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의 변혁을 시도하는, 꿈을 꾸게 해준 책
글을 잘 쓰기 위한 방법으로써 한 챕터를 읽은 후 멈추고 각 챕터별로 500자 이상의 후기를 쓰라는 정여울작가의 조언을 바탕으로 이 짧은 책에 대한 후기를 길게 써보려 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는 것은 '완독한 책의 권수가 얼마나 많은 가'가 아니라 '책에서 의미있는 내용을 얼마나 크게 그리고 얼마나 자주 얻었는 가' 일 것이다. 이런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된 건 최재천교수님의 <희망수업>이다. 수 십번을 퇴고하면 더 좋은 글이 나온다.
"나의 문장들은 너무나도 거칠고 질이 낮아서 어디다 내놓기가 부끄럽다. 브런치 작가 승인이 나면 발행글은 10번 이상 퇴고하는 습관을 갖도록 하자."라는 다짐을 며칠 전에 했었다. 오늘 브런치 작가 승인이 나서 첫 글로 올리는 독서후기다. 10번 이상 퇴고를 하지는 못했지만 다시 읽으며 문장을 조금 더 다듬어 발행하는 글이다.
아무도 발을 디딘 적 없는 자유의 땅에 대한 상상은 범죄자를 재판장으로 호송하는 단조로운 여정을 멈추게 하고, 동시에 경찰과 유랑자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꿈 또한 현실이다. 꿈이란 어떤 상황, 즉 어떤 세계가 출현하며 그로 인해 인간의 의식 속에 그려지는 상상의 풍경과 일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랑자가 말을 이어갈 때, 그 말은 자유의 나라를 현실처럼 느끼게 한다. 경찰의 본래 임무는 명령에 따르고 사람들을 구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조차 유랑자의 꿈을 좇기 시작한다. 그들은 결코 경험하지 못했을, 어쩌면 먼 선조들 혹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전해졌을 법한 장면들을 상상한다. 광활한 스텝 지역의 자유로운 대지, 넓은 강, 그리고 높이 솟은 전나무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자유인의 삶이 그것이다.
유랑자가 허구로 만들어낸 자유의 나라에 대한 꿈이 깊어질수록 여정의 의미와 인물들의 역할은 점차 희미해져간다. 유랑자가 만들어낸 꿈의 세계는 경찰이 책임져야 하는 냉혹한 현실과 부딪힌다. 이제 두 경찰 중 한 명이 나서서 그의 입을 막고, 범죄자를 재판 장소로 호송하는 단조로운 여정을 되찾아야 한다. 이 허구의 시간을 끝내는 임무는 자연스레 키가 크고 마른 경찰에게 맡겨진다. 즉, 이 경찰은 유랑자가 여정의 목적과 자신의 쇠약해진 몸 상태를 냉정히 직시하도록 만든다. 짧은 여정조차 버텨내지 못하는 유랑자는 이미 병든 자이며,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시베리아에 다다르기도 전에 탈진하여 죽을 운명이다. 질서로의 복귀라는 단호한 명령과 함께 자유의 나라에 대한 환상은 세 사람의 머릿속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서까지 자유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랑자가 다가오는 법적 절차를 떠올릴 때, 경찰들은 여전히 깊은 사색에 잠겨 있다. "그들은 어쩌면 신만이 그릴 수 있는, 자유의 나라와 그들 사이에 놓인 아득히 먼 거리를 상상으로 가늠하려 애쓰고 있다."-12~13페이지 인용
등장인물들이 여정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이 작품에는 결말이 없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여정의 끝에 이르지 못했고, 독자는 유랑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체호프 단편소설들의 일관된 특징이다. -14페이지 인용
여행가라면 당연히 두 사람의 경찰이 한 유랑자를 도시로 호송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체호프의 <꿈>을 읽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도서관에서 체호프의 책을 집어 들게 된 건 유튜브의 <일당백:일생 동안 당신이 반드시 읽어야 할 백 권의 책>에서 다뤘기 때문이다. 요즘의 나에게 <일당백>이 미치는 영향은 크다. <일당백>을 들으면서 작품을 깊게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크게 깨닫는다. 정박님의 깊은 지식과 성찰 능력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리라.
