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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부인의 경련

2019년 8월 27일 일기

2019년 8월 27일에 작성한 일기.

여러 일기 중 과거에 쓴 것은,

가장 올리기 싫은 것을 골라 올려보기로 했다.


2-3년 지난 일기를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째서 이렇게 진지한 자세로 ㅋㅋㅋ 모든 것을 통달한 사람처럼 적어두었는지

정말로 한 대 쥐어박고 싶어진다.

게다가 이 일기는 다시 봐도 그때의 상황과 감정이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반성을 했는지, 19년 8월 27일의 나만 알고 있다. ㅋㅋㅋ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한 문장 한 문장마다 되도 않는 깨달음을 집어넣어 두었다는 것에

소름이 끼친다. 으악!

2019년에 나는 중2병을 뒤늦게 맞이했던가 보다.


그래도, 가장 보여주기 싫은 글을 보여주는 것이 나에게 좋은 연습이 되기를 바라며,

2년 전 여름의 일기를 이곳에 남겨보자.



2019.08.27


어제 술을 아주 많이 마셨다

난 술 먹고 실수하는 걸 유난히 괴로워한다.

심할 때에는 몇날 며칠씩 괴로워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술 먹고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술 먹었을 때 종종 마주하게 되는 내 본성 때문이다.


어제 술을 아주 많이 마신 나는

화를 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존나 싫다면서

욕도 아주 많이 했다.

나는 욕하는 내 모습이 아주 싫기 때문에

평소에는 욕을 안 하려고 무진 애를 쓴다.

근데 술을 마시면 한다.

사실 하고 싶기 때문.

하루종일 웃고 있는 나 때문에 화가 났었다.

사실 어느 시점부터 머리가 엄청나게 아파왔는데

나는 사실 남이 보기엔 오히려 불편해지는,

되도 않는 가식을 떨어댔다.

그러나 뭐든지 억지로 떠는 것에는 경련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쩌면 술을 먹은 김에 옳타쿠나 하고

본성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정말 누가 봐도 한 치의 이견없이 병신같은 자세로

나는 병신이 아님을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너도 병신인지 아닌지를 내 앞에서 증명해보라는 듯

욕과 억지를 쏟아냈다.


나는 이런 인간이다

남들이 싫어할 만한 내 본성을 꺼내는 건 두렵고,

그렇다고 끝까지 다른 이의 것을 참아줄 인내심도 없는 인간.


오늘 나의 이런 면을 다시 확인했다는 생각에

나는 속이 상했다.

내가 속이 빈

대나무 죽부인이 된 것 같았다

조금만 세게 밟으면 바로 부서져내리는 허튼 인간임을

마주해야 하는 게 너무도 괴로웠다.


아마도 이 괴로움이 가시기 전까지는

즐거운 술자리를 가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누군가의 나쁜점이 나에게 상처나 스트레스로 다가올 것 같으면

철저히 만날 기회를 원천봉쇄한다.

그게 타인이든 나 자신이든.

이런 인간이

혼자가 되어 남겨진 자리에서 견디는 인간의 모습

에 대해 쓰고 싶다니 어불성설이다.

나는 누구도 기다려 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 따위는 쓸 수가 없는 인간인 것이었다!

왜 내가 제대로 된 걸 못 쓰는지에 대한 해답은

결국 내 가장 깊은 본성 안에 있었던 것이다.


좋은 인간이 되자.

그게 어렵다면 덜 나쁜 인간,

그것도 어렵다면

나쁜 게 많지만 좋은 점도 있기는 한 인간이라도 되자.


이것이 달성되지 않는다면

어떤 걸 만들어도 의미가 없을 것이다.

본성을 가다듬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가 없다.

건강한 인간이 꼭 되고 싶다.



by han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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