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단속

2021년 5월 29일 일기

2021.05.29


주전자가 끓고 있다.

무엇하나 대단스러워보이는 구석이 없는 투박한 쇠주전자다.

주전자는 조용히 치직,치직 하는 소리를 낸다.

아주 가까이서 구태여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이상 잘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고 불규칙적으로만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이 끓을 준비를 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갑자기 몸을 덜컹거리며 쐐애액 하는 소리를 내뿜을 때에야

주전자가 끓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덜그덕거리는 쇠주전자는

나의 목과 명치 사이 어딘가에 걸려있다가 가끔 예고도 없이

쐐애액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절절 끓기 시작한다.


이따금씩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쇠주전자 안에는

대체 무엇이 끓고 있는 것일까.

들여다보고 싶기도, 그저 그대로 두고 싶기도 한 마음을 한켠으로 미뤄두고

희망적인 상상에도 빠져본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향긋한 것들을 떠올려본다.

마시면 몸이 따듯해지는 것들.


현미녹차, 보이차, 귤피차, 자몽차, 유자차, 캐모마일.....


이러한 것들이 들어있다면

나처럼 속절없이 절절 끓기만 하며 무기력하게 뒤척이는 사람들에게

한 잔씩이라도 따라줄 수 있을 텐데.

이미 끓고 있는 쇠주전자에 얼음물을 부어버리면 뿌연 김이 생겨 앞이 안 보일 테니,

일단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다음,

가스불을 꺼서 주전자가 혼자 천천히 식혀질 수 있도록 시간을 주라고,

그리고 우리는 차를 마시며 잠시 기다리면 된다고, 말해줄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내 주전자가 본래의 은색을 잃고

벌겋게 달아올라 있을 때

기꺼이 맨손으로 들어 올려 식혀주는 이 사람에게도

기분 좋은 걸 줄 수가 있을 텐데.


이런저런 즐거운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주전자의 주둥이에서는 끓을대로 끓어오른 액체가 조금씩 튀어나오고 있다.

이럴 때 바로 잔에 따르면

가끔은 잔이 깨지거나, 쪼그라들기도 한다.

불을 끄고 조금 뜸을 들인 후,

손과 발에 뜨거운 물방울이 튀지 않도록 조심하며

컵에 조금씩, 천천히 따라야 한다.


불을 끄기 전에, 잔을 골라본다.

어떤 것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어울리는 잔을 찾는 것도 꽤나 어렵다.


중지 손가락 끝으로 잔들을 쓸어보며 생각한다.

안에 구정물이 들어있더라도 다 쏟아내면 그만이라고.

쏟아낸 후, 퐁퐁과 수세미로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닦아내고

깨끗한 새 물을 부어 끓이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해본다.


잔은 그냥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로 고르기로 한다.

자몽차는 어느 컵에 따라 마셔도 맛있다.

가장 좋아하는 컵에 담긴 차는 내 혀에 만족스럽다.

그걸로 됐다.


이제 불을 끄자.



by hans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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