체호프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주홍글씨'의 작가인 줄 알았다. 왜 호손과 체홉이라는 이름이 헷갈린 거지?
나도 알 수 없다. <일당백>을 통해서야 안톤 체호프가 함축적인 글을 쓰는 고도의 작가임을 알게 되었다.
1장만 읽어 보아도 그런 기운이 팍팍 느껴지지 않는가. 이 책을 쓴 자크 랑시에르가 높은 수준의 작가이기 때문에 체호프의 <꿈>이라는 단편이 더 위대해 보이는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랑시에가 택한 체호프니까 인정해보자. 체호프의 단편소설들부터 읽고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건 아닌지.. 일단 집었으니 읽고 어려우면 다시 읽고 더 많이 읽어보기로 하자.
여행에 관한 기록들을 남겨보고자 결의를 하고 '유랑자'를 여행자로 대입하여 읽는다. 여행과 꿈은 아주 가까운 근접어다. '유랑자가 떠들어 대는 허구'에 물들어 가는 경찰들에게 서글픔을 느끼며.. 막상 체호프의 소설로 읽으면 어떤 감상을 남기게 될 지 궁금해진다.
(김주환교수님이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각'이라는 단어를 아무데나 쓴다는 말이 '기억 나' 무심코 '생각'이라는 단어로 메꿔지던 문장들을 한 번 더 '생각(아니 고심)'하며 천천히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도덕적 원칙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 원칙들은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일 수 있다. 첫째,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자유 자체가 두려움을 야기하고 있다. -19페이지 인용
예속 상태는 단순히 공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동일한 상황에 대중이 순응하는 것이다. 이는 복종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 상황 외에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20페이지 인용
스타벅스에서 2장 "예속의 속삭임"을 다시 읽었다. 3일 전 치과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건성으로 읽으면서도 위에 인용한 대목이 인상적이었기에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책에 몰입하고 싶은데 옆자리의 남자가 너무 큰 소리로 전화통화를 한다. 같은 목소리의 크기라도 누군가의 말은 백색소음으로 그냥 통과되는데 누군가의 억양은 지속적으로 귀를 괴롭힌다. 그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약간의 짜증을 내다가 이곳은 도서관이 아니라 스타벅스라는 걸 떠올린다. 아차차!!! 내 마음가짐이 잘못되었구나(여기서도 '생각'이라는 단어를 쓸 뻔 했다).
이제 2장에 대한 후기를 간단하게라도 써보자.
블로그의 글쓰기는 남이 읽는다는 것을 의식하였고, 나의 신분이 어느정도 노출되었기에 거짓없이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이웃님처럼 누가 읽든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면 좋으련만 스스로 설정한 '사회적 지위의 체면'에 예속되어 있기에 아는 사람이 읽었을 때의 '심정'을 더 중요하게 고려하며 포스팅을 했다. 그러니 '거짓을 말하지 않고, 자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글'을 쓸 확률이 적었다.
브런치의 카테고리를 나누고자 주제를 몇 가지 들어가면서 여전히 '내가 노출될 위험'을 두려워 한다. 나는 어쩌다 이런 두려움을 갖게 된 걸까? 브런치까지 글을 읽으러 오는 이 중에서 내가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거나 아예 한 명도 없을 수 있을 것이요, 설령 나를 아는 사람이 글을 읽는다 해도 나와 매치시키기가 쉽지 않을 것이요, 나와 매치를 시키더라도 그들이 내 글을 기억 속에 담아둘리는 일만 분의 일도 안될 터이건만... 어쩌다 스스로 '막연한 지인에 대한 예속감'을 갖게 되었는 지 안타깝다.
