이 사업을 접은 것도, 도서관 봉사에 열을 올린 일도 모두 운이라 생각한다. 운은 움직임이다. 내 의지가 작동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움직이지 않았으면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20년 가까이 이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스스로 돕는 일을 자처한 내게 천직을 내려준 게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