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ria Oct 21. 2021

코로나 시대의 런던(Lockdown in London)

ep 1_코로나를 피해 도망치다

    2020년 4월 4일. 부리나케 히드로공항으로 향하던 그 길이 생각난다. 얇은 자켓과 등산바지를 입고 런던 패딩턴(Paddington)역으로 총총걸음을 걸으며, 캐리어는 질질 끌고서, 약간 스산한 아침 바람을 긴장하며 마시고. 마스크로 중무장하였지만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았다. 중국인들은 다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우주복같은 방호복을 입고있었다. 감히 장담하건데 그 당시에 겉모습만 보고 국적을 구분할 수 있는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런던의 센트럴에서 홀로 살던 나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사건들이었다. 영국의 이마트격인 웨이트로즈(waitrose)에 길게 늘어선 줄, 텅 빈 진열대, 마트 빼고는 모두 닫아버린 상점들, 아무도 없는 거리, 비닐장갑을 끼고 다니는 사람들. 정말 갑자기 닫아버린 레스토랑과 바. 어디서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랐다. 굳게 닫힌 학교. 순식간에 늘어나버린 자유시간을 어떻게 소비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락다운이 시작되기 바로 전날, 운 좋게도 좋은 레스토랑에서 고기를 썰고 와인을 챙 하고 부딪치며 로맨틱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옷도 드레시하게 입고 하이드파크를 내려다보며 "내일부터 락다운이라고 하던데... 오늘을 즐기자"라고 실실거리던 우리들. 설마 어떻게 되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랬다. 다음날부터 벌어질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락다운 전까지만 해도 내 삶은 '프리 앤 로맨틱(free and romantic)'이었다. 공부하러 간 것이긴 했지만 능력이 되는대로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파티도, 쇼핑도 하며 즐겁게 살았다. 딱 거기까지였다.

    히드로 공항의 셀프 체크인이 불가능해서 대면(in-person) 체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담당한 나이 지긋한 영국항공 직원은 기침을 10번쯤 한 것 같았다. 나는 슬슬 뒤로 물러서면서 내 행동이 너무 티가 난 까닭에 친절한 그에게 미안함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기침을 하면서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그를 향한 분노가 솟았다. 아직도 항공사 직원인 그가 왜 마스크를 쓰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영국에서는 일부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마스크 착용 의무를 두지 않기는 했으나, 이 경우 스스로가 면제대상자라는 작은 카드를 가지고 다니기 마련인데 이상했다. 불안하니 괜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고 그는 분명 코로나에 걸렸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아마 난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코로나검사를 받자마자 양성으로 분류되어 실려갈 것이다.  

영국항공 내부는 완전한 만석이었다. 거리두기를 위해 업그레이드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마저도 불가능한 완.전.만.석. 코로나시국에 이렇게 꽉꽉 채워서 비행기를 운영하는 게 가능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좁은 좌석에서 장장 10시간이 넘는 시간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잠만 8시간은 잔 것 같았다. 왠지 열이 나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서울시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서울시 ㅇㅇ구청 보건소까지 직행했다. 기다란 면봉으로 코와 목구멍을 두어번 찌르는 게 코로나 검사였는데, 생각보다 아팠다. 콧구멍 안쪽은 왜이리 아픈걸까. 신경이 아주 발달했나보다.

서울로 떠나기 직전 런던. 벚꽃 만개 하이드파크. 런던 주민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벚꽃놀이 뿐이었다. 아직 추운 날씨임에도 공원에 사람이 참 많았다.