'예속'이라는 단어를 네이버에서 찾아보았다. "남의 지배나 지휘 아래 매임". 자초하여 매여있는 나를 불쌍히 여기며 부디 '불특정 지인 예속감'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기를 바란다. 2장 "예속의 속삭임"에서는 아주 오래 전에 보았던 베스트극장 <곰스크로 가는 기차>가 떠올랐다(역시 '생각났다'라는 단어를 바꾸기 위해 잠시 멈췄다). 라프체프의 예속이 곰스크의 주인공과 닮았다고 느끼기(??아니 인식했기??.. 적확한 어휘를 사용하는 게 이렇게나 어려운 일일 줄이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 작품을 읽지 않아서 제대로 이해했는 지는 확신할 수 없다.
작가는 독자가 시간을 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서서, 시간이 멈춘 순간을 포착해 보여주어야 한다.
단편소설이 고골에게 감각적 세계를 펼치는 시간이었다면, 체호프에게는 어떤 장소에서 우연히 멈춰 서는 순간이다. 독자는 이곳에서 한 사람의 명확한 현재가 시간의 무심함과 맞서는 특별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이처럼 거처를 간절히 찾던 길 잃은 여행자는 철도 건설 현장에서 불면에 시달리던 엔지니어의 따스한 환대를 받는다. -31페이지 인용
의사 라긴은 사회 자체가 병들었기에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환자 그로모프는 건강과 질병, 자유와 감금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이 두 인물은 병원의 내부와 외부, 즉 병원과 그것이 단순히 반영하고 있는 예속된 사회 간의 완전한 가역성을 증언하고 있다. -40페이지 인용
나는 '감각적인' 여행기를 쓰는 편이다. 실제로 쓰고 싶은 건 내가 방문한 여행지에 독자도 함께 서 있게 하는 것인데 쓰기 능력이 부족하니 감각이라도 최대치로 쏟아내고 싶어 하는 듯 하다(나도 나를 잘 모르므로 아직은 추측으로 쓴다). 가끔 탁월한 문장가를 만날 때면 열등감은 극에 달한다. 생생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완벽하게 나를 그 장소, 그 순간에 데려다 놓는 문장이라니!! 나도 그렇게 쓰고 싶다. 간절히!!!!
의사 라긴과 그로모프는 현재의 직장에 계속 불만을 갖고 있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고 상황을 합리화하며 월급쟁이로서의 기한을 연장하려는 나를 다 반영하고 있어 가슴에 칼날의 서늘함이 지나갔다. 라긴과 그로모프가 나를 얼마나 대변하고 있는 지는 체호프의 소설로 읽어 보아야겠지만 이 책의 저자인 랑시에르의 설명으로 갖게되는 성찰이다.
