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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묶음

220215 일기

1.

올해 들어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가서 배우고, 나머지 시간들은 여러 책이나 유튜브도 찾아보며

혼자 그린다. 공방에 가서 배우는 날에는 실수를 마음껏 해도 돼서 좋다.

실수를 편하게 저지를 수 있다는 건, 좀 더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잘못 그렸을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전에는 그림 그리는 걸 싫어했다.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그림이 그려져 있는 네모 모양 종이를

종합장 왼쪽 위에 붙이고 똑같이 따라 그리는 연습을 매일 아침마다 했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고, 선생님이 시켜서였다.

그렇게 그림을 다 그리고 나면 앞에 나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나는 자주 손목을 맞았다.

이유는

잘 못 그려서.


그 이후로 잘 못 그리는 게 무서워졌다.

근처에 새로운 초등학교가 생기며 주소지상 그쪽이 더 가까웠던 나와

여러 명의 학생들은 새로운 초등학교로 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선 아침 그림 그리기가 없었다.

나는 안도했다.


누군가 뒤에서 내가 그림 그리는 걸 보고 있으면

위축이 돼서 선을 그어 내리는 것도 부끄러울 만큼,

그렇게 그림과 멀어졌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요즘엔 그림 그리는 게 즐거워졌다.

잘 못 그려도 그 나름대로 귀여워 보이고,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어디를 만져볼까,

무슨 색을 섞어볼까,

생각하느라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다른 잡생각이 떠오르지 않아 좋다.

언제 나는 또 변한 걸까.




2.

나는 늘

“나도 그거 하고 싶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나두 그거 하구 싶다.”

라고 더 자주 말하는 사람이다.


저렇게 풀어져서 말하는 게 내 말투인데,

언젠가부터 글쓰기 할 때는

참 멋있어 보이려고 했던 거 같다.

재미대가리 없는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면

그게 곧 내 가치가 될까 봐

값어치 떨어질까 벌벌 떠는 수산시장 갈치 고등어처럼

푹푹 썩어가기만 한 것 같다.


그저 마음 둘 곳이나 찾으려고 한 거였는데

뭐가 그렇게 무서웠던 건지

갑자기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느 소설책에서나 본 것 같은 멋진 단어를 고르려고 애쓰는 대신에


나두 빨리 내 나이 또래 누구처럼 잘 되구 싶다.

내 인생 언제 풀릴까나. 잉?


이라고 진짜 그냥 속이나 풀어내면 되는 걸.


누드 크로키 속 모델들은 대부분이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특징 잡아서 그리기 좋으라고 그러는 거겠지.

나는 어림잡아 15~16년 정도는 그렇게 포즈를 잔뜩 잡고

근육에 쥐나게 살았던 것 같다.

잘하고 싶은 건 무조건 최고로 잘해야 되고

잘나보여야 되고

똑똑해보여야 되고

거기다 근데 매력까지 철철 넘쳐


그렇게 보이고 싶은데

글을 써보니 아닌 게 눈에 딱 보여서

창작자가 아니라

습작 폐지들을 모아두는 셀프 쓰레기통을 자처한 것이다.


내가 쓴 글 자체가 나는 아니다.

내 어느 한 부분을 오리고 갈아서 넣었을 순 있어도,

딸기 스무디가 딸기는 아니듯이,

그게 전부 다 나는 아니다.

지금 이 일기가,

저번 언제쯤 쓴 소설이

언제쯤 써둔 시나리오가 별로여도

그때의 내가 별로였을 뿐

어린 랍스터처럼 계속 껍질을 벗는 나는 또 변한다.

그러므로 혹여나 그때의 내가 별로였다 해도

나는 살아가도 된다.


못해도 된다.

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


못해도 되고 나서야,

이제야 맛이 느껴진다.

자유롭다.




3.

누군가에게나 자신만의 작은 지옥이 있다.

관건은,

이 지옥을 얼마나 빨리 발견하느냐에 있다.


대부분이

어느 날 거울을 봤을 때

온몸에 푸르딩딩하게 곰팡이가 피어있고 나서야

아, 나 드럽게 지독한 곳에서 코만 간신히 막고 살았네,

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첫 번째 하는 선택은

청소하면 나아지겠지,

병원 가면 나아지겠지,

내가 잘 하면 나아지겠지.


아니다.

그냥 그 지옥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

얼마나 깊은지 대략적으로라도 파악한 후

그 구역을 잘 다스리며 살면 된다.

경찰도 세우고

경비견도 풀고

세콤도 설치해두면 된다.


이 정도는 괜찮아.

나 정도면 양반이지.


그런 생각은 일말의 도움이 안 된다.

피부병은 생기기 전에 미리 병원에 가서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면

1-2만원 안에 박멸이 가능한데,

이미 온 얼굴에 퍼지고 나서 가면

최소 50만원은 든다.


절약하자.



사진을 찍으니 색이 다 표현이 안 돼 아쉽다. 오일파스텔로 그린 그림. 글/그림 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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