    집으로 도착해서 2주간의 자가격리. 가족들은 나를 위해 다들 근처 호텔로 나갔다. 다행히 귀국 당일 보건소에서 받은 코로나 검사는 음성이 나왔지만 공항에서  면전에 대고 기침했던 항공사 직원을 생각하면 며칠 후에 양성이 나와도 모를 일이라 여겼다. 가지고  캐리어, 옷가지 등을 모두 소독하였지만 안심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14일동안 발열도 없고 기침도 나지 않아 무사히 가족들을 집으로 맞이할  있었다. 나를 대신하여 호텔에 머물렀던 부모님. 부모가 된다는 것은  순간부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책임감을 죽을때까지 안고간다는 것이다. 자식의 안위에 대한 염려로부터 벗어날  없는 운명에 갇히는 것인가 보다.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모든 나라의 경제를 후퇴시키고, 사회적 동물인 인간 본성에도 반하게 하는 이 바이러스는 마치 전쟁같다. 얼굴 절반을 가리고 서로를 믿는 것이 더욱 어려워진다. 새로운 만남은 되도록 피하고 옷은 더욱 간소해지며 생필품 위주의 소비를 하게 만든다. 엥겔지수가 치솟았다. 특히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수퍼마켓과 약국만 문을 여는 비정상적인 국가 전체적 락다운이었다. 서비스업종 대부분은 실업자가 되어버린 이 상태로 3개월이 지나 7월이 되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나름 참 행복했다. 마스크만 쓰면 모든 것이 허용이 되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우리나라가 정말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다시 활동개시하러 런던으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원의 여름방학은 3개월정도인데, 코로나를 핑계로 이 시간을 멍-하니 익숙한 어떤 곳에서만 보내기에는 너무 아깝다. 니체 말이 “내 존재의 가장 큰 결실을 수확하는 비결은 단 하나,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하지 않는가.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의미있게 하면 되는 것이다. 코로나 핑계대지 않고.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하고 있나. 특히 국제 금융과 문화의 중심지인 런던은 어떻게 변하고 있나.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이클레이토스가 했던 말인데, 나의 신조이자 유일한 믿음이기도 하다. 강물은 쉬지않고 흘러가듯이 끊임없는 변화가 진리이다. 살아있는 한, 코로나가 운명이라고 해서 수동적으로 대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운명을 능동적으로 수용하고 내 욕망에 맞게 셋팅하고 싶다. 그래서 난 다시 런던으로 왔다.


*소개하는 글 :

좋은 글은 독특한 매력도 있겠지만 그것이 일기로서 간직할 것이 아니라면 결국 보편성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경험을 한 것은 필자이지만, 그것을 이야기로 풀었을 때 알게 모르게 공감을 일으키고 저와 같은 감정을 독자에게도 느끼게 하고, 더 나아가 그 과정을 통해 일종의 작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글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런던에서 고군분투한 것,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며 지지고 볶았던 것은 필자 자신이지만, 그 감정은 여러분에게 충분히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쓰며 저는 감정을 정리하고 그 어려운 시절에도 빛났던 제 인생 스토리의 한 줄로 남깁니다. 여러분도 저의 글을 통해 동질감을 느끼실 수도, 반감이 드실 수도 있지만 감정의 들쑥날쑥을 통해 일상의 조그마한 재미를 얻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약 15-20 편으로 나누어 연재할 계획입니다. 한마디로 이 글은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런던의 락다운, 그리고 그 해제, 2차 락다운, 그리고 백신의 보급에 따른 일상회복의 굵직한 시간의 흐름속에서 겪었던 혼란과 삶의 변화를 관찰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흐름을 소개하자면, 코로나 시국에 왜 런던에 왔는지, 코로나 직전의 런던 그리고 그 후의 런던의 모습, 1차 락다운 당시의 혼란과 락다운 해제 이후의 점진적 변화(사람의 변화, 관광의 변화, 외식의 변화, 일자리의 변화, 쇼핑의 변화, 연애의 변화, 관계의 변화 등), 2차 락다운 직전의 혼란, 다시 돌아온 락다운과 힘든 시기에 만난 인연, 백신의 보급과 점진적인 일상회복에 따른 사람들의 변화, 한국과의 차이점을 앞으로 글로 풀어내고자 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