키소치카가 예감한 "자기 삶의 완벽한 혁명"은 체호프의 작품에서 자주 나타나는, 예속된 기간에 균열을 내며, 먼 곳에 있는 다른 삶의 가능성을 암시하는 섬광과 같은 순간 중 하나다. 이러한 순간들은 다양한 상황과 여러 등장인물에게서 불쑥 나타난다. 예를 들어 <꿈>에서 경찰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망각한 채 시베리아의 광활한 자유로운 공간을 유랑자와 함께 바라본다.-48페이지 인용
다른 삶이란 단순히 사회적 지위의 급격한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예속 상태에 안주하려는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일탈이다. 이러한 부름은 술에 빠진 농민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이나 존경받는 교수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저 반복되는 시간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그것은 각자에게 단 한번만 주어지는 개인적인 삶이다. 이 무언가는 삶의 강렬함과 깊이 관계있다. 그 강렬함은 순간적일 수도, 지속되는 것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고통을 가져오기도 하고, 고통에서 해방시켜주기도 한다. 이는 개인적 야망의 충족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의 "단조로운 감각"을 넘어서는 것이며, 단순히 그러한 행복에 안주하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내면의 노력이다. -50~51페이지 인용
이 챕터에서는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혁명 시기의 러시아에 분 '새로운 여명'이나 '급격한 변화'에 대한 열망과는 다르게 온전히 나 개인의 관점에서 감상하고자 하였다. 나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변화에 대한 갈망'이 주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현실에 안주하기가 어렵다. 20대 초반 안정적인 회사를 3년 정도 다니다가 오직 지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3년 이상 빚더미에 앉을 때까지 의미없는 방황을 했고, 20대 후반에 다시 안정을 찾아 일은 편하면서도 복지에는 관대한 중소기업에 취직을 했다가 2년 정도만 버티고 또 벌판에 나와 가난한 생활을 했다. 20대와 30대를 격랑 속에서 보내고서도 아직도 나의 인생에 '진짜 강렬함'이 온 것 같지 않다. 공부에 빠져 있던 10년 넘는 시간이나 여행에 빠져 떠돌아 다녔던 시간들이 제법 강렬하긴 했으나 그것들을 다듬어 더 강렬한 것으로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한계를 비관하기도 하고.. 어쩌면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있기에 공부와 여행에 딱 그만큼만 빠져 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직도 나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며 설령 고통이 따르더라도 진짜 '삶의 강렬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짜릿하게 전율을 일으키는 무언가를 만나고 싶다.
젊은 남자의 유치한 장난은 계속되고, 젊은 여자의 눈앞에 "화려하고 다채로우며 매력적인" 삶이 펼쳐질 것 같은 이 광기 어린 순간 이후, 결국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간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휴가는 휴가일 뿐이고, 휴가 친구도 그저 휴가 친구일 뿐이다. 젊은 귀족 여인과 사교 모임에서 어색해하던 판사 사이에는 다시금 사회적 차이의 벽이 굳건히 자리 잡는다. 시간이 흘러, 이제 나이 든 여인은 잃어버린 삶에 대한 깊은 회한에 잠긴다. 그녀는 끝까지 사회적 장벽을 지킨 자신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그 장벽을 넘지 못한 몹시 소심했던 연인을 탓해야 할 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된 잘못은 어쩌면 일상의 흐름과 단절되지 못한 것, 그리고 여름 저녁의 빗방울과 베인 건초의 향기가 전하는 순간적인 부름에 응답하지 못한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겁쟁이들은 파렴치한 자들처럼 새로운 삶에 대해 미리 절망한다. -69페이지 인용
"순간의 힘". 대학시절 4주간 미국으로 짧은 어학연수를 갔었다. 룸메이트는 외국 유학생과 폭풍같은 사랑에 빠져 연수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내 눈물을 흘렸고, 나는 연수 말미에 함께 갔던 선배와 장난같은 유희에 빠져 부끄러움을 잊었다. 룸메이트는 그 순간을 자신의 잊을 수 없는 청춘의 한자락으로 추억하며 살고 있고, 나는 수치심에 기억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같은 사건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나는 설령 슬픔에 몸이 절여지고, 수치심에 몸서리를 칠 지라도 '순간의 힘'에 자신을 내맡기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 젊을수록 더더욱!!! 100년 인생의 반을 넘고 보니 불법이나 범법, 또는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행위가 아니라면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화려하고 다채롭고 매력적인" 일에는 거침없이 뛰어들라고 주문하고 싶다. 그 이유는 일생동안 그런 "특별한 순간"은 별로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나처럼 후회를 하게 되더라도 새로운 삶에 대해 미리 절망하지 말고 용자가 되어 과감하게 자신을 던져 보자. 남은 인생에 "특별한 순간"이 단 한 번이라도 더 남아 있기나 하겠는가?
