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금융권 회사는 일단 매니저 트랙에 들어오면 Up or out문화인 회사들이 많이 있어. 내가 다니는 A사도 대표적으로 그런 문화야. 암묵적이지만 3-5년 안에 다음 단계로 승진을 못하면 회사에서 잘리게 돼. 동료들끼리 농담 처럼 하는 이야기로 승진을 하면 게임처럼 하트 4개를 받게 돼. 그 하트는 매년 하나씩 없어져 물론 다 없어지면 죽고(레이오프) 하트를 다시 채우는 방법은 레벨업(승진)을 하는 거야.
A사를 오기 전에는 이런 세계를 몰랐고 사실 자만해있었던 거 같기도 해. 인정받았고 나를 스폰서해주는 회사의 높은 분들도 많았으니. 호주에 오기 전에는 신경도 안 썼어 사실. 하지만 지금의 내 상황은 이미 하트 4개 중 2개를 써버린 상황이야.
일단, 업무능력이 인정을 받고 있다면 다음 레벨업을 노리면 되니 걱정이 없어. 하지만 첫 1년은 새로운 마켓과 상품, 소비자와 규제를 배우느라 보냈고 이제 열심히 성과를 내야 할 2년 차는 시작과 함께 규제적용으로 인한 수요감소 게다가 코로나까지 연말평가가 좋지는 않았어.
다음은 마켓 내에서의 평판. H는 이미 호주에서 4년간 CCO를 한 베테랑. 게다가 규제적용전 마케팅비용을 쏟아부으며 잠시나마 마켓에 큰 성장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야.
그에 비해 나는 규제적용 후 확 작아진 신규대출 수요. 그리고 코로나는 전혀 준비 및 대응하기 힘든 만큼의 큰 리스크이기에 대손충단금(미래의 손실을 감당하기 위해 법적으로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 현금 - 대손충단금이 올라가면 올라간 금액만큼 이 대차대조표에 손실로 잡혀)이 5배 이상으로 뛰었고 함께 신규대출의 감소는 오세아니아 마켓을 큰 손실이 날것이라 말하고 있었어. 비록 Loss Forecasting팀의 결정으로 계산된 결과를 설명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건 엄연히 마켓의 리스크 책임자인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결정인 거야. 이걸 컨츄리매니저랑 General Manager들에게 알리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었어. 실제로 이 결과를 바탕으로 마케팅 예산은 줄어들었고 규모가 줄다 보니 5% 정도의 인력감축도 있었야 했어. 내 결정과 말에 따라 함께 일하던 동료가 직장을 잃는 걸 봐야 했지.
이제 부임한 지 1년 반밖에 안 된 나에게 그 정도의 단련된 리더십은 없었던 거 같아. 코로나 초기 하루 걸러 한번씩 있던 Country executive미팅은 정말 들어가기가 떨릴 정도였어. 모두 리스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가뜩이나 규제 때문에 어려워진 상황에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신규대출 심사를 더 강화해야 하고 한도를 줄여야 한다고 말하는 나를 좋아하기는 힘들었을 거야. 아무튼 마켓 내에서 H대신 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해줄 사람은 별로 많아 보이질 않았어.
그럼 마지막은 인맥이야. 나를 밀어주던 EVP인 D 씨는 미국사업부이고. 원래 APAC의 헤드였던 W는 중국마켓의 CEO로 부임해서 리스크부서를 떠났어. 인터내셔널 헤드인 B씨도 미국사업부의 기업리스크 부분으로 자리를 옮겼고. 즉 해외사업부로 가게 되었을 때 힘써주던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해외사업부에 남아있지 않았어. 그에 비해 H는 이미 해외사업부에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사업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나보다 더욱 강했지.
역시 이변은 없었어. 2021년의 시작과 함께 나는 호주에는 내 자리가 없을 거다라는 통보를 받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