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적 수치 트릴로지
수치의 혼란
어느 무더운 여름의 여유로운 주말.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강의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보내는 밤의 시간. 묵묵히 옆을 지키는 맥주 한 잔.
수많은 방문자들이 편의점의 내부에서 흔하게 손을 뻗는 대상은 맥주 한 캔이다. 대략 3,500원 가까이 되는 가격에 ml라는 양의 측면에서는 300 중반대.
한 캔으로 부족하면, 두 캔을 산다. 두 캔의 양이라면, 부족하지 않게 대화를 나누고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니.
두 캔이라고? 그렇다면 두 캔의 가격은 얼마인가? 바로 7,000원이다. 7,000원. 약 700ml에 7,000원. 내 계산이 틀렸다면, 조금 올려서 8,000원.
8,000원으로 보내는 한강과 밤과 대화와 생각. 충분히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이 수치들은 그 정형화된 한강 맥주의 프레임 아래에서 검은 장막으로 덮여있기도 한데.
수많은 캔들의 옆 칸을 살펴보면 놓여있는 하나의 커다란 페트병. 같은 회사 맥주의 페트병. 대략적인 양은 1,6L이며 가격은 7,600원.
어째서 비슷한 가격의 이 상품은, 양적인 측면에서 2배라는 모습을 보이는 것인가?
아, 혼란스럽다. 나는 어째서 지금까지 별 다른 의문을 품지도 않은 채, 하염없이 캔에만 손을 뻗었다는 말인가? 왜 ‘한강 맥주’라는 그 보편적인 한국 사람들의 관념은 손에 쥐어지는 작은 한 캔과 라면 봉지에만 갇히게 되었다는 것인가?
캔, 페트, 유리병. 그 어떤 용기에 담기더라도, 알맹이는 불변하지 않은가?
‘항상 하던 대로’라는 이름 아래에서, 무의식의 습관적 발현이 나로 하여금 수치의 혼란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것은 꽤나 큰 손실을 내게 안겨주었으며, 나는 이러한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풍경에만 안주하였구나! 안주 가격까지 포함하면, 얼마나 더 나는 잃고 있었나.
아아, 나는 잃고 있었다.
수치의 증명
옆에 앉아있는 한 남자가 있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즐기는 모 여인이 떠오르는 회사의 대표 자리를 붙들고 계신데,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라 이 사람의 습관성 발언에 담긴 것이다.
‘수치의 증명’.
생각보다 상대방은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다. 대충 듣고 흘러 넘긴다는 것이지. 마치 소 귀에 경 읽기처럼 내가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어필하는 발언들을 이어나간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정 키워드나 본인의 관심 포인트 이외에는 나의 말에 귓구멍을 활짝 열어젖힐 이유가 부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나만의 가치와 스토리는, 인간의 소리가 왕복할 터널의 확장 공사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는 있겠다만, 결국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무엇인가? 무엇이 증명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남자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데이터’를 통한 증명이다. 아하! 즉 수치로 환산되는 어떤 축적된 데이터들의 결괏값이구나. 과정과 역사가 보이는 수치적 변화가 있어야 하겠구나! 단순히 말로만 쉴 새 없이 떠드는 행위는, 환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라는 한계로 인해 앞에 앉아있는 소를 인간으로 바꿀 수 없다. 결국 나 또한 우직한 소에 불과하게 되겠다.
흠, 1819에서만 항상 그치던 나에게 20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수치의 극복
지금 생각을 해보아도, 참으로 수치스러웠던 하루였다. 분명히 호스트란 직위를 지니고 있던 우리였는데. 일일 게스트로 초대받아 우리와 함께하게 된 이들이 안겨준 수치였다.
시작은 당황. 방문자들의 입장에서, 시간 엄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일부 호스트들에 대한 당황과 소통의 부재가 빚어낸 당황이 있었고, 마찬가지로 소통의 부재와 급박함이 촉발한 호스트들 내부에서의 당황이 있었다. 그렇다. 모두가 당황하였다.
다음은, 메커니즘의 부재. 앞서 언급한 당황스러운 상황의 이유는 체계가 부실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경험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심지어 그 경험은 내가 메꿔주는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이벤트를 어떻게 진행시켜야 하는지와 참가하는 방문자들에 대한 안내 및 상황 대처 방법을 몰랐다. 매뉴얼도 인지하지 못하고, 진행 능력도 부실하였으며, 사실 애초에 부실을 넘어서 체계 자체가 전무하였으니 결국 문제가 발생하였다.
부재는 당황을 변화시켰다.
점차 불신으로 바뀌어가는 그들의 상황은 한숨으로 공기 중에 나타났다. 찡그린 눈썹은 어느새 둥근 형태를 띠게 되었으며,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한 모습들이 곳곳에서 연출되었다.
어떤 호스트는 그러한 방문자 무리에 찾아가, 웃음을 선사한다. 본인들의 부족함과 문제를 언급한다.
어떤 호스트는, 다른 호스트에게 오더를 부탁한다. 다 같은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는 주체들임에도 말이다.
곳곳에서 분노와 다툼의 불길도 조금씩 일어난다. 이후 번져감에 따라 전체의 분위기는 끊임없이 아래층을 향한 계단을 걷는다. 남는 것은 수치심이다.
사실 수치의 극복이라고 이야기를 하긴 하였다만, 엄연히 이것은 실패의 기록이다.
개인의 체계가 아닌 조직의 체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나 강했기에, 그 욕망의 발현을 미친 듯이 이어나가고자 한 시간이 곧 2년이 된다. 그 욕망을 삐뚤어졌다 표하거나, 전혀 공감하지 못하거나, 애초에 애정이 상실된 상태의 구성원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그 어떤 목표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최근, 몇몇의 주도적인 구성원들이 리뉴얼에 대한 원대한 꿈을 품었다. 어느 정도 성사된 부분이 생겼고 이는 참으로 내게도 기쁜 일이다. 표현 방식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라 인정한다. 허나 내가 이야기하고 설득을 반복했음에도 실패하고 부정당한 방식과 스텝들이, 그대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시행되고 박수받는 일을 보는 것은 기쁘면서도 동시에 씁쓸하기도 하다. 물론 여전히 문제점이 많고, 그 문제의 발현을 통한 현실에서의 부정적 결과는 위에 언급한 사례가 그러하다.
어쨌든, 나는 극복하였다. 조금 전 실패의 기록이라 말한 것을 잊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실패의 기록이 맞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극복하였다. 어떻게 하였냐고?
우선, 나 자신에 집중하였다. 나 자신의 체계를 갈고닦는 일부터 시작하여 더욱 섬세함을 스스로에게 요구하기로 하였고, 충분히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즉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이후에는, 명예에 워낙 관심이 없는 나였기에, 조직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감사하였다.
마지막으로는 마음을 비웠다. 너무나도 뜨거운 열정이 쏟아지는 것은, 오히려 그 그릇을 해치거나 나의 시선을 좁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시선을 떼고, 한강을 바라보며 맥주 한 잔을 기울이거나 벗과의 대화로 내 감정을 채우는 시간도 다시 가져보게 되었다.
넓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이 기분을 가지고 다시 생각을 돌려보면, 참으로 웃기다 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아직 극복하지 못한 사람일 수도 있고, 너무나 부족함에 따라 더욱 스스로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실패의 기록이 아닌, 성공의 기록에서의 도입부를 지나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현재의 나로서는, 일단락된 작은 과정의 라벨을 극복이라고 칭하고 싶은 소소한 마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