작품 속 슬픔의 눈물이 기쁨의 눈물로 흐르게 하려면, 글은 음악이 되어야 한다. -80페이지 인용
불행을 노래로 표현하고 고통의 눈물을 기쁨의 눈물로 바꾸는 것은 많은 비관적인 평론가에게 불행을 미화하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이것이 불행의 원인을 밝히고 해결책을 찾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체호프는 이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다. 불행의 근본 원인은 예속에 있으며, 그 예속의 원인은 다름 아닌 그 자체에 내재해 있다. 예속은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이의 행동, 감정, 사고방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며, 그로 인해 스스로를 영속화한다. 이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삶의 부름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각하고 느끼는 방식의 변혁이 필요하다. 이런 정서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 바로 작가의 임무다. 이를 위해 그는 불행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조율하며, 그것을 멀리서 들려오는 부름의 음조와 섞어야 한다. 작가는 예속의 단조로운 반복에 맞서, 그보다 인간의 감각적 경험 속으로 더 깊이 스며드는 선율적 흐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81페이지 인용
인용한 이 문장들이야말로 '금과옥조'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의 나에게 어떤 위로보다도 큰 힘을 준 대목이다. 6장 "서사 속의 음악"에서는 길게 썰을 풀수록 허접스러워질 터이니 후기는 이 정도로 하고 실천을 제대로 하자.
작가로서 나는 민중의 고통, 미래, 과학, 인권 등을 논하는 것이 나의 책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것을 글로 써내려가고, 급히 펜을 움직인다. 그러면 사람들은 분노하며 사방에서 나를 비난하고, 나는 마치 사냥개들에게 쫓기는 여우처럼 허둥댄다. (...) 결국 내가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것은 풍경뿐임을 깨닫는다. -체호프의 <갈매기>에서, 87페이지 인용
체호프는 민중의 고통과 비참함을 새벽빛이나 석양빛이 자아내는 효과, 환상적인 구름, 잔물결 위로 부서지는 빛, 발밑에서 사각거리는 낙엽, 갈대숲에서 울려 퍼지는 새소리 등 자연의 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전체적인 풍경 속에 묘사하고자 했다.
그가 새로운 방식으로 집필한 첫 중편소설인 <스텝>의 이야기의 전개는 풍경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 작품은 여행을 주제로 삼아, 작은 지방 도시에서 출발한 상인 쿠즈미초프가 양모를 팔고, 그의 조카 예고루시카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 또 다른 작은 도시로 향하는 여정을 담고 있다. -88페이지 인용
모든 것이 마치 여정의 공간 자체가 이야기의 무대를 지워버리는 듯 보인다. 남아 잇는 것은 아이를 바라지 않는 목적지로 이끄는 하나의 단조로운 직선일 뿐이며, 그 앞을 스쳐지나가는 풍경은 그를 기다리지도, 누구를 환영하지도 않고, 어떤 행위에도 냉담하다. 사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여행자들이 스쳐 지나가는 멈춰 있는 세계에 대해, 비평가들이 화자의 결점이라 여기는 무심함을 계속해서 드러낸다.-89페이지 인용
태양 아래 존재하는 모든 것의 고통으로서, 고통의 구원으로서 풍경은 스스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고통은 모두를 하나로 묶는 노래로 변형되며, 사람들은 그 노래 속에서 고통이 아닌 "아름다움의 승리, 젊음, 힘의 만개, 살고자 하는 열정적인 갈증"을 느낀다. 그런데 이 승리는 그저 헛되이 자신을 드러내고, 그 풍요로움을 누구도 누리지 못하며, 그 노래를 이어갈 사람도 없다는 느낌으로 인해 빛을 잃는다. -92~93페이지 인용
고통과 위로의 노래로 거듭난 "무심한" 풍경은 이러한 "고통"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어조를 제시한다. 이는 감상적 호기심과 선전적 웅변의 극단을 벗어나 균형 잡힌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감각적 사건을 경험하는 이 여정은 그 어조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93페이지 인용
작가는 미래를 위해 교훈을 설파하는 사상가가 아니고, 영원을 기약하며 문장을 대리석에 새기는 고독한 존재도 아니다. 그는 이제 이름 없는 노래가 되어, 매 순간 현재의 삶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사람들과 함께하는 존재다.-97~98페이지 인용
나는 아직 작가라고 내세울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필요에 의해 비판적인 글쓰기를 할 때에는 자칫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섣부른 결론에 의해 대상을 공격하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연과 여행에 대하여 글을 쓰는 걸 마음 편하게 느끼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단순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도 표현력이 부족해 답답하기만 한데 체호프는 민중의 고통과 비참함을 풍경으로 담아낸다니 얼마나 대단한가. 이 책을 읽을수록 체호프가 쓴 여행에 관한 단편들을 하루 빨리 읽어보고 싶어진다. 나는 랑시에르와 다르게, 어떻게 읽어 갈 것인가.
과한 묘사보다는 '무심'해 보이는 글들에서 고수의 기운을 느낀다. 여행 중에 만나게 되는 풍경들은 사실 풍경 자체가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는 걸 알고 있다. 여행지의 모든 사물은 여행자들의 시선에 의해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그럼에도 굳이 여행 중에 만나는 모든 풍경은 제각각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믿게 된다. 여행을 기록하는 작가로서 "현재의 삶이 더 아름다워지도록 사람들과 함께 하는 존재"로서의 역할은 무엇일까.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깊은 고민들을 해 나가야 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적대감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자기 삶에서 부족함을 더 진솔하고 조화롭게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일깨우는 작품은 거칠지만 위로를 주는 해오라기의 노래처럼, 사람들에게 두 번의 눈물을 흘리게 한다. 한 번은 부끄러움으로, 또 한 번은 그에 따른 위로로 말이다. 이로써 그들의 불행을 더 긍정적인 방식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104페이지 인용
사소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해 인물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킬 듯하지만, 결국 그 누구에게도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지나가고 만다. 이는 작품 속 "장면들"과 작은 에피소드들이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형성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체호프의 많은 단편소설은 이런 구성을 따른다.-106페이지 인용
다시 말하지만, 예속 상태는 그 자체가 유일한 원인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선할 수 있는 비참한 삶의 유일한 책임자다. 그들은 매 순간 시간과 관련하여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모든 것이 흘러간다'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흘러가지 않고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이다. 이는 일상의 흐름을 따를지, 아니면 새로운 삶의 부름에 응답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다. 체호프의 작품이 다루는 핵심은 바로 이러한 윤리적 선택이다. 그의 이야기 형식은 필연적인 연결 없이 독립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의 순간은 서로 대체 가능하다. 등장인물들이 그저 한 걸음 내딛는 선택만으로도 그들의 삶은 변할 수 있다. -109~110페이지 인용
'줄거리'는 없어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주제'다. 그에게 주제란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압축된 작은 순간이다. 그 순간에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집중하며, 예속의 숨결을 느끼거나 다른 삶에 대한 부름을 감지하게 된다. 체호프가 포착해 그려내는 것은 바로 인물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그들이 느끼는 감각이다. 이러한 묘사 방식이 그의 작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한다. 체호프는 등장인물들이 사는 집안 환경이나 가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감각을 깊이 있는 분위기로 담아내며, 동틀 무렵의 빛이나 저무는 햇살, 하늘을 가로지르는 구름, 멀리서 들려오는 노래, 낮의 한순간, 혹은 밤중에 울리는 종소리와 같은 자연의 장면들로 표현한다. 이런 작은 장면들은 겉보기엔 불균형할 수 있으나, 그 안에는 사회와 시대, 그리고 삶의 방식을 응축한 하나의 총체적 현실이 담겨 있다. -111~112페이지 인용
나도 직장에 적대감을 갖고 살아간다. 제대로 해 놓은 것도 없이 잘난 척만 하며 산다. 나처럼 혜안을 갖고 있으면서 조직에 도움이 되는 특별한 존재의 의견을 무시하는 직장이라는 불만이 가득하다. 직장에 딱히 이루어 놓은 업적도 없으면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나는 무슨 배짱인지. 글을 쓰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부끄러움이 엄습한다.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의 성찰을 통해 조금 더 해보라는 위로를 얻게 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개선할 수 있는 비참한 삶의 유일한 책임자다."가슴에 새길 문장이다. 삶을 개선하고 싶어 작심삼일을 계속 하고 있지만 작심의 의욕을 불태운 다음 날 아침이면 다시 새가슴이 되어 있다. '사소한 사건들'이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고 지나가지 않도록 깨어 있는 눈으로 사소한 것들을 포착하고 나를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이는 글쓰기를 하는 목적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예전에 직장 선배와 소설을 읽을 때 '메시지'가 중요한 가, '줄거리'가 중요한 가에 대하여 논쟁을 한 적이 있었다. 선배는 메시지를 강조했고 나는 줄거리를 강조했다. 하지만 둘의 결론은 같았다. 줄거리 속에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잘 녹여내는 작품이 훌륭하다는 것! 랑시에르가 분석하는 체호프의 묘사 방식이 참으로 멋지다.
9. 시작도 끝도 없이
거짓을 피하는 것, 이는 글쓰기가 자유로운 거리를 유지하는 절대적 조건이다. 그러나 문학에서의 거짓은 서술된 사건들의 진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거짓은 사건들이 서로 이어지는 방식에 있으며, 또한 그것을 연결하는 시간의 본질과도 깊이 관련 있다. 시간에 대한 가장 큰 왜곡은 시간의 흐름을 필연성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왜곡은 특히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지점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만약 이야기가 사회적 또는 심리적 결정론을 바탕으로 인물의 행동을 설명하며 그들의 행위를 인과적으로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면, 그 시작은 진실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행위가 종결되고 더 이상 새로움이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결말 또한 진실하지 않다. -117페이지 인용
작가가 특별한 점은 이 자유에 측정할 수 없는 시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재생산의 냉혹한 기계에 의해 움직이는 시간이지만, 일시적인 중단과 예기치 않은 멈춤 속에서 분열되고, 미래에 다가올 자유에 대한 예감을 담은 시간으로 이중화된다. 이 자유의 시간은 완전한 종결을 거부하며 여전히 유예된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이를 문학의 정치라 부를 수 있다. -124~125페이지 인용
시작 부분에서 강조한 것과 마찬가지로 "거짓없이 자유로운 글을 써야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 내가 써야 할 글들에 시간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잠시 고민을 했다. 앞으로 여러 글을 쓰면서 많은 고심을 하겠지만 좋은 글을 쓰는 조건들을 조금씩 배워 나가고 있는 듯 하여 이 책의 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체호프의 단편소설들을 읽고 나면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많은 이해의 오류를 저질렀는지 깨닫게 되겠지만 현재로서는 랑시에르가 체호프의 작품 부분들을 인용하여 해설해 준 내용들로 가슴이 벅차다. 불과 140여 페이지 안에서 이토록 많은 '생각거리'를 주다니!! 하루 1권 읽기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좋은 책은 아무리 느리더라도 질겅질겅 씹어 먹으면서 읽어야겠다.
어제와 오늘 뿌듯한 독서의 시간이었고 책과의 대화는 행복했다.
랑시에르는 주로 정치와 미학의 관계에 관심을 두며 민주주의와 평등의 급진적인 가능성을 성찰하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이다. 그의 국가 박사학위 논문인 <프롤레타리아의 밤>에서 그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의 일기, 편기, 저널 등을 분석하며, 노동자들이 단순히 착취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사고하고 표현하며 다른 세상을 꿈꾸는 주체임을 밝혀낸다. -옮긴이의 말(유재